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삼하 6:9-16)

첨부 1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삼하 6:9-16)

 
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사무엘하 6장 9~16절> 

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추석 연휴기간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분들도 만나셨을 것이고,
맛있는 음식도 드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식구들과 대화는 많이 하셨나요? 

오늘 새벽에 배달된 신문에 보니
<온가족 모처럼 모여 스마트폰만 … ‘침묵의 추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을 하고 어른들은 SNS를 하느라 바쁘고
가족간 대화, 접촉 부족이 심각하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일보, 2013. 9. 22. A10면>

예수 믿는 여러분은 식구들이 모여 예배 드리셨습니까?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나요?
집에 찬송소리가, 기도소리가 있었나요?
자녀들이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던가요?
지금, 제가 드린 질문을 마음속에 담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벧에돔과 미갈

오늘 본문 말씀에는 다윗과 다른 두 사람이 나옵니다.
다윗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두 사람은 대단한 업적을 남겼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아니기에 
잘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오벧에돔’과 ‘미갈’입니다.
모두 성경에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한 사람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고, 한 사람 ‘미갈’은 징벌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분배 받은 땅에서 혈연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나는 어느 지파인데, 너는 어느 지파냐?’
‘나는 누구누구의 가문인데, 너의 부모와 조부모는 누구냐?’
서로 하나 되기보다는 거주지에 따라, 
가문에 따라 서로를 구별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 등 지역을 나누고
김씨, 이씨, 정씨 … 등 가문을 따집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지역주의를 해소하고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치적인 수도 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하나로 모이기를 바랐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사무엘하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2). p.176. 참조>

그래서 다윗은 오랫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에 위치한 
다윗 성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습니다.

십계명 두 돌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가 담긴 
‘여호와의 궤’, 곧 ‘언약궤’는
-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고
-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출 25:22)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서
-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 (수 3:1~17)
-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킬 때에도 … (수 6:4, 8)
모두 하나님의 법궤(언약궤)를 앞세워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에 두면
이스라엘 각 지방, 모든 지파의 사람들의 마음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 3만 명의 특별한 일꾼들을 선별했습니다. (삼하 6:1)
- 새 수레를 사용했습니다. (삼하 6:3)
- 악대를 동원해서 찬양을 연주했습니다. (삼하 6:5)

이런 준비 끝에 언약궤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수레를 이끌던 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고
수레 위에 놓여 있던 언약궤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손으로 궤를 붙잡았지만
그로 인해 그 자리에서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민수기 4장 15장에 언약궤를 만지는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삼하 6:10)

언약궤에 손댔다가 웃사가 죽자
다윗은 언약궤의 능력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렇게 대단한 것을 자기 성까지 옮겨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살던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오벧에돔은 자신이 나서서 
하나님의 궤(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셔간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언약궤를 집에 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다윗왕의 부탁을 받고<명령을 받아>
자기 집에 하나님의 궤를 모셔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 6:11)

그런데 여호와의 궤를 집에 모심으로 복을 받은 오벧에돔과 달리 
본문에 소개된 ‘미갈’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보관했던 언약궤를
다윗이 자신의 성으로 가지고 갈 때 …
다윗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길 수 있음에 기뻐했습니다.
- 소와 살진 송아지를 바쳐 제사를 드렸습니다. (삼하 6:13)
- 왕의 옷을 벗고, 제사장이 입는 예복 ‘에봇’을 입었습니다. (삼하 6:14)
[에봇(Ephod)은 제사장의 의복으로, 
가슴과 등을 덮는 긴 조끼 모양의 상의이다(출 28:4).] 

그리고 성경에 보면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삼하 6:14)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라는 성경의 표현은
계속해서 뛰어오르며 빙글빙글 도는 춤을 말합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사무엘하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12). pp.178~179. 참조. >

그런데 미갈은 하나님을 가까이에 모시게 되었음에 기뻐하던 
다윗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본문 16절을 봅니다.
“…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16)

그런 미갈에 대해 사무엘하 6장 23절에는
미갈이 받은 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모시는가?

사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겼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정작 복을 받은 사람은 오벧에돔이었고
미갈은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삼하 3:12~14)

무엇이 이 두 사람을 다르게 했습니까?
-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던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집에 기꺼이 모셨으나
- 미갈은 여호와의 궤를 모시게 된 기쁨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습니다.

