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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풀무불 속에서도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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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불 속에서도 (단 3:13-18)


믿는 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성경에 없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헌신(獻身)’이란 용어도 그 중 하나입니다. 헌신이란 나의 몸뿐만 아니라 나의 생명, 나의 영혼 및 나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포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드림은 하나님의 ‘받으심’으로 완결됩니다. 아무리 드려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면 그 헌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여호와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두 형제의 드림을 하나님이 다르게 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 11:4절에 의하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다같이 드렸지만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으셨고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드렸는지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드렸는지, 즉 헌신의 자세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교회적으로 창립 18주년을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헌신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드림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아니면 안타까워하실까? 
 
다니엘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장에서 다니엘의 헌신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뜻을 정하여”(1:8)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부터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채식을 한 그들이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지식, 학문, 지혜를 주셨고 특별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아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2장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꿈에서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신상의 머리는 정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넙적 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는데 다니엘을 통하여 그 중에 머리는 자기에 해당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에 본 모습을 따라 금으로 높이가 육십 규빗(27미터) 넓이가 여섯 규빗(2.7미터) 되는 매우 홀쭉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아마 금과 같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세워 보겠다는 욕심, 자신의 영광을 더 드러내려는 교만함이 그와 같은 역사를 부추겼을 것입니다. 

신상의 낙성식에 정부고위관리들을 전원 참석시키고 악기 소리가 들릴 때에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을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마침 무리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라 금신상에 엎드리어 절하지 않고 뻣뻣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 일러바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주류인 자기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던 차에 그들을 없애 버릴 좋은 구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고소 내용을 보면 1) 왕을 우습게 여겨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2) 바벨론의 신들에 섬기지 않고 3)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들이 자기의 직분을 지혜롭게 그리고 성실하게 잘 처리함으로 하는 일로는 책잡을 것이 없으니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격해 옵니다. 그들의 삶에 일대 위기가 닥쳐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우상에 절하게 함으로써 영적으로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세 친구처럼 목숨이 달린 것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교묘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의 가정, 교회, 직장,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무리의 고소내용을 들고 분노한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당장 데려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왕은 세 친구를 당장에 풀무 불에다 쳐 넣으라고 하지 않고 만약 이제라도 신상에 절을 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내가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고?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어 금신상에게 절하면 내가 봐주겠다. 하지만 절하지 않으면 너희들을 풀무 안으로 집어넣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후에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밉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통하여 꿈에 대한 해석을 들으면서 여호와의 능력에 감격하여 여호와는 모든 신의 신이라는 고백을 하였지만 (2:47) 진정으로 회심하여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은 아니기에 하나님께 대한 망령된 말을 합니다. 자신의 권위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도전’입니다. 

왕의 말을 들으면서 세 친구들은 그 동안의 자기의 생애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기구하게 포로로 끌려왔던 일, 다니엘과 더불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던 일, 왕으로부터 그들의 지혜와 총명을 인하여 인정받았던 일, 왕의 꾼 꿈을 인하여 죽을 뻔 하였으나 다니엘과 함께 기도한 후 극적으로 살아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그동안 누리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이제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상에 절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절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쉬운 선택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친구들에게는 목숨을 내건 결단의 순간입니다. 세 친구들은 아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부르는 세 사람의 담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는 구절은 자칫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풀무 불과 왕의 손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즉 하나님의 뜻이 혹시 우리가 풀무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들은 절하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와 절하지 않으면 뜨겁게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협박 속에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으로 인한 손해나 비난은 조금도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실속만 챙기려는 유혹을 받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풀무불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며 믿음을 고백하는 이 청년들의 자세가 얼마나 도전이 되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세 친구는 위기 속에서 참된 믿음이 보여줍니다. 
 
믿음은 기적을 낳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대답을 들은 느부갓네살 왕은 격분합니다. 다시 한 번 절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듣지 않자 왕은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칠배나 더한 불을 준비한 것은 왕의 노가 얼마나 격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칠배나 더한 불은 정확히 온도를 일곱 배로 올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최대로 온도를 높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풀무는 쇠로 만들어졌고, 벌집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위에 뚜껑을 열어서 그 속에 사람을 던졌습니다. 

