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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 2장 20절을 붙잡으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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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장 20절을 붙잡으라 (갈 2:20)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미국 인디애나 주(州) 해먼드 제일침례교회에서 1959년 어느 주일 누군가가 강단의 설교자에게 권총을 발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대각성운동의 기수, 사도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설교가, 가슴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 바울을 닮은 사람, 미국의 보물 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23년 동안 시무했던 노스햄턴교회에서 쫓겨납니다. 왜 쫓겨났을까요? 

해먼드 제일침례교회의 총기사건은 잭 하일스(Dr. Jack Hyles) 목사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강단에서 ‘죄’를 외쳤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래서 듣다 못한 교인이 강단을 향하여 총구를 겨눈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이 ‘죄’에 대한 설교를 멈추지 않아서 교회는 하는 수 없이 방탄유리로 설교자를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가 쫓겨난 이유도 동일했습니다. 저들은 총알이 날아오고, 쫓겨나는 상황 앞에서도 죄를 외치고, 회개를 선포하며, 온전한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상은 어떠합니까? 이런저런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일차적으로는 강단에서 찾아야 합니다. 메시지가 과연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혹시 목사는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에 회중들 또한 부담스런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세겹줄 특새’를 앞두고 ‘기도응답과 복’에 대한 다섯 편의 설교를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 마음을 강하게 흔드셨습니다. 정말 이번기회에 들려줘야 할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라는 강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펼친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었고, 다섯 시간에 걸쳐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아니하신 분들이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강단에 섰던 잭 하일스, 쫓겨나면서도 반복하여 외쳤던 요나단 에드워즈를 떠올리며,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전하기 위해 섰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핵심이 2장 20절입니다. 이 한 구절이 성경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쓴 동기는 저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갈 1:6). 초대교회부터 벌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주’라는 단어를 동원하면서 두 번이나 단호하게 외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중세에 접어들면서 복음에 다른 것들이 가미되기 시작했습니다. 연옥설, 면죄부, 마리아무흠설, 그래서 종교개혁이 있었고, 그로부터 500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다른 복음이 없을까요? 진정 순수한 복음을 따르고 있는지,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나’라는 단어를 여섯 번 사용하고, 앞뒤 문맥에서는 열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이 ‘나’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부자는 ‘내’란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사용하면서(눅 12:17-19) 자신의 부(富)와 공로를 과시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주인입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성품입니다(사 14:13). 

또 한 사람은 경이로운 경험을 했는데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1인칭을 쓰는데도 극도로 조심합니다. 불가피하게 드러내야 할 때는 3인칭 어법까지 동원하면서 ‘나’란 단어 사용을 절제했습니다(고후 12:2-5). 바울입니다. 그는 ‘나’란 단어로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극도로 삼갑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오늘 이 본문에서는 예외입니다. ‘나’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바울 자신의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냅니다(갈 2:20). 자신의 죄, 허물, 약함, 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능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 자신의 죄악과 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7:18,23-24).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때도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렇게 비교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다른 복음’을 가졌느냐의 여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나’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에 사용하는지를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일에 ‘나’를 사용하면, 순전한 복음에서 멀어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나’라는 단어를 어디에서, 어떤 일에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까? 나의 현주소는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도 미워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갈 5:19-21, 잠 6:16-19) 과연 우리가 이 부분에 자유롭습니까? 

저는 목사이지만, 이런 정과 욕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뿌리치려고 해도 떠나지 않습니다. 심방할 때도, 성경을 연구할 때도, 예배를 인도할 때도, 메시지를 전할 때도 유혹은 찾아옵니다. ‘내가 이 정도의 인간인가?’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정말 덜된 인간, 냄새나는 벌레와 구더기와 같습니다. 

