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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전 12: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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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Desire Earnestly the Greater Gifts)
성경 : 고전 12:27-31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벧후 1:3). 참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깨달아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해 가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파송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땅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성령 역사의 현장이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글로 적어서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독교를 글로 적어놓고는 ‘이것이 기독교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실체입니다. 성령님의 숨결이 복음을 살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주장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가서 복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일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은 살아 있는 복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손을 통해 기사와 표적들이 일어나고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궁극적인 권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에 그분은 성령 하나님의 활동을 우리의 평범한 일상사에 도입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자원이고, 자연법을 훨씬 능가하는 초자연 세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의해 침공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질서이며, 기적의 질서이고, 자연과 과학의 질서를 초월합니다. 더 높은 차원의 법칙은 때로 물리적 법칙을 뒤엎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이 작동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기적이 자연의 법칙과 반대 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능력과의 관계를 모르고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곳에 모셔 온다면 이 땅에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교회를 통하여 최후의 추수를 준비하고 있는 때입니다. 지금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기 때문에 귀신들이 떠나고 병자가 치유되며 우리는 새방언을 말하게 됩니다(막 16:17-18).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다’ 의 헬라어 원어는 ‘위에서 나다’ 로 번역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위에서 난’ 사람이 오직 물질로만 된 이 괴상한 세상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위에서 난’ 사람에게는 물리적인 연결 뿐만 아니라 영적인 연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행합니다(갈 5:25).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엡 2:6).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 이라 했는데, 이 능력은 우리가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받아 사용할 때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기초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보혜사 성령은 너무나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의 벽을 헌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성령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쏟으십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오직 복음만을 지지하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만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권면의 말 속에는 ?성도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하며(desire earnestly), ?은사 중에서도 더 큰(=교회에 더 유익한) 은사들을 사모하는 것이 좋으며, ?나아가 제일 좋은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하나씩 구분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
  
논의에 들어가기 전 먼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성경이 증거하는 바를 살펴봅시다.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신령한 것(프뉴마티콘, spiritual gifts)'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는 먼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알기를 원해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나의 주님’ 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특징인데, 이 중요한 고백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 중 최고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 그 자신’ 입니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은사는 결국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the Spirit) 인데, 이것은 성령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이루는 각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은사의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컨대 방언, 예언, 병고침 등의 현상들의 나타남은 믿음의 확신을 더하게 합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기 때문에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성령의 은사 아홉 가지를 조목조목 열거한 후에 11절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어서 저 유명한 ‘몸과 지체의 비유’에 대하여 비교적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요한 지체로서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 그리고 능력들(miracles), 병고치는 은사들(gifts of healings), 서로 돕는 것들(helps), 다스리는 것들(adminstrations), 각종 방언들(various kinds of tongues)이 있음을 언급한 다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성령의 나타남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은사이든 간에 성령의 은사는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곧 성령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성도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여러 가지 성령의 나타남이 있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그리고 방언들 통역함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선물들이고, 초자연적인 선물들이고, 성령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주신 목적은 지체의 삶을 잘 살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을 통하여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더욱 견고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은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크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영향을 미치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다양한 기능과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령의 나타남을 사모하고 또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성도에게 주시는 선물을 받은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의미이고, 주님께서 나의 믿음과 헌신을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 없이 우리의 사역이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 없이 우리 교회의 의사 결정이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당시 교회의 두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고, 이것은 오고 오는 세대에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들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성령께서 개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앞선 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다수결로 표결한 후에 그것을 성령님의 뜻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삶에 성령의 나타남이 있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교회 위에 성령의 나타남이 더욱 현저해 지도록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이 구절은 두 가지 방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은사 중에 작은 은사가 있고 큰 은사가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본절에서 ‘더욱 큰 은사’(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는 문자적으로는 ‘더욱 탁월한 은사들’ 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의 유익적 차원에서 가장 낮은 은사들 중 하나인 ‘방언의 은사’를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고 사모하는 것을 시정해 주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방언을 금지해서는 안 되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더욱 열렬히 사모해야 할 것은 교회 전체에 유익은 별로 없으면서 외형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방언의 은사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다른 은사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오해의 소지는 본절에 이어지는 말씀,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는 구절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많은 경우 ‘제일 좋은 길’ 과 ‘더욱 큰 은사’ 를 동격으로 생각하여, 바울이 말하는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 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사’의 ‘은사’로 번역된 ‘카리스마타’는 ‘카리스마(은사)’의 복수형이므로 ‘제일 좋은 길’ 이라고 한 최상급의 표현과 동격의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큰’ 이란 표현은 교회에 덕을 끼치는 정도에 있어서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고 한 것은 성도는 은사를 구하되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기 위하여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은사를 구하는 것보다 교회에 큰 덕을 세울 수 있는 은사를 사모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곧 성령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고전 14:1=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왜 예언이 이처럼 중요합니까? 사도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바울 사도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교회에 유익될 수 있을까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우리의 관심사여야 할 것입니다.

