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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정의를 행하며 (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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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정의를 행하며 (미 6:6-8)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4월 28일 영국의 한 도시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5,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여했는데, 1등을 제외한 나머지 5,000여명의 선수들이 모두 실격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1위로 달리던 선수가 굉장히 빨리 달리는 바람에 뒤따르던 2, 3위 선수들의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앞선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2, 3위 선수들이 그만 중간에 코스를 잘못 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뒤를 따르던 5,000여명까지 정상 코스를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규 코스보다 약 264m정도를 덜 달려 완주를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완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등을 제외한 5,000여명 모두가 실격처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의 신앙의 경주는 어떤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심히 달려 완주까지 했는데 모자라다고 하고, 아예 실격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왜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과 탐욕과 이기적인 야망만을 생각하며 달려갔기 때문은 아닐까요? 
몇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진리일까? 아니면 한 사람이라도 바른 길을 간다면 그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구약 성경을 보면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시키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고 하는지 아느냐? 내 민족, 이 백성을 망하게 하는 나의 이 애타는 마음을 네가 조금이라도 아느냐? 그렇다면 네가 한 번 예루살렘에 나가 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 5:1)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가서 정의를 내리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찾으면 내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유보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중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 앞에 나서기를 원하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역할입니다. 

저는 이 마라톤 경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서 뒤에 가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앞선 한 사람의 삶이, 뒤에 선 사람의 삶의 모형이 됩니다. 앞사람이 잘하면 뒷사람도 잘하게 되어 있지만, 앞사람에게 문제가 생기고, 뒤따라가던 사람들도 똑같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잘못하면 자녀들이 그것을 회복하기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좋은 선배가 필요하고, 좋은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모형입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모두가 그러합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내 뒤를 함께 달려오는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체 경기를 주최하는 운영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람들이 코스에서 이탈하는 것을 왜 내버려 두었을까?’ 아마 마라톤 코스를 정확히 표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최측은 5000여명을 실격하고 나서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습니다만, 열심히 뛴 많은 사람들이 실격처리를 당했다는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 도덕적 기초가 바르게 규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법치국가를 의미합니다. 권력자도 법 앞에서 평등하고, 힘없는 사람도 법 앞에서 평등한 것이 민주주의 국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형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법이 힘 있고 능력 있는 자 앞에서는 위축되고, 연약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서슬이 시퍼런 칼이 된다면 그 공동체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정의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곧 부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짓 우상을 섬기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드리지 않고, 거짓된 우상에 삶을 쏟아붓게 될 때 생기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 힘들게 살아가는 작은 자들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배려심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불의한 사회라고 오늘 미가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가는 주전 8세기,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예언을 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왕실의 권력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거짓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또한 법을 다스리고 있는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힘없는 자들에게 억울한 재판을 행했습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미가는 이러한 불의를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더 크게 지적을 받습니다. 거짓말로 예언하고, 백성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향해 “화있을진저”라고 무섭게 선포합니다. 

미가는 힘 있는 자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고 도리어 정의를 미워하며, 정직한 것을 굽게 만들고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미가 3:1) 

그리고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발하십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미가 6:3)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들을 징계하시고 고발하시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갈까 염려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미가서 6장 6∼7절 말씀은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천박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 6:6∼7) 