죄의 문제,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고백하고, 생각에서 떨쳐버리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불교 고승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합니까?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세 수도승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까? 그러나 저들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나는 바른 복음을 따르고 있습니까?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늘 ‘나’라는 단어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때 ‘나’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때 자기 안에 있는 ‘나’가 점점 작아지고,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나를 지배할 때, 내가 다시 사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메시지가 전파될 수 있도록 강단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비추어 나는 내 의와 공로를 자랑하는 일에 ‘나’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허물과 잘못과 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나’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바른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 나가기를 힘쓰는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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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장 20절을 붙잡으라(2) (갈 2:20)

최근 ‘두 광인 이야기’(생명의말씀사)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영일만 모래밭에 세계최고의 제철소를 건설하여 오늘의 경제 한국을 있게 만든 청암(靑巖) 박태준, 또 한 사람은 영적 황무지에 제자훈련의 씨를 뿌려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건강한 영향력을 미친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를 일컫습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에 대해서는 저 또한 쭉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생전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의 오프닝 강의제목이 ‘광인론’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이 강의만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지금도 생전에 떠 두었던 영상으로 이 강의를 대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인’(狂人)이란 별칭을 가진 이들 조차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진짜 광인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주인공 바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 우레와 같은 톤으로 말합니다. ‘너는 지금 너의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지난 시간 이 본문의 앞부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를 깊이 묵상한바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 공로를 드러내는 일에 ‘나’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죄성, 허물을 드러내는 일에는 ‘나’란 단어를 적극적,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나는 혹시 어리석은 부자(눅 12장), 바리새인(눅 18장), 계명성(사 14장)처럼 자신의 의, 공로를 드러내는데 ‘나’란 단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부분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답니다. 우선 앞뒤 문장을 연결하는 ‘그런즉’이란 단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건강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던 제 친구 하나가 얼마 전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결단해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의사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따를 것인가?’ 그는 의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의사와 자신은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의사의 말이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 후에도 의사의 지시대로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고, 의사와 면담하면서 계속적으로 의사의 지시와 처방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친구는 신장(콩팥)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의사의 처방대로 소금기가 전혀 없는 식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식, 행동을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자신입니까? 의사입니까? 만일 의사의 처방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의 말을 따르는 순간, 나는 이제 없습니다. 의사의 의견, 그의 처방이 나를 지배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여전히 내가 나를 컨트롤하는 듯 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이 뜻입니다. 내가 죽을 죄인, 사형수 인생임을 절감했을 때부터 이제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병의 의원이신 그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 명령, 가르침이 나를 지배합니다. 지금까지 전혀 나와 상관없던 그 분이, 내 안에 새로운 한 분이 들어와서 나의 생각, 행동, 취미, 음식, 꿈, 생활리듬, 이 모든 것을 간섭하고, 지배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분이 나를 압도하십니다. 겉으로 볼 때 옛 모습의 ‘나’이지만,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을 성경은 간단히 한 단어로 정리합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저분의 말씀대로 행하면 분명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리라. 해결되리라.’는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의학계에서도 이미 입증된 바 있습니다. 

플라시보(placebo), 즉 위약(僞藥)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로, 기도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전문적이지 않은 치료, 더 나아가 유효한 성분이 들어있지 않는 약제일지라도 그것이 환자의 증상이나 경과를 호전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상을 입은 병사들에게 모르핀이 없어서 생리식염수를 모르핀인 것처럼 주사했는데, 가짜 모르핀을 맞은 부상병들이 통증이 없어졌다며 군의관에게 고마워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위약효과 때문입니다. 당사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 결국 그 사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믿는 그분은 누구십니까?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능력으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 만왕의 왕, 만병의 의원이신 그분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인생 최대의 적인 죄의 문제, 나아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분명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믿음을 소유하는 자에게 주님이 임재하시고, 그분이 나를 지배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요일 5:4).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고후 13:5). 믿음은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약 2:18).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갈 2:21a). 바울의 입에서 ‘은혜’란 단어가 제일 먼저 터져 나옵니다. 내 입에서 ‘은혜’란 단어가 터져 나오는지, 터져 나오지 않는 지를 보면, 믿음이 있는지 판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이 영을 받은 사람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고전 15:10).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고의 위험에도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 내가 숨 쉬고 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오늘 내 입에서 어떤 단어가 많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나’란 단어를 통해서 내 의와 공로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입에서 ‘은혜’란 단어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와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주님이 역사하시고, 그러한 자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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