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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을 넘어 하나님께로 (왕상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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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넘어 하나님께로 (왕상 9:1-9)  

소설가 <이청준>선생이 1976년에 발표한『당신들의 천국』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가 끝난 얼마 후 소록도 한센병 병원에 조백헌 대령이란 사람이 병원장으로 부임해 옵니다.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소록도를 천국처럼 만들겠다고 말한 후, 섬을 개발하기 위해 주민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노력은 사람들의 비협조, 육지 사람들의 탐욕이 가세하면서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이나 집단의 의지와 노력이 과연 모두에게 기쁨을 가져오는가? 아니면 그 일을 추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는 천국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일은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부모님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던 자녀들이 갑자기 부모님 칠순잔치, 팔순잔치를 연다면, 그리고 그 후엔 다시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한다면, 그것은 마치 대단한 효자들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 생색을 내는 자녀들만을 위한 잔치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광도 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한 후의 일을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성전 공사가 끝난 후 거창한 봉헌예식을 거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전에 모셨고, 봉헌기도를 올리고, 잔치를 열어 축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상 8장 6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는데>라고 했습니다. 봉헌예식은 14일간 진행되었습니다. 

성전봉헌식이 끝났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차례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응답을 기대했을까요? <정말 수고 많았다. 이렇게 감격스럽기는 처음이다. 너희가 이토록 귀하게 섬기니 정말 기쁘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상황에 꼭 맞는 응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기도를 다 들었다. 너희가 정성껏 지은 이 성전을 기꺼이 받을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두고, 내 눈길과 마음을 거기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솔로몬이 기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은 솔로몬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수고했다. 네가 성전까지 지어 바쳤으니, 영원한 면죄부를 주겠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하든 평생에 복을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이 결코 그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솔로몬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사이에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던 것>도 다 이루어진 것일까요?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원하는 것은 다 이루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제부터 이루어져야 할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또 솔로몬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내용도 달랐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는 데서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처럼 생각하실 것이라는 전제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에 맞추도록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하등종교는 자신을 위해 신을 섬깁니다. 신은 이름만 신일뿐, 사실은 사람의 종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신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신을 달랠 요량으로 신이 좋아하는 것을 바칩니다. 신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사람들은 기꺼이 그 신을 버립니다. 아니 애초부터 그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 분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께 맞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동차가 제대로 달리게 하려면 설계자의 의도대로 해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정된 연료를 넣어야 하고, 정해진 때 소모품을 갈아주어야 합니다. 사용설명서대로 해야 자동차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도 하나님의 뜻에 따를 때 제대로 관리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기쁨을 느낍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리길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순교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무엇을 얻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 분께 나아가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도는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다가서는 정도에 따라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백성의 신앙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룸으로써 참된 모습을 갖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성전 건축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바로 이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 있는 근본문제입니다. 흔히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르게 먹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첫째,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백성들과 함께 지은 성전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건축물로서, 그 때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보다 더 장대한 건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역군 삼만 명, 짐꾼이 칠만 명, 산에서 돌 뜨는 자가 팔만 명, 감독관이 삼천 삼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공사에 소요된 시간은 칠년이었습니다. 게다가 다윗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드린 금은보화를 보면 금이 팔천 달란트와 그리고 또 일만 다릭, 은이 일만 칠천 달란트, 놋 일만 팔천 달란트, 철이 십만 달란트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최고로 화려한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성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은 이미 십계명 중 <제2계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4-5절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계명은 단순히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본질적 의미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건이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과 아론은 불안한 나머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 4-5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들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금송아지 모습 안에 가둔 것이야말로 그들의 죄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되고 연결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관계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으로 매수되는 분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 하나님을 현혹하려 드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성전을 지어 바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건축은 솔로몬과 백성들의 자기만족, 자신들만을 위한 잔치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전을 지어 바친 사람들이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저 성전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저 성전이 우리 마음일세.>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둘째, 마음은 쉽게 변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전에는 성전 지을 생각을 했던 다윗이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 그리고 이에 마음과 물질을 보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눈길과 마음을 두시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려하신 것은 마음은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변한다면, 그래서 그 화려한 성전 건물에서 그들의 마음이 빠져나간다면, 그 때 성전은 빈껍데기에 불과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성전 건물만 남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허탄한 우상과 세상의 욕망을 향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려하신 일은 그 후에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러 나라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그 여인들이 가져온 우상을 함께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미 성전은 빈껍데기만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결국 나라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초토화되어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셨습니다. 처음부터 그 분이 요구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어 받으신 것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마음이 떠난 성전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뼈저린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수백 년 더 지나 예수님 당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지은 성전이 있었고, 헤롯 대왕은 그 성전을 엄청난 규모로 확장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확장 공사로 성전 규모가 커졌고, 화려해졌기에 사람들은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1-2절을 『표준새번역』성경으로 읽어보면 실감이 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그 다음을 보면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게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39년 ~ 81년>장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성전은 폐허가 되었습니다.성전의 붕괴와 함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제사장들이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성전세 대신에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톨리누스, Jupiter Capitolinus>신전에 <피스쿠스 유다이쿠스 fiscus Judaicus>라는 굴욕적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티투스 장군은 무려 칠만여 명의 유대인을 포로로 끌고 갔고, 이들은 티투스의 부친인 <베스파시안, Titus Flavius Vespasianus, ? ~ 79. 69-79 재위>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 공사에 노역자로 투입되었습니다. 콜로세움은 티투스가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인 주후 8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오늘날 로마에 버티고 있는 콜로세움의 밑바닥에는 유대인들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이 콜로세움, 소위 원형경기장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성전 건물을 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성전 뜰에 들어와 <자, 이 성전이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건물이 얼마나 대단한가?>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몸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온 마음을 기울여,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 너머에 계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작은 행위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자부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6절 이하를 다같이 읽어봅시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돌과 나무로 짓는 성전 건물보다 마음으로 짓는 성전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하기에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말씀하길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드나들면서,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따라 사는 데 충실했었습니다. 그는 <보이는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보이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신앙>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이제 그는 성령 안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으시지만, 어디나 충만하게 계시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고정된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하고 전하는 <움직이는 성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찬양의 열기 모두 끝나면 / 주 앞에 나와 더욱 진실한 예배드리네 / 주님을 향한 노래 이상의 노래 / 내 맘 깊은 곳에 주께서 원하신 것 / 화려한 음악보다 뜻 없는 열정보다 중심을 원하시죠 / 주님께 드릴 마음의 예배 /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 찬양도, 예배도 마음이 담겨야 진정한 것이 됩니다. 

지금은 <마음에 주목할 때>입니다. 내일 새벽부터 주시는 시간은 마음의 밭을 가꿀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늘 몸으로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나와 앉은 우리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담긴 예배, 마음이 담긴 선행, 마음이 담긴 봉사, 마음이 담긴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참된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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