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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부탁 (딛 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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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탁 (딛 3:9-15)  

디도서 3장은 바울이 디도에게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불복종하는 이들이 순종하는 이들로 변화되어야 할 근거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있음을 밝혀 주었다. 즉 구원 얻은 자는 선한 일을 해야 하기에 구원이 변화의 동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디도에게 몇 가지를 부탁한다.
  

1. 다른 교훈을 가진 자를 멀리하라.

딛3:9~10의 말씀은 피해야 할 것 4가지를 말하고 해야 할 것 1가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다른 교훈을 가진 자에 대한 지침이다. 이단이 전하는 다른 교훈은 4가지이다.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이다. 이 4가지에 대해서는 아예 무익하고 헛된 것인 줄 알고 피하라고 하였다.

변론이라는 것은 이단 사설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 논쟁이라기보다 다른 교훈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딛1:11, 13을 보면 거짓 교사의 입을 막고 엄히 꾸짖으라고 하였으니 변론의 상대로 삼지 말고 마주 대하여 말을 주고 받지 말라는 것이다. 

족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은 족보 이야기를 통해 영지주의의 구원론을 전하려 하였다. 딤전1:3~11을 보면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며”라고 하였는데 이 족보 이야기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무익하고 헛된 것, 영혼을 썩게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다. 도박을 피하고 마약을 피하고 술 취하게 하는 것을 피해야 하듯 족보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도 마찬가지다. 다른 교훈을 가진 자의 말을 받아주고 갑론을박하면 생기는 것이 분쟁이다. 분쟁은 세상 사람이 보면 교회가 더러운 곳인 줄 안다. 진리와 거짓이 충돌하는 분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율법의 다툼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고 율법을 붙잡아야 구원이 된다고 한다면 이단의 주장에 대해 싸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분쟁과 다툼은 말장난과 말다툼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훈계하는 것이다. 훈계한 후 멀리하는 것이다.  

디도서는 이단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딛3:11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는 자다. 죄를 짓는다는 것이 문제다. 썩어서 정죄된 이들, 죄를 짓는 이들이기에 수용할 수 없다. 물론 훈계를 들으면 수용한다. 훈계를 회개와 회복의 기회로 삼으면 그들을 받아들인다. 허나 부패해진 것이 이단이기에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다. 요이1:10 그리스도의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요이1: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단을 멀리해야 한다. 그것이 목회 지침이다. 다른 교훈을 가진 자를 멀리하라. 그것은 썩게 하는 악성 바이러스다. 
  

2. 니고볼리로 와서 만나자.

바울은 딛3:12에서 디도를 니고볼리로 초대한다. 자신이 니고볼리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니고볼리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대체로 학자들은 그리스의 가드리안 해안에 위치한 에피루스의 수도라고 추측한다. 그 니고볼리는 어떤 면에서 바울이 과동(월동)하는 도시였으며 목회 현장에서 수고하는 디도를 거기서 만나 교회의 전반적인 전략과 목회를 나누려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디도를 만나고 싶은 바울의 사적 심정이 디도를 초청한 것 같다. 

딛3:12을 보면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고 하였다. 가능한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지 말고 어서 오라는 초청이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시 디도는 고린도에 갔다. 고후2:12~13을 보면 후에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바울은 심히 섭섭하였다. 

고후2:13을 그대로 옮겨 보면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라고 하였다. 얼마나 바울이 디도를 만나 교제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바울도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지 못하면 슬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리운 디도를 이번에 니고볼리에서 만나려 한다. “급히 오라” 이는 가능한 방법, 여건이 되는대로 길을 찾아 어서 오라는 바울의 마음이다. 

우리는 성도가 교제하기 위해서 만나는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 만남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제의 초대를 받은 디도가 니고볼리에 가지 못한 것 같다. 

