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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대한 부요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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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한 부요 (눅 12:13-21)


비행기로 여행을 하던 중에 만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첫눈에도 매우 부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매우 부요해 보이는 그 사람은 정말 대단한 재산가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재산과 사업의 번창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자기 자랑에 도취해있던 그 부자가 미안한 듯 “이제 당신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말씀 좀 해보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드디어 말할 차례가 온 또 한사람이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말이지 제 아버님은 엄청난 부호이시랍니다. 이 비행기를 포함한 이 동산이나 부동산을 소유하신 분이랍니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잘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하고 의아스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다시 말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물론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가 다 내 아버지의 것이랍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도 그 아버지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계 그 어느 곳에 가더라도, 무엇을 먹고 마셔도, 어떤 것을 가져도, 그 모든 것이 다 내 아버지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부자의 기분으로 살아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은 그제서야 그 사람의 말이 영적인 부요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확신에 넘치는 자랑과 행복감에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 큰 부자에게 “당신도 예수를 믿으면 나처럼 참 부자의 행복을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지금까지 내게,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부요함에 대하여 당신처럼 확신에 차서 이야기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저들이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이미 그 부자도 부요하신 하나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참 부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밭에 소출이 풍성했던 한 부자가 자신을 위하여 재산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야 된다고 하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라고 하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영적 부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요일까?

Ⅰ. 그것은 믿음의 부요입니다.

1. 그것은 창조신앙의 부요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실체를 확신하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미래적 실존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무엇인가? 누구인가? 바로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믿음은 창조신앙입니다. 존재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아닌가!

2. 그것은 구원신앙의 부요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9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바로 구원신앙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에 보배로운 믿음(벧후 1:1)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3. 그것은 성령신앙의 부요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롬 8:9), 예수의 영(롬 8:9), 성령(롬 8:16)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를 보배요(벧전 2:7), 보배로운 산돌이요(벧전 2:4), 보배로운 피요(벧전 1:19), 만국의 보배(학 2:7)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이야말로 부요 자체이신 하나님의 전부를 소유하게 되는 부요가 아닌가!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소유한 그 백성을 가리켜서 보배로운 백성(신 26:18, 사 43:4)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부요는 바로 모든 부요이신 하나님 자체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됩니다(롬 8:14-16).

이런 실상을 믿은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버리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걸음을 걸었습니다(창 12:1-4). 이런 실상을 믿은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24-26).
  
이런 실상을 믿은 바울도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빌 3:7-8). 그럼에도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10).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 모두가 부요한 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고후 8:9).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한 부요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구원의 보화를 얻는 부요를 가져다 줍니다(롬 1:16-17, 행 16:31, 엡 2:8). 그것은 마침내 사람의 사람된 제일의 본분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히 11:6, 전 12;13).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이런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Ⅱ. 그것은 사랑의 부요입니다.

어리석은 한 부자가 재물을 많이 가졌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재물을 취함에 부정이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재물의 소유주가 자기 자신 곧 ‘나’이고, 그 재물의 관리와 사용주도 자기 자신 곧 ‘나’이고, 그 재물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두고 하나님을 위하여나 이웃을 위하여 사용할 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하늘의 저축법도 몰랐습니다(마 6:19).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마 6:21). 더욱이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병든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영적 구제의 수단 곧 선교비나 전도비로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오직 자기를 위하여 더 크게 확장한 자기 곡간에 꽉꽉 채워두었을 뿐입니다.
  
사랑의 부요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을 복음 전파를 위한 전도와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함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가난하여 멸망으로 좇아가는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 곧 건강, 지식, 재능, 재물, 명예 등등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상에서 부를 받고 기타 여러 은사와 재능을 받은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비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자비심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에도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령입니다. 구령은 인간의 자비심 가지고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은총의 감격을 받은 자라야 합니다.

유대교의 랍비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모노바즈(Monobaz)라고 하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교적 차갑지만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해 기근이 닥쳐와서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때 그의 형제들이 와서 “너의 조상들은 그 보화를 축적하고, 그 자손들도 그 상속받은 재산에 보화를 더 보탰다. 그런데 너는 왜 상속받은 그 귀한 보화를 다 써버리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은 “나의 조상들은 보화를 땅밑에 축적했으나, 나는 그것을 땅위에 쌓았소.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을 위하여 쌓았지마는 나는 다가오는 세상을 위하여 쌓고 있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삶을 깨달은 부자였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부요는 곧 하나님께 대한 부요입니다.

Ⅲ. 그것은 소망의 부요입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는 ‘오늘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아버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말았습니다(눅 12:20). 누가복음 16장에는 예수님이 들려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비유를 보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으나, 그의 미래는 절망이었습니다.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는 가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한 금세주의자요, 또한 육체적 쾌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사실상 유물론적 무신론자였고, 행동적이며 실제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하나님 자신과 그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내세를 믿는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보화는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미래적 영광의 설레임 앞에 성령도, 신자도, 만물도 탄식(끙끙 앓음)을 하면서 대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속박이요 부자유요 불만입니다. 그러나 내세의 영광은 만족이요 자유요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유한이나, 내세의 영광은 완전이요 영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절망과 아픔의 성분들로 가득 찼지만, 내세의 영광은 희락이요 만족충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질랜드 사람들은 소망을 가리켜 ‘헤엄치는 생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소망이란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언제나 밤에 노래하는 새인 나이팅게일(Nightingale)과도 같은 것입니다. 
소망은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입니다. 가벼운 것이 아니요 무거운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것이 아니요 영원한 것입니다(고후 4:12-18). 땅에서 무너져 버리는 장막집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고후 5:1-2).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고별사 첫머리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요 14:1-3).
아프리카의 어떤 민족 중에는 왕이 되면 7년 동안 온갖 권세를 다 행세해도 괜찮은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면 왕은 반드시 백성 앞에 죽임을 당해야 되는 것이 그 나라의 국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나라에는 서로 왕이 되겠다고 앞을 다투고 있다고 합니다. 현세만의 사고에 집착해버린 인간들의 명예욕 때문입니다. 

네로(Nero) 황제는 금으로 집을 짓고, 왕적인 삶을 살았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금세주의, 현세주의가 주는 쓴맛입니다.

이렇게도 사람들의 마음은 강하고 담대하게 속는 길을 택하고, 속는 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소도 한번 빠진 구덩이에는 다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물의 욕심, 재리의 유혹에 끌려들어가 영원히 가난해져 버리는 저주를 계속해서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겔 18: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란 신학자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주님께서는 재산이나 소유를 정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신뢰하고 사모하여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지 아니함을 정죄한 것이다.”라고 본문을 주해하였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자기에 대하여 부요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는 영적 재산이 많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구원에의 믿음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는 풍성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의 행위가 다가오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내세를 향하는 소망으로 올라가는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 재산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천리마는 외양간에 매여 있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아름다움과 향기를 품고 있는 꽃봉오리는 활짝 피어나기를 원합니다. 정말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 그리고 마침내 이르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확신에 찬 소망을 가진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부요를 선용할 줄 알아 행동으로 옮기는 그 사람은 천하제일의 부자입니다. 

누가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은 부자인가?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을 보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지닌 보화의 희귀성, 가치성, 부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 중에도 창세 전에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이 주신 부요의 보배들입니다. 이 부요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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