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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미문 치유 사건의 의미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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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미문 치유 사건의 의미 (행 3: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은 1장 8절의 선교 지상(至上)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복음이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차례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산되었고,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어 남쪽의 헬라 지역으로, 그리고 에에게 해협을 건너 로마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팽창은 자연스레 되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시련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전개 과정에 따라 예루살렘 내에서 복음이 강력히 선포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 첫 번째 기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지상 교회에 주님의 사역을 위임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아직 교회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점점 아름답고 풍성해져 갔지만 교회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을 즈음에, 주님께서는 성전 미문의 하체 장애인을 등장시키셔서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가를 알게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선천성 지체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애인은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말씀 한마디로 완치되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성전 미문의 장애인이 즉시 고침 받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전 입구에서 사도들이 장애인과 마주침 (= 주님의 관심이 머무는 곳,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  

1-2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본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가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한 사람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사람은 무려 40년 이상을 불구로 지내온 하체 장애인이었습니다. 사건의 전개로 보아 이 사람이 선천적인 장애인이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의 대표적인 존재 아닙니까? 그러니까 본문에는 교회의 상징적인 존재가 매일 습관처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모습과 일상적으로 늘 구걸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지체 장애인이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관심이 바로 이런 사람에게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교회가 관심 가져야 할 대상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도들이 성전 입구에서 하체 장애인과 마주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장소에 스스로 올 수조차 없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40여 년간 장애인으로 살면서 사회적으로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이 사람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태어나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보며 외적인 장애와 함께 내적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좌절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또 어떠합니까? 그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 없이 ‘항상 그곳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 정도의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이 장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교회가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장애인이나 소외된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과 달리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귀찮은 일 정도로 여겼습니다. “주님, 저 많은 사람들을 빨리 돌려보내십시오.”

그들은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막았던 사람들이고, 소경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을 때 “조용히 하라” 고 하며 소경의 소망과 울부짖음을 막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이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에도 그 장애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베드로와 요한에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까닭은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마음도 가게 되고, 주님의 눈이 주목하는 것을 우리의 눈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사역을 사도들과 교회에 위임하실 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제자들아,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너희에게 위임한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

“내가 원하노니, 너희의 손을 내게 다오. 지치고 힘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나의 손이 되어 다오.”

“사랑하는 성도들아, 너희의 귀를 나에게 다오.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신음하고 있는 그 신음소리를 내가 너희의 귀를 통해 듣기 원하노라.”

우리가 우리의 손을 주님께 드리면 우리 손은 주님의 손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귀를 주님께 드리면 그 귀는 주님께 쓰임 받는 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성전에서 무엇을, 또는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 목사를, 찬양대를, 혹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보십니까? 

눈으로 주님을 모신 사람, 마음으로 주님을 모신 사람, 귀로 주님을 모신 사람은 자연인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을 가집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님께서 나의 손과 발, 눈과 귀와 심장을 통해서 보고 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그 장애인을 주목하며 “우리를 보라”고 함 (= 계속해서 바라봄, 눈과 눈을 마주침)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 ‘주목하여’(아테니사스) 라는 동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눈길을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그 장애인을 진지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을 단지 물질적 구제가 필요한 대상 정도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동일하게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한 인격이요 영혼으로 여기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장애인의 바라보는 동작, 즉 ‘보거늘’(에페이켄) 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반응이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주목하다’ 라는 뜻인데, 이에 비해 베드로의 ‘바라봄’(아테니조)은 더 적극적이고 애정이 담긴 행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들은 그 장애인에게 ‘우리를 보라’ 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절망적인 자세로 성전 미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보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 절망 속에 깊이 빠져 있는 장애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던진 사랑의 말입니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땅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채워질 때까지 시선을 주고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 사람에게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적인 관심과 주의를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먼저 ‘우리를 보라’ 고 말하면서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눈으로 대화를 해보셨습니까?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눈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가야바의 뜰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을 때 심문받던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고, 이때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미문의 장애인 거지를 바라보는 베드로의 눈빛은 아마도 실패자인 자신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담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주님의 그 눈빛에서 놀라운 생명의 힘과 용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주로 어떤 것을 담고 있습니까? 우리 주위의 불신 세상은 우리의 시선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요? 

성도들은 불신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를 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우리를 본받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거하는 우리를 보고 주님을 믿음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우리를 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 미문의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외치던 사도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불신 세상을 향하여 자신있게 외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킴 (= 생명의 역사, 내가 받은 은혜를 나 눔) 

6-7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 베드로의 말을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들에게서 물질을 받고자 하는 걸인의 바램을 일언지하에 포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표면적 이유 뿐 아니라 또다른 중요한 내면적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은과 금’ 이라는 표현은 금·은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런 미문처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한 당시의 유대교를 빗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걸인이 앉아 있는 미문은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의 입구 역할을 하는 문으로서 금과 은으로 장식된 사치스런 문이었지만, 정작 유대교는 성전의 화려한 외양에 비해 이미 능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없거니와’ 라는 표현은 자신이 이제부터 행할 일이 물질적 동정의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더 위대한 일일 것임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 장애인에게 적선을 베풀 생각은 않고 그의 불구의 몸을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는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요하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 가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가 미문의 하체 장애인을 예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킨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는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에서 ‘···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전치사 ‘엔’을 직역하면 ‘~안에(in)’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의 ‘이름으로’ 라는 번역은 베드로가 장애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단지 걷기 위한 수단으로 준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줍니다. 

하지만 원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In the name of Jesus Christ)’ 라는 표현은 장애인이 자신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적입니다(히 2:12).  

장애인이 자신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8절) 그가 예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강력한 생명의 능력을 현저히 나타내는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외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독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리킨다면 그가 말한 ‘은과 금’은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6절은 성전이 상징하는 유대교와 그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시고 죽으신 후에 말씀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성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본문의 장애인은 외식에 물든 유대교의 화려한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동정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자신의 병든 육신을 고침받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귀한 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물론 은과 금도 중요합니다. 돈으로, 물질로 세상을 도우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본문의 의미를 정말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과 금이 큽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큽니까? 은과 금이 소중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주어야 하는 것이 은과 금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까?

중세에 한 교황이 사제들을 모아놓고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창고에 재정이 넘쳐 납니다. 사도들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나갔소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참으로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화입니다. 흔히 현대를 물신 숭배 시대라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풍조는 어느새 성도들의 의식까지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번영의 신학과 세속주의에 물든 한국 교회는 베드로의 외침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심지어 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의 영역에까지 예수님의 자리를 물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때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여기 하체를 쓰지 못해 앉아 구걸하는 장애인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남들의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는 모습이 낯설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현대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성전 미문에 앉은 이 거지와 같이 은혜의 보좌 깊숙한 곳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성전의 문간만 맴도는 영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같은 장애인인 나에게 찾아오셔서 생명을 나눠주시고, 사랑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내가 받은 그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주신 사랑과 은혜를 다른 장애인에게 증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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