옆쪽에는 문이 있어서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용사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완력으로 밀어서 풀무에 던져 넣기 위해 풀무 가까이로 다가가야 했을 것입니다. 최대 출력으로 열을 뿜기 위하여 풀무는 평상시보다 더 세차게 바람을 넣었습니다. 따라서 불길과 엄청난 열이 풀무 밖으로 새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 불과 열로 인하여 세 친구를 풀무에 던지려던 자들이 도리어 타 죽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세 친구가 풀무 가운데 떨어지는 즉시 놀라운 사실을 목격합니다. 풀무가 그들을 던지려면 자들을 태울 정도로 뜨겁다면, 세 사람은 풀무 안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불 속에서 타버리기는커녕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지금은 네 사람이 결박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 가운데 다닙니다.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 같다는 말을 합니다. 사실 ‘신들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신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신들의 아들이 천사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신학적인 논쟁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세 친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존재를 보내셨다는 점입니다. 세 친구가 뜨거운 풀무 불 가운데 던짐을 받았는데도 그들이 살아났을 뿐 아니라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고 옷의 색깔도 변하지 않고 불탄 냄새조차 없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게도 보이고 엉뚱하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행동을 인하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 위에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미쳤다고 비난하였으나 끝까지 순종하니 과연 120년 후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선택된 짐승들과 더불어 구원을 받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믿음으로 75세가 된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나그네의 길을 시작하였고 믿음으로 백세가 되어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쳤을 때 그는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니 넘쳐흐르던 요단강 물이 기적적으로 마르며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돌았더니 견고한 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3장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신앙의 절개와 하나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구원 사건을 통해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들어가기 전에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신을 숭배해야 한다고 명령하며, 반대하는 자를 풀무불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어떤 자들도 그 몸을 쪼개겠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신은 없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금신상에 대한 낙성식을 하려 했지만 실제로 낙성식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제 조서를 내립니다. 그 곳은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온 나라의 대표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과 함께 이 사건의 목격자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방 땅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던 세 친구는 자신들을 해하려고 참소하던 갈대아 사람들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개입으로 전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믿는 자들을 실족시키고 손해를 주기 위함이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더 큰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벧 1:7). 다니엘 때는 세 친구가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 행위대로 정죄를 받고 뜨거운 불못,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진다고 계시록 20: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뜻대로  섬겨야 합니다. 

3장에 나타난 세 친구들의 스토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의 자세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1)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가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 왔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처한 현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자체는 안타깝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무슨 깊은 뜻이 있구나 하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니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바벨론 왕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다니엘은 마침내 왕의 눈에 들어 왕의 박수장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그네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악하고 험한 세상을 떠나 기도원에 있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0:16). 느부갓네살 왕은 지혜로운 다니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꿈의 내용과 그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세상을 초월하면서도 세상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2)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샌디에고가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도 이곳이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은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언젠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때가 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섬기고 애쓰지만 궁극적으로 세상과 우리의 길은 다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성심껏 섬겼습니다.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다가, 다니엘이 전해주는 꿈의 내용과 해석을 듣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가 세운 바벨론 왕국이 그가 다스릴 때는 번성하지만 점차 망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거대한 왕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 왕으로서는 충격적인 말이었으며, 예기치 않은 해석을 듣고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그가 내린 결론은 모든 백성들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본 대로 금신상을 만들고 모든 관원들을 불러서 그 앞에 절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나라가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에 절하라고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 제국의 고관으로 편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때가 되었습니다. 세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바벨론을 위해 일했고,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금신상에 절하는 것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친구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이요 헌신의 표현입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우리들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세 친구들 앞에는 풀무불이 기다립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죽음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죽음입니다. 생명을 쥐고 있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죽이겠다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죽음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죽음 너머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야 이길 수 있습니다. 세 친구의 대답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말은 왕이 아무리 자기들을 풀무불에 넣어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지켜 주옵소서.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복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옵소서.’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두 번째 말은 혹시 풀무불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목숨 부지하겠다고 구차하게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뜻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느부갓네살 왕은 세 친구들을 불무불에 던져지면 그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겠죠.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일하시지만,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길을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무슨 뜻이 있을 것을 믿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주는 믿으므이 행동을 인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풀무불을 꺼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풀무불에 떨어지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지만 풀무불 안에서 세 친구들을 보호하십니다. 그 일로 인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예측대로 행동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그리 아니하시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합니다. 기대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를 인하여 세상의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많지만 하나님을 거기 구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울 지라도 우리의 기대대로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셔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복이나 돈, 건강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었는데 약하고, 가난하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마지막에 죽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하나님 믿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는 신앙입니다. 

이 땅에서 눈물 흘리고 아픔이 있어도 죽음 너머에서만은 우리의 의로움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도 부활의 소망 가운데 만날 때는 몰랐던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헌신이란 이와 같이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기 위하여 나의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택함을 받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여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오래 쓰임 받든지 짧게 쓰임 받든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면 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 5:9) 하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그를 의지할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전 10:11,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여전히 감당하면서, 그러나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면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성숙한 신앙을 가지면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 가정과 사역과 사업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누리며 남은 2013년을 보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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