딤후4:10을 보면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오늘날 유고슬라비아로 디도는 나아갔던 것이다. 생각하면 만남과 교제도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면 함께 하라. 교회에서 종종 선교지를 방문한다. 이국 땅에서 만나는 만남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가지만 파송 선교사가 나가있는 곳으로 가라.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보고하며 살아온 날들을 나누고 거기서 새 힘을 회복하라. 교제가 주는 기쁨은 더욱 일체감을 주고 사역의 에너지가 된다.
  

3. 돕는 사역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라.

딛3:13을 보면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라고 한다. 

바울이 머무는 자리에 도착하려면 사역을 마무리 할 세나와 아볼로를 떠나보내야 한다. 문제는 새로운 선교지로 가는 이들을 보낼 때 그들로 하여금 매일 필요한 것들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일이 요구된다.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딛3:14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레데의 교인들로 하여금 변화시키는 것이 목회다. 부족한 점을 고치고 채워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목회다. 그래서 사람의 선교 전략과 거기에 따르는 물질을 돕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회다. 디도는 바울로부터 마음과 물질을 가지고 돕는 사역을 권면 받았고 그레데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을 드려 매일 매일 필요한 것을 준비할 줄 아는 성도가 되도록 배우게 하였다. 

여기 딛3;14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좋은 일이란 지금까지 디도서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선한 일을 의미한다. 성도는 말만 가지고 생활하는데서 말을 넘어 행동으로 선한 일을 취하여야 한다. 그 행동의 구체화 중의 하나가 물질이다. 사역자 세나와 아볼로를 돕고 쓸 것을 넉넉하게 하라는 헌금 생활을 배워야 한다. 디도서를 읽으면서 돕는 사역을 잘 배우고 선한 일을 하기에 힘쓰기 위해 얼마나 헌금 생활에 원칙이 세워졌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열매있는 성도의 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돕는 사역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제부터 받기만 하고 나만 잘되면 되는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을 떠나자. 

행20:35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함처럼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일꾼을 돕기 위해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 배우고 훈련한 것 중에서 물질로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생활을 잘 배워두어야 한다. 
  
고향 교회에서 향교 땅을 사서 비전 센터를 지을 때의 일이다. 

제사도 지내지 않는 것들에게 100억을 주어도 안판다고 했던 향교 땅을 8억에 샀다. 1,000평이 넘는 이 당에 비전 센터를 지은 게 기적이다. 온 교회가 새벽에 나아와 기도하는데 드리고 싶은데 많이 드리지 못하여 울고 구하는 성도들이 많다고 한다. 채소를 팔고 농사를 짓는 등 삶이 어렵지만 100만원을 들고 와서 이것 밖에 못 드려서 미안해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 사역에 드리므로 협력하고 도우려는 사람들! 그 교회 담임목사가 말하길 목회자가 정말 목숨이라도 내어주어야 한다는 각오를 하게 한다고 한다. 교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 돕는 손길이 없어도 당연한 각오이지만 너무나도 물질을 드리는 성도에게 고맙다는 것이다. 

우리는 움켜잡고 드리지 않으려고 반대하는 이들을 배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려는 섬김을 배워야 한다. 오늘은 맥추절이다.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움켜잡고 원망만 하는 삶이 변해 주님을 향해 손이 펴진 성도가 되자. 보릿고개 시절 전쟁 후 옥수수죽, 술찌꺼기를 먹던 시절, 교회가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교회를 다니는 그 한 가지로 감사하자. 

전설에 의하면 디도는 후에 그레데 섬으로 되돌아와서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거기서 목회하고 교회를 돌보면서 장수하고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불복종하고 짐승 같고 말만하는 교인들이 선한 일을 행할 줄 아는 성도가 된 것이 디도를 평생 머물게 한 것이 아닐까? 디도는 바울의 마지막 부탁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딛3:15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문안하는 것은 사랑의 인사다. 돌봄의 과정이다. 디도는 그레데에서 바울의 권면을 따라 사랑으로 목회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목회 지침을 지키며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힘썼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좋은 일, 착한 일에 힘쓰기를 배우는 성도가 되자. 서로 서로를 돌보며 드릴 줄 알고 선교를 돕는 것을 배우는 성도가 되자.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변화되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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