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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룻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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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룻 1:6-14)  

어느 시골 교회에 아주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1년 52주 주일 성수를 온전히 하고 십일조를 비롯해 헌금도 열심히 하고 각부서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집사님의 남편이 암으로 선고를 받고 몇 달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그 집사님이 교회를 나오지 않더니 얼마 후 절에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여러분! 이분이 정말 믿음이 있었던 분인가요?  
믿음이 좋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맞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좋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言約(언약)’이고 그 성경 말씀을 온전히 信賴(신뢰)하면 그 사람이 바로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할까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올바른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믿음의 선택이 이루어져야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어 믿음의 선택을 하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인생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주인인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또 하나,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키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적인 믿음, 즉, 구원의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의 성장하고 성숙하여 삶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인정을 받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못하신다고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같이 후손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아들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은 살리시어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한 것입니다.   

이 시험은 옛날 아브라함만 받는 시험이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수시로 이루어지는 시험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지난주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베들레헴에 닥친 흉년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이주하여 간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살기위해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이방 땅에 가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믿음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결과는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 후 나오미는 두 아들을 결혼시켜 행복하게 살려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망한 가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6절로 딱 넘어가면 나오미는 비로소 믿음의 선택을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나오미와 그 며느리 룻의 그 믿음의 선택을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때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축원합니다. 
  

1. 믿음의 선택은 복음이 들려질 때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을 듣습니다. 

6절을 보세요.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에게 복음이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소식입니다. 여기 ‘돌보시다’라는 단어는 원문 상으로는 ‘찾아오다’ ‘방문하다’는 의미를 같이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나오미가 돌아갈 결심을 한 것은 이 복된 소식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믿음의 선택을 한 것은 복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거기에 기댈 언덕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오미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필요를 돌봐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듣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사실 나오미 가족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갈 때 경제적으로 아쉬울 게 없었던 가정입니다. 그 가정은 경제적으로 풍족했습니다. 다만 눈앞에 닥친 흉년이 두려워 떠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잘 살려고 떠났던 그곳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과 한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아~ 베들레헴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왔더니 하나님이 심판하셨구나!” 시간이 걸렸지만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돌아가기로 결단한 결정적인 요인은 고향 땅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나서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에 양식을 주셨다”   

이 소식이 나오미에게 복음이듯이 오늘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 모압 땅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거기서 재난이 하나님의 심판인지도 모르고 그저 재수 없어서 당하는 팔자려니 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어떤 복음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저와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믿음의 선택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오미가 믿음의 선택을 했듯이 오늘 우리도 믿음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믿음의 선택은 체면과 자존심을 접을 때 가능합니다. 

사람이 제일 참기 힘든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신앙까지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왜 10년 동안 모압 땅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왜 굳이 아들들을 모압 땅에서 이방여인과 결혼을 시키며 머물러 있었을까요? 
베들레헴에 10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돌아 간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체면과 자존심 때문입니다.   

1장 후반부에 보면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고향 사람들은 “이 이가 나오미냐?” 라고 할 정도로 나오미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면 나오미가 모압으로 떠나기 전에는 매우 잘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초라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추측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고백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룻1:21절을 보세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나갈 때는 부자로 나갔는데 돌아 올 때는 쫄딱 망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대단한 각오가 되어 있지 않고는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錦衣還鄕(금의환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못해도 거지꼴로는 돌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그적 미그적 미루다 보니 10년이 걸린 것입니다. 결국은 그 사이에 자식들까지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이 이렇게 처참한 지경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단을 합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재난이 자기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룻1:13절에 며느리들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단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체면과 자존심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주님도 이것을 아셨습니다. 눅9:23절을 잘 아시지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자기를 부인한다” 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체면과 자신의 자존심, 그리고 자기 생각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진다”는 말도 주님을 따를 때 찾아오는 어떤 고난과 대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을 확 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10년을 버틴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마저 잃게 되자 그는 그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CS 루이스>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고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확성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더 분명하게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많이 겪게 되면 그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미도 만약 그 고난이 없었다면 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향땅에서 들려온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지난 10년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온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남편도 죽고 그나마 소망으로 여겼던 자식들까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제서 자기가 당한 재난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좀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여 힘들어도 일찍 두 손 들고 돌아가는 것이 바른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제발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왜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그렇게 조롱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로마 군병들이 뺨을 치고 침을 뱉어도 참아 내십니다. 왜죠? 그래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이 입으셨던 옷이 벗겨집니다. 그림이나 사진에는 중요한 부분에는 옷을 걸쳐진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 벗겨진 것입니다. 그 수치를 왜 주님은 견디셨나요? 우리를 살리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자존심을 내세우고 살려 하십니까? 

왜 우리는 그다지도 체면이 중요합니까? 그 자존심 때문에, 그 체면 때문에 내게 주어진 복을 포기할 것입니까? 믿음의 선택을 하려면 이것을 접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막상 돌아가면 망신당할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형에게 망신을 당할 것 같았으나 아버지는 그를 끌어않고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주고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체면 버리고 두 손 들고 죄악을 회개하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여러분이 버리기 힘들어 하는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시고 믿음의 선택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믿음의 선택은 미래를 맡길 때 가능합니다. 

룻을 다시 보세요. 그는 이방족속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피난 온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몇 해 살지도 못하고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자식이 없이 죽었으니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여인은 정말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도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따라오지 말라고 합니다. 8절 이하를 보세요.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그 설득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입마추고 헤어집니다. 
그런데 룻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꽉 붙잡고 뒤쫓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믿음의 선택을 따라 유대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베들레헴에서 시어머님의 도움으로 ‘보아스’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오벳’이고 오벳이 낳은 아들이 ‘이새’고 이세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다시 말하면 룻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을 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믿음의 선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아무나 하기 어렵습니다. 왜죠? 믿음의 선택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룻의 선택은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잖습니까? 그런데다 과부입니다. 거기에다 시어머니를 모셔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고난이 뻔히 보이는 선택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선택이었다는 것은 그녀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룻기1:16절 하반부를 보세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렇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어머니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선택은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선택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누가 주관하십니까? 여러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그러기에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명심할 것은 그 선택의 기로에서 남들 다가는 넓은 길보다 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도 요구하십니다. 

왜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고 돌아갔을까요? 그는 그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 따라가 봐야 고생문이 훤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가봐야 아는 사람도 없고 친척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시어머니의 설득을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이고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 선택이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 같은데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오르바는 모압 땅으로 되돌아갔고 거기서 누군가와 재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좀 답답한 선택을 한 것 같으나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으나 그 결과는 인생 역전의 복을 누렸습니다.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조건하에 서로 다른 선택을 한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삽니까? 
바라기는 믿음의 선택을 하시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순간의 선택이지만 믿음의 선택은 영원한 복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은 멸망을 가져다줍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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