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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요 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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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요 13:1-17) 

서점에 나오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할 때 종교서적이든 일반서적이든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은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맡은 그룹이나 조직을 세울 수도 있고 허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리더 되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믿는 자로서 리더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겠고 믿는 자로서 따르는 자들도 올바른 따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분의 실천은 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나 삶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분주하지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고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맡겨진 일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섬김의 리더십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실행해야 할 제자도를 보여주십니다.     

세족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

요한복음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장까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개의 표적이 언급됩니다. 13장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을 본 제자들을 믿음으로 확실히 세우기 원하셔서 말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위로 제자들을 양육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의 행함을 본받으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그 밤이 예수님에게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다락방에서 있던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종합해보면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하속들에 의하여 체포되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아침에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과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삼 년을 한솥밥을 먹고 지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도 보아왔지만 아직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누가복음 22:24를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 하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서로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심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식사 중에 왜 일어나시는지 궁금해 하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께로 쏠립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예수님은 직접 물을 떠다가 대야에 담으시고 가까이 앉아 있던 제자들부터 발을 씻기시고 씻긴 발을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기의 발을 내맡기며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도,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할 일, 곧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광야인지라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길을 걷고 나면 샌들을 신고 있는 발에 흙먼지가 덮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의 종이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종이 하는 일을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침묵과 충격 속에 바라보던 베드로는 그 손길이 자신에게 이르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손까지 붙잡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높으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아는 자들이 가지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씻어주심이 없이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곧 당하실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그 죄 씻음을 통하여 온전한 영적 연합이 이루어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는 가운데 보여주는 사양은 겸손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이 됩니다. 주의 일을 맡겨도 부족함을 이유로 습관적으로 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일을 맡겨도 같은 이유로 사양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자꾸 사양만 한다면 도리어 불순종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문자적으로 ‘너는 일부분도 나와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 말합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옵소서” 하면서 손과 머리를 예수님께 내밀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의 대답이나 요청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의 반응은 충동적입니다.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겸손한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은혜를 거절했던 것이며, 손과 머리를 씻겨 달라는 것은 적극적인 신앙 같으나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당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옵니다. 그러니 몸은 이미 깨끗한 것이요 오는 동안에 발에 묻은 먼지만 잔치 집에서 씻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구속의 피로 목욕을 했지만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의 흙을 묻히며 살아갑니다. 마음으로 (시기, 질투, 욕심), 말로 (혈기, 비방, 거짓말), 행동으로 (폭력)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의로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로서 날마다 발 씻음, 곧 성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부분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사랑

세족을 통해 선생이 제자를 섬기는 겸손한 사랑,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끝까지의 사랑’을 방해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자기 오빠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격하며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향유에 젖은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최상의 헌신의 행위를 보여주는데도 가룟 유다는 옆에서 못 마땅해 합니다.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마리아에게 면박을 줍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회계를 맡았기에 마리아가 향유 판돈을 드렸다면 그 중의 얼마를 자기 수중에 넣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마리아에게 엉뚱하게 분풀이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도 정성껏 씻고 닦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를 지목하지 않고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유다의 양심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충동질을 따라 예수님을 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6절에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유다에게 주시니”를 보면 예수님께서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제공하신 포도주에 적신 한 조각의 떡은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와 찢기실 살을 상징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한 조각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이를 받아들고 배반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도 “비통히 여기시고” 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표현 속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인간으로서 느끼신 배신감과 연민의 정을 모두 드러내십니다. 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로서 생을 마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면목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랑에 대해 무지한 것은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이 이룰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베드로가 실패할 것도 예고하십니다. 이곳에서 예고된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요한복음 후반부를 엮어가는 중요한 맥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실패는 21장의 디베랴 바닷가의 회복(21:15-19)을 통해 반전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사랑에로의 초정에 베드로가 응함으로 회복을 경험하며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수행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합니까?

1) 주님처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은 말이 아닌 행위로 예수님의 깊은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중생의 죄 씻음 후에도 매일매일 저지르는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세족에는 “내가 죄를 씻어주는 사람이다, 죄를 씻기 위해 세상에 왔다, 너희의 어떤 허물도 용서하고 씻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발을 씻는 제자들과 깊은 사귐을 가지시려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족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까지 하며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며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2)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절). 

섬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긴 후에 그 밤의 사역에서의 교훈을 정리해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은 ‘디아코노스’ 곧 ‘섬기는 자’로서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닦는 행위를 통하여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4절의 겉옷을 ‘벗고’에 쓰인 단어와 10:11절에 선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세족의 행위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족 사건은 예수님의 살과 제자들의 살이 맞닿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며 깨끗함과 회복됨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기억하며 더 겸손히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도도 말로만 하고, 사랑도 말로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말로만 가르치게 됩니다. 자기 몸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믿음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채 행하는 겸손이나 섬김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을 정결케 하셨다는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섬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제자들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광 받는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예비하신 상급을 받게 됩니다.

3) 주님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이 힘써 행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제자의 사랑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랑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은 이런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고, 섬겨야 섬김을 받고,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 사랑입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 주고도 아쉬워하는 사랑입니다. 머리로만 사랑이 아니라 허리를 수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자기의 지갑을 여는 사랑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할 것이고, 그 때 예수님도 우리를 자신의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 속에서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섬김의 현장(가정, 이웃, 학교, 직장 등)으로 부르십니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많은 상처들이 생깁니다. 가정에서, 이웃에게서, 사업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로는 남들에게 털어놓기 거북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몸까지 쇠약해집니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픈 상처가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위로와 치료함을 받았다면 우리들은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 들이 되어 상처를 가진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은 후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 사람들에 전도하러 뛰어갔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고 주변의 핍박 속에서도 주여 내가 믿나이다 담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거지가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함 받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의 찬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 상처받은 자들이 팔로마 한인 교우들의 간증과 섬김을 통하여 치료함 받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예수님의 권면을 좇아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섬김의 자세를 가질 때 저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의 절정은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세족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고 삶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함을 교훈하십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알고 행하는 자의 복’을 소개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곧 겸손한 섬김이 복이란 뜻입니다. 복이 되는 겸손은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성숙된 제자들이라면 서로 발을 씻기며 남들을 섬겨야 합니다. 앞에서 이끄는 자나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섬기며 나아가는 그룹이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 섬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들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들이 삶의 현장에서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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