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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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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요일 4:7-12)


우리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시련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환난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인이건 비 그리스도인이건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인생의 시련이 있습니다. 누구나 질병에 걸릴 수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재난을 만날 수 있고, 가족의 죽음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욥기에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고 했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면 뜨거운 기운에 의해서 가벼운 불티가 위로 날아오르듯이 인생에 고난이 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요 죄악이 넘치고 재앙이 횡횡하는 곳입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많은 사람이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과거에도 익숙하게 겪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거보다 더 힘들어하는 이유는 신뢰하고 미래를 맡길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직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언제라도 밀려날 수 있는 경쟁의 장(場)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용의 대명사와 같았던 은행도 부도가 나고, 철석같이 믿었던 정부의 약속도 공수표로 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저마다 염려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통해서 생활의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을 말씀해 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염려의 백해무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지은 추포가(秋浦歌) 중에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백발삼천장, 연수사개장)

“흰 머리털이 삼천 길 근심으로 인하여 이처럼 길어졌네”

이 시는 근심이 우리의 심신에 얼마나 큰 타격을 안겨주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염려 근심은 머리털을 희게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잠언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고 하였으며, 시편에는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 6:7),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시 102:5)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염려 근심은 우리의 육신을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만듭니다.

그뿐 아니라, 근심은 정신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잠언에 보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고 하였습니다. 몸이 병든 것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이 병들면 약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염려 근심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마 13: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마 13:22). 마음에 세상의 염려가 가득하면 교회에 나와 앉아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심신을 아울러 피폐하게 하고 병들게 할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후퇴하게 만듭니다.

경제적인 시련을 만났을 때 우리는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재물을 잃어버렸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빼앗기지 말아야지, 경제 문제로 인해 믿음 생활을 등한히 한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많은 재물을 얻은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부자가 되었으나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불화한 사이가 되었다면, 무엇이 그리 행복하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의 무익함을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25-34)

주님의 말씀과 같이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염려는 우리의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약하게 하므로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의식주 문제를 비롯해서 당면한 많은 일로 인하여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염려 대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당면하는 모든 문제를 전화위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현대의 가장 번영하는 산업 가운데 하나는 보험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재 보험이나 자동차 보험에 들어두면 혹 사고가 생겨도 인명을 다친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손해 본 것을 보험회사가 배상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모든 종류의 보험에 모두 가입했더라도 염려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암 보험을 들었으므로 암에 걸렸을 때 입원비, 수술비 및 요양치료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다 지급 받을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보험이 암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이는 생명 보험에 들었다고 해서 죽음의 두려움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국민연금을 든 사람들은 기금 고갈로 인해 제 때에 연금 지급을 받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노후의 보장을 위해 든 연금이 오히려 걱정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위적인 방법으로 염려를 없애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개정 개역판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권고한다’는 말은 ‘보살펴준다’ ‘돌본다’는 뜻입니다. 주께 너의 염려를 다 맡겨라 왜냐하면 주께서 너를 돌보아주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없거나, 혹 있더라도 중병에 걸려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가정이나 부모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그런데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자녀가 내일 먹을 양식을 걱정하고 입을 옷을 살 수 있을까, 앞으로 학비를 계속 낼 수 있을까 염려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습니까? 아마도 “얘야, 너는 그런 걱정이랑 하지 말고 잘 먹고 잘 놀고 공부나 잘해. 엄마, 아빠가 너를 돌보아줄 테니까 아무 것도 염려할 것 없어”라고 말해 줄 것입니다. 

