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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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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눅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지금 우리를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은 이 땅의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의 청년들의 죽음은 몇 가지 현상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 자살율의 급속한 증가(경찰청 통계/1일-36명/그중 20명이 20-40대)요, 둘째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이태백-이십 대 태반이 백수)이고, 셋째는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야말로 죽음의 징후인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과연 이 땅의 젊은이들이 살아나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 시대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은 복음의 능력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보혈의 권능이 젊은이들의 심장에 닿아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죄의 권세에 붙잡혀 깊이 잠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권세에 붙잡혀 살아나는 그 날이 속히 오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보혈의 강물이 흘러가고 구원의 능력이 임하여 저들이 일어나 사명과 비전을 품고 뜨거운 가슴으로 일어나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죽어버린 한 청년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년은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아들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이 외로운 어머니에게 이 외아들의 죽음은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죽어 나가던 상여행렬은 절망의 행진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이 절망의 행진이 멈추고 이 행진은 희망의 행진으로 바뀝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이 청년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죽은 그를 다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떻게 청년을 다시 일어나게 하신 것일까요? 이 시대 이 땅에 죽어있고 깊이 잠든 젊은이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사랑의 마음입니다.(13)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답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혼자 손을 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니 할아버지는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했더니 할아버지 왈 "아니 옛날에는 많았는데, 다들 죽었지" 

사람들은 대부분 미운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복수하고 싶은 원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미움, 증오, 분노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부정적 감정이 표출되어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그렇게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좌절과 낙심,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함이 곧 살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미움은 이웃을 죽일 뿐 아니라 자신을 동시에 죽인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움으로 자신과 이웃들을 파괴해 왔는지요 모릅니다. 미움은 독입니다. 미움의 독이 우리 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경체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우리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기도를 방해하고 하나님과의 장벽을 만들어 기도 응답의 장애물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미움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두 개의 화분에 같은 종류의 화초를 놓아두고 같은 조건에서 하나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주고, 또 하나에게는 미움의 눈길을 주면서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길을 받은 화초는 미움의 눈길을 받은 화초보다  네 배나 더 긴 시간 동안 생명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죽은 이 청년을 살려 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과부를 보시던 그 눈은 어떤 눈이셨습니까?  긍휼의 눈, 사랑의 눈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오늘날 죽어가는 이 땅의 청년들을 다시 살려 낼까요? 예수님의 사랑뿐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가족, 자녀, 이웃들을 살려 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바로 해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미워하는 눈이 아닌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으로 직접 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모든 젊은이들로 우리의 섬김 그리고 희생과 헌신을 통해 예수님의 참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맨발의 성자 최춘선 할아버지가 전도를 하려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운전기사가 미치광이라고 밀어버려 차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럼에도 목발을 짚고 나와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 운전기사가 밉지 않으세요?" "나는 아무도 미운 사람이 없어. 다만 불쌍하게 생각될 뿐이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원수도 불쌍하게 보입니다.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는 기도를 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려면 미운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 죽은 젊은이에게 부어진 것처럼 죽어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이 부어지면 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미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고 우리의 눈길에 사랑을 가득 담아 사람들을 바라봄으로 이 땅에서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사랑의 손길입니다.(14)
   
이 청년을 살려내는 일에 예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라고 기록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두 가지 절대로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병환자이고, 또 하나는 시체였습니다.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의 절대 금기사항입니다. 지도자인 랍비의 책임가운데 하나는 이 두 가지를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의 랍비로서 이 두 가지 규칙을 다 깨트리고 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은 자의 시체를, 관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자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고 일어섭니다. 죽은 자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님의 손길로 만지심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만지심의 기적이야 말로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만지심은 사랑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세족 식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세족 식을 통해 발을 씻겨주려고 하면 처음에는 쑥스러워 거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발을 씻겨주다 보면 대부분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세족 식을 하며 발가락 사이의 때까지 꼼꼼하게 닦아주는 것을 보며 배꼽을 잡고 웃다가 자기의 발에 씻기는 손길이 닿자 웃음이 갑자기 울음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왜 울었을까요? 모두가 고백하기를 섬기는 이의 손을 통해서 예수님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발을 만질 때 전에 없던 감동과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할 때 사랑으로 가득한 손길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을 만나면 반갑게 사랑의 손을 내밀기 바랍니다. 특히 낙심 자, 슬픔을 만난 자, 새 신자, 연약한 자를 만날 때 형식적으로 손을 내밀지 말고 사랑으로 가득한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망설이지 말고 다가가 사랑의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순간 여러분의 뻣뻣한 손이 예수님의 못 자국 난 손으로 바뀌게 되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손길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며 위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관심의 손길이 아닌 사랑의 손길로 죽어가는 것들을 만지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랑의 말씀입니다.(14하)
   
본문에 의하면 결정적으로 이 청년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살렸습니까?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단순한 설교나 도덕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가득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도대체 말씀이 무엇이기에?라는 반문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는 용서를 선포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을 낙심하고 좌절하게 하지 않고 듣는 이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죽어서 모두들 다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향하여서도 '일어나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죽은 자가 정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5:25에서 이 말씀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 나사로가 무덤을 열고 살아 나왔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제는 죽은 청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리하여 청년은 살아나 관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장년도 청년도 소녀도 일어났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하나님 없이 살며 아무 소망도 없이 죽어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순간, 사랑의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영혼의 소생하고 새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영혼이 살면 육체가 삽니다. 육체적인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심각해도 예수님이 사랑의 말씀으로 다시 살리면 간단합니다. 절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문제는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죽은 영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사람의 음성만 들립니까?   말씀을 들으며 강한 감동이 오고 마음이 뜨거워지며 영적으로 살아나는 느낌이 생깁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여러분 주변에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일어날 것입니다. 

절망한 베드로는 옛 생활로 돌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사랑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의 음성이 들려지면 다시 살아납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나려면 사랑이 담긴 우리의 음성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음성을 거두시고 사랑이 담긴 음성으로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움이 가득한 음성을 거두시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짜증과 원망이 가득한 음성을 거두시고 사랑의 향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가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사랑이 담긴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는 죽이는 눈길, 죽이는 손길, 죽이는 음성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가고 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이미 죽은 것들을 향해 사랑의 눈길, 사랑의 손길,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살려내셨습니다. 

여러분도 살기를 원하시면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과 사랑의 손길, 사랑의 말씀에 자신을 맡겨 생명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향해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눈길과 사랑의 손길, 사랑의 음성으로 살리는 역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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