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생활 아닌 신앙생활 하기 (행 4:1-12)

첨부 1


종교생활 아닌 신앙생활 하기 (행 4:1-12)

지난 5월,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바이킹을 타면 멀미가 나고 시간 내는 것도 여의치 않아 제겐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본격적인 사춘기가 오기 전 꼭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 함께 한 것입니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가방을 메고 대기하는 시간이 계속되다가 장미공원 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순간 제 눈을 사로잡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너무나 예쁜 장미로 만든 포토존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장미로 만든 하트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장미로 만든 포토존은 처음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도 그 아름다운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진짜 장미가 아니었습니다. 향기가 나지 않는 거에요.

사진을 찍고 나오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진짜 장미와 가짜 장미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진짜 장미보다 가까 장미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날 놀이공원에서 돌아오면서 문득 그런 현상이 기독교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진짜 신앙생활과 비슷한 종교생활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종교생활을 하며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하면서 적당히 종교생활을 하며 살아갈 뿐 어떤 영적인 변화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종교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교인들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은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종교생활이고 무엇이 참된 신앙생활인지 우리는 정확히 배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종교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머저 잘못된 종교관을 버려야 합니다.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보는데 기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닙니다. 아니 찰스 스윈돌은 “기독교의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종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도 종교 가운데 하나이지 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종교가 무엇입니까?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인간이 행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을 먼저 찾아온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 하다 보면 참된 신앙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교적이어서 나름대로 종교관을 갖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교회 나와서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고 종교심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뭐라고요? 놀랍게도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부활 메시지를 싫어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부활과 부활 메시지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참된 신앙생활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원문을 보면 2절 맨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현세뿐이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성전 맡은 자로서 사두개인으로서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특권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갖습니까? 현세에서 더 많은 복을 누리고 현세에서 안정감을 갖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지금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그것은 종교생활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종교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잘못된 주인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어릴적 아이들이 하는 행동 가운데 하나는 남의 집에 가서 갖고 놀던 그집 장난감을 ‘내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는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성숙하면 자신의 것과 다른 사람의 것을 구분할 줄 압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자기 것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신앙을 경험하지 못하고 변화가 없는 딱딱한 종교생활을 합니다. 종교적인 지식은 쌓아갑니다. 직분도 받습니다. 금식도 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 삶 가운데 참된 신앙생활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았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으로 모실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주인의식,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4장 7절 보세요.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아니 이게 지금 적절한 질문입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0여년간 앉은뱅이 걸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일어나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 사건을 통해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도대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라는 말은 ‘휘메이스’라는 2인칭 복수대명사의 강조형으로 ‘너희와 같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같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했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사도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일어나 걷고 있는 앉은뱅이 걸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그들은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잘못된 주인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권력을 가진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이라는 착각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고 참된 신앙생활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종교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참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후배 목사를 만나 그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유명해지려는 야망 때문에 이것저것을 하다 보니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예배를 인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빌려서 다시 자신의 사역을 일으켜 유명해 질 수 있을까?’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TV프로그램에서 만난 한 교회를 찾아가서 돈을 빌리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난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더랍니다.

  “당신 눈이 꼭 동태 같구려”

돈을 빌리려고 갔지만 기분이 상해 그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신이 유명한 사람인데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는데 자꾸 그 말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그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변화될 수 있냐고 하니까 예배를 드리자고 말하더랍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자신은 수많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예배를 인도하는 줄 아느냐고 그랬더니 그 목사가 하는 말이 “당신이 인도하는 예배 말고 당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드려보라.”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그 말에 후배 목사는 한대 얻어맞은 충격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이 예배를 인도하면서도 하나님께 예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후배 목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목사가 야망에 눈이 어두워 자신이 주인 되어 살던 모습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들려진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복음이 그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도 제 삶의 구석구석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아닌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인이 되어서 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는, 말로만 예수님을 인생의 구원자요 주님이라고 인정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저의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습니까? 아니 왜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잘못된 주인의식과 종교관을 갖고 사는 것일까요? 그것은 날마다 복음 앞에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누가 참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요? 베드로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 바로 복음을 들은 자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수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복음 때문에 변했습니다. 아니 이 복음을 전하라고 사도로 부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복음을 묵상하고 날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0~12절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오직 복음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생활이 아닌 참된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날마다 복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오직 복음 앞에서 자신이 주인이라는 잘못된 주인의식을 날마다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달, 카일 아이들먼이 쓴 “not a fan”(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을 추천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목회를 하던 젊은 목회자 카일 목사가 자신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회개한 후에 쓴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로 날아온 메일 한통을 소개했습니다.

“카일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떠난 이유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카일 목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그 사람과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카일 아이들먼 목사입니다. 제 설교가 싫어서 교회를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당황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색한 순간이 지나가고 전화를 받은 성도가 횡설수설 해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음... 목사님의 설교가 제 삶을 뒤흔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곳에 와서 왜 설교를 듣고 계십니까? 습관을 따라 앉아 있으십니까? 어릴적부터 다녀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마음 편해서 다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종교지도자들은 불편했습니다. 아니 싫어했습니다. 왜요? 편안하게 종교생활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유대교의 기득권을 흔드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편안한 종교생활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을 듣고 인생의 주인을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꾼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택하십시오. 편안한 종교생활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김인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