갓난아기를 보세요. 갓난아기는 스스로 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모두 다 엄마가 해 줍니다. 배가 고파도, 오줌을 누어도, 어디가 아파도 그저 울음으로 엄마에게 알리기만 하면 됩니다. 갓난아기는 절대로 염려하는 일이 없으며 무슨 일이건 전폭적으로 엄마에게 맡깁니다. 오직 엄마의 품에 안겨 있기만 하면 한없이 평안합니다. 우리는 갓난아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맡기는 것은 곧 신뢰하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신뢰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맡길 수 있으나 적게 신뢰하는 사람은 극히 적은 부분만을 맡길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다윗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는 소싯적에 전쟁에 나가 불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매 일격에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양을 치던 목동에서 일약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이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죽이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뒤쫓고 백성은 다 사울 왕의 편이 되어 다윗의 숨은 곳을 고해 바쳤습니다. 광야의 동굴조차도 안전한 곳이 못되어 적국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삼상 24:14)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다윗의 처지는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에 비유할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토록 절망적인 형편에서도 다윗은 정신 이상이 되지 않았고 드디어는 모든 시련을 이기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시편 56편에서 다윗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노라면 두려운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오, 하나님, 두려움이 제 마음을 엄습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만 의지하렵니다.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저에게 믿음의 담대함과 평안을 주옵소서”

적장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이지만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움이 엄습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환경과 형편을 초월하는 하늘의 평강이 그의 심령에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고백하기를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고 하였습니다. 젖을 뗀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처럼 만족스럽고 행복한 상태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기가 마치 이와 같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같이 진술합니다.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렐루야! 

작금에 우리는 북한의 핵위협으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핵무기 뿐 아니라 생화학 무기와 휴전선 너머의 장사정포 역시 위협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깨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든 위기에서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사밧 왕이 남 왕국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한번은 모압 자손, 암몬 자손, 마온 사람들이 연합군을 편성해서 유다를 침공해왔습니다. 그 때 유다는 적군을 물리칠만한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왕을 비롯해서 온 백성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마냥 주저앉아 있지 아니하고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야하시엘의 입을 통해서 유다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야하시엘이 말하기를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전쟁하러 나가면서 성가대를 맨 앞에 세우고 그 뒤를 군대가 따라가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가대가 군대 앞에 서서 행진하면서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그만 적들이 분란을 일으켜서 자기들끼리 싸워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적진에 이르러보니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하는 데만 사흘이 걸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호사밧의 간구를 들으시고 유다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신 능력으로 성도님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 나라를 지켜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자녀들의 교육에 쏟아 붓는 열정은 온 세계인이 다 알아줍니다. 그러나 그 같은 열정이 과연 교육적으로 적절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녀들의 장래에 대한 염려에 기인한 열정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 염려되므로 일단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 지혜로운 방법도 효과적인 방법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으로 시류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녀를 맡겨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공부의 목적이 이 사회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자녀들도 요셉과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이 땅에서도 존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보기에는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호하여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아시고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님들의 삶을 책임지시고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근신하여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마귀는 칼과 총으로 성도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공격할 때 영적으로 졸며 잠자게 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도 파수꾼이 잠들면 함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최신 무기로 무장하였을지라도 군인들이 잠들면 무용지물입니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 영적으로 졸며 잘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갖 염려가 다가올 때에 믿음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그만 염려 근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며 염려 근심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깨어 기도에 힘쓰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갔으나 기도는 하지 않고 졸며 잤습니다. 그들이 “깨어 기도하라” 하신 주님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졸며 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낙심되고 염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밤에 붙잡혀 가셔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심문을 받으시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인해 염려하고 두려움에 압도된 상태였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잠만 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다 주님을 버리고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그의 쓰라린 실패를 통해서 터득한 교훈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생활에 힘쓸 때에 세상의 염려, 근심이 우리 마음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 근심에 사로잡혀서 믿음에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하여 늘 깨어 기도하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작정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성도님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힘이 나고 기도의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작정기도회는 교회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석한 성도님들은 개인적인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과 병든 자들과 어려움을 만난 분들을 위해서, 또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니라와 우리 민족을 위해서 그 외에도 많은 기도의 제목을 갖고 간구합니다. 저의 바람은 더 많은 성도님이 작정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역장님들만 참석하는 기도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하셔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분들도 참석하십시오. 기도의 훈련을 받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고 하셨습니다. 

혼자 은밀히 하는 기도도 응답받지만 여러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할 때 더 큰 역사가 일어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하신 대로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9)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이 다가올 때 염려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염려의 짐을 져 주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나라의 평강을 우리 심령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 인격을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해 주십니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김으로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풍성히 체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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