고전 14:18-19=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모든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 것이므로 귀합니다.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좀더 나은 은사가 존재함을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위의 구절을 보면, 일만 마디 방언의 은사보다 더 나은 은사는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다섯 마디 말씀의 은사입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곧 설교하기 위해 성경에서 깨달은 말씀을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 2천배 이상 더 나은 것입니다. 더 큰 은사, 더 나은 은사는 무엇보다 교회에서 가르치기 위한 말씀의 은사입니다. 우리는 이 은사를 사모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기 위해 말씀을 깨닫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23:28은 우리에게 통찰력을 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여기 몽사는 꿈을 가리키는데,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통로입니다. 그리고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꿈과 같은 은사를 행하는 종을 감히 말씀을 전하는 종과 비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은사가 귀하지만 말씀을 깨닫는 것이 더 큰 은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3. 제일 좋은 은사인 사랑의 실천에 힘쓰라
   
오늘 본문 12:31=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제일 좋은 길’ 은 13장이 언급하고 있는 ‘사랑’ 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지금까지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우월해 보이고 표 나는 은사를 갖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 이러한 기준에서 탈피하여 교회의 덕을 끼치는 기준에서 은사를 사모할 것을 명령하는 동시에,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바울은 여기서 은사를 은사되게 하고 더욱 가치있게 하는 능력과 기준으로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의 절정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제일 좋은 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사랑의 길은 13장 4-7절에서 15가지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15가지 사랑의 은사는 예수님의 삶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어떻게 사랑의 삶을 사셨는지를 말해주는 성구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예수님은 나사로 남매들을 사랑하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제자 요한을 사랑하셨습니다(요 13:23).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예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심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 1:5).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가장 좋은 은사 곧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던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주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성령의 은사로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 같은 사랑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사랑의 은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가는 삶은 사랑의 은사가 드러나는 삶이요 성도로서의 최고의 삶입니다. 위의 15가지 사랑의 은사는 예수님의 삶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은사입니다.

성경은 이 15가지 사랑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어떤 은사도 무익(無益)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이 15가지는 예수님의 삶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속에 주님의 보혈이 있고, 이 속에 십자가의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세상적인 심신을 변화시켜 이루고자 하시는 최고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에 위의 15가지 사랑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을 것입니다.
  
15가지 특징의 사랑이 없는 방언, 예언, 믿음은 한갖 소리나는 구리요 꽹가리일 뿐입니다.  15가지 특징의 사랑이 없는 구제나 헌신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령의 참다운 나타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사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보여주셨던 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행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어떻게 자기를 죽이는 포악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사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랑 실천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15가지 특징의 사랑 실천의 삶을 살았습니다.

행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세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교제의 삶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작은 예수들’(Christians)이었습니다.

'작은 예수‘로 불리는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을 본받아 15가지 사랑 실천의 삶을 살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면의 말씀을 겸손히 받읍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우리는 먼저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본 개념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고 확실해집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는 성령의 나타남이 항상 있습니다. 21세기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를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은사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주님의 교회를 더욱 잘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할 때 주님은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데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사모하되 더욱 큰 은사, 교회를 더욱 유익케 하는 은사를 사모합시다. 주의 몸 된 교회를 받드는데 더 효과적인 은사, 교회를 부흥 발전시키는 데 더욱 도움이 되는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섬김의 은사들을 열렬히 사모합시다. 

이 모든 일에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오래 참는 사람, 온유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투기가 많다거나 자랑이 많다거나 교만하다는 평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무례히 행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모습입니까?

천국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 앞에서 추방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도 여러분!  15가지 사랑 실천의 삶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성령의 최고의 은사인 사랑 실천의 삶은 현세에는 물론 내세에도 계속됩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15가지 사랑 실천의 삶은 장성한 사람의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 성령의 최고의 은사를 구하여 장성한 사람의 신앙을 가지십시오. 
  
15가지 사랑 실천의 삶은 내가 온전히 아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아직 천국에서의 삶이 시작되지 않았을지라도, 이 땅에서라도, 그 어떤 삶보다도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 우리로 온전히 아는 신앙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 이 15가지 사랑 실천의 삶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살아야 할 삶입니다. 

마 22:35-40=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위의 말씀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절대 사랑, 자신 사랑, 그리고 이웃사랑, 이 세 가지가 모든 말씀의 요약입니다. 곧 사랑이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은사는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 중에서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들이 더욱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령의 은사들 중 더 나은 은사요 더 유익된 은사요 더 큰 은사이지만, 제일 좋은 길은 역시 사랑의 은사입니다. 
  
15가지 사랑으로 점철된 그리스도인의 삶 --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성령의 놀라운 은사인 사랑이 철철 넘치는 서현의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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