굉장한 이야기를 하기는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가서 경배할까? 번 제물로 1년 된 최고의 송아지를 가지고 나갈까? 천천의 숫양을 가지고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까? 아니면 내가 제일 사랑하는 맏아들을 마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가져다 드릴까?”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면 만족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지를 지켜보신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가슴에 품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사모하면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여기서 ‘인자’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인자함’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헤세드’ 라는 이 히브리어는 언약적인 사랑,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오직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인자함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물을 갖다 바쳐도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그것을 어찌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정의가 보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알게 된 후에 하나님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무척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보니, ‘이게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구나! 멋진 하늘과 태양, 달, 별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구나! 봄에 피는 꽃, 여름의 싱싱한 나무들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구나! 저 바다와 강과 산, 이 아름다운 것들을 선물로 주셨구나!’ 싶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구원의 주님이시며, 생명의 주님이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 같이 부끄러운 죄인을 택하시어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사실에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연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 인간적인 가치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시고,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헤아리신다는 말씀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벌레만도 못한 먼지 같은 인간들을 이토록 사랑하시고, 먼저 가까이 다가오시는 걸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개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자기 선언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나는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고, 참여자이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만드는 해방자이고, 자유케하는 하나님이라는 선언을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까지 계속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더 놀라운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고아의 아버지며, 과부의 재판장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버려진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남편을 잃어버리고 생존권마저 상실한 불쌍하고 가난한 여인의 재판장이 되어서 이 여인을 보호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가장 취약한 집단은 부모의 사랑을 잃어버린 고아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잃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과부들입니다. 성경은 과부를 표현할 때마다 꼭 앞에 ‘가난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그냥 과부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이 버려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대변해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이들을 위해서 재판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스파르타 교육의 강점 때문에 우리는 강하고 튼튼하게 키우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부모는 내 아들, 내 딸이 약자나 패배자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 전부를 자녀들에게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연약한 사람들을 약자와 패배자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허약해 보이는 것, 불구처럼 보이는 갓난아이들은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건강한 남자 아이들은 일곱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서 공동교육소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글 읽기도 했고, 음악도 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신체단련이었습니다. 정신력 강화를 위한 군사훈련이었습니다. 강력한 전사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소녀들도 국가의 감독 하에 육체 운동을 하고 정신교육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어머니가 건강하고 훌륭한 전사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스파르타는 한 때 다른 나라를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황금시절은 수십 년이 채 지속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약자를 무시하는 무자비한 강압정치와 체제는 오랜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선군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에는 당태종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주가 된 자의 도리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요. 만일 백성들의 이익을 손상해 가면서 욕심을 채운다면, 마치 자기 넓적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서 배는 부를지언정 곧 죽게 될 것이오. 만일 천하를 안정되게 다스리려고 한다면 먼저 군주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하오. 몸이 곧은 데도 그림자가 기울고, 윗사람이 훌륭히 다스리려고 하는데 아랫사람들이 혼란스러운 경우는 없소” 

그는 먼저 힘 있는 자, 권력 있는 자의 책임을 강하게 이야기한 후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나는 늘 자신을 상하게 하는 요소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탐욕스러움이 재앙을 부른다고 생각해 왔소.” 

이만한 군주, 이만한 권력자가 있다면 괜찮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떠할까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이것과 차원이 다른 왕이십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 10:17∼19)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가장 천하고 별 볼일 없이 흔들리며 삶을 연명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곧 이 백성 중 어느 한 사람도 놓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있는 자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가장 슬프고, 가장 힘들고, 가장 외로운 그 한 사람의 인격과 인권도 귀히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버려진 것 같은 사람의 존엄성도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품은 정의로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려 할 때 종종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는, 우리의 신앙이 개인주의화된 위험성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로 내 신앙을 확대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나만 예수 잘 믿으면, 나만 주님 생각하고, 나만 예배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불의와 악에 대해서는 입을 꽉 닫아걸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도 사랑하시지만, 공동체에 있는 악도 그냥 보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불의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신앙에서 공동체적인 신앙으로 신앙의 영역과 지경을 확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정의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악을 악이라고 지적하기도 전에 용서를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내게 있는 악을 하나님께 아뢰기도 전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악과 내 불의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모든 것을 무마하자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 왜곡된 승리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사회는 무언가 갖지 못한 자, 연약하고 힘든 자들을 약자와 패배자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귀중한 삶의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레미제라블을 보셨습니까? 형사 자베르는 정의의 사도처럼 모든 것을 대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던 그가 장발장을 만납니다. 그리고 장발장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가 구원을 받습니다. 사랑 없는 정의가 얼마나 문제 있는가를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된 그는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정의란 모든 것을 난도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 나아가 나보다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죄와 죄가 아닌 것이 분명히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고아와 같은 사람들, 과부와 같은 사람들,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안의 잘못된 것들은 서서히 쫓아내어 하나님의 의를 이 땅 가운데 이루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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