여러분은 오벧에돔처럼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을 모신 삶을 사십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여러분의 집에서 드리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십니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심방 가는 목회자들을/속도원들을
혹은 선교회원들을 오벧에돔처럼 기꺼이 문 열어 영접하십니까?
그런 사모하는 마음과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번거롭다는 이유로 … 사생활을 지킨다는 이유로 …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이유로 … 편하게 믿고 싶다는 이유로 … 
가족들과, 성도들과 집에 모여 예배드리는 일을
하찮게 / 귀찮게 / 우습게 … 여기지는 않습니까?
집에서 예배드리므로 받을 복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는지
저는 목회자로서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우리교회 주일예배는 
인터넷으로, 휴대전화로, 위성으로 생중계를 하기 때문에 
접속하여 예배드리는 인원이 최하 15,000~20,000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지에 산다는 이유로 … 
교회 갈 수 없다는 이유로 …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예배드리면서 편하다는 생각만 하시는지요?
아니면 예배의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심방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워하십니까?
같은 조건이지만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이 이용되는 휴대전화 어플리케이션 중에
‘밴드(Band)’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족끼리, 동료끼리, 친구들끼리
이 앱에서 하나의 모임을 이루어 놓으면
서로 간의 사진, 공지사항 등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 ‘Band’는 
- ‘함께 어울려 다니는 무리’
- ‘끈이나 띠로 단단히 묶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Oxford Advanced Learner's English-Korean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band’ 항목 참조. >

18세기 영국에서 감리교회를 시작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6.17.~1791.3.2) 목사님은
교회 안에 또 다른 교회 … 작은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모임을 구성했는데
그 모임의 이름이‘밴드(Band)’였습니다.
그 밴드가 커지고, 여러 교회에 보급되어 정착된 
성도들의 모임이 ‘속회’입니다.
< 김홍기, 『평신도를 위한 신학』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
pp.204~207, 참조>

지금은 교회마다 소그룹, 셀, 목장 …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는 뿌리는 ‘속회’입니다.
‘속회(屬會: 붙일 속, 모일 회)는 
하나님께 속(屬)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요일 2:19, 3:10, 4:4, 6, 5:19) 

여러분은 하나님께 붙어 있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는 모임을 /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모임을 좋아하십니까?
여러분은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는 일에 얼마나 관심과 열심을 기울이십니까?
특별히, 내 가정에서 찬송과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는 일을 위해
얼마나 마음 쓰고 계십니까?
모두 바쁘게 일하기 때문에 같은 속회에 조직된 성도들끼리도 
모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집안에 손님을 모시려면 
이것저것 번거로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 
성경 읽는 소리가 나는 것, 
내가 사는 집에 목회자를 모시고 심방을 받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모여 
말씀과 성령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끊어졌다면
하나님께 속한 모임에 제외된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과 일터에 
평안을 가져오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르게 해야 하지만
성도들끼리의 관계도 바르게 해야 하며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면 E-mail로, 카톡으로 많은 메시지가 제게 옵니다.
말씀 중에 은혜 받았다는 분들 … 
이런 저런 기도제목으로 기도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줍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맺으십시오. 
인터넷, SNS로라도 기도제목을 나누고, 
도움을 구하고, 편지를 주고 받고 …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 ‘귀차니즘’에 빠진 분들이 있습니다.
- 예배 시간에 귀찮아 성경을 펴지 않습니다.
- 귀찮아 찬송도 하지 않고 입만 벙긋 합니다. 
- 교인들과 관계를 갖는 것도 귀찮아합니다.
- 주일 하루 어쩌다 빠질 수도 있지 
‘교회 왔었느냐는 확인전화는 왜 하느냐’고 하며 귀찮아합니다.

여러분, 귀찮으십니까?
성경에 보면 목자는 양을 알아야 하고, 양은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목자는 양떼의 숫자를 세어야 합니다.
그것이 귀찮으면 여러분은 
목자 없는 양이 되기를 자청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나 지역장들이 돌보는 관심에도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이 싫다면 ‘과연 복 받을 신앙인가? 
하나님께서 복 주실 만한 신앙인가?’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도 
평일에 속회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특별한 분들이 계십니다. 
특별한 직장에 다니거나 
특별한 가정형편상 집에서 모일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사정이 있는 분들을 위해 
자기 집 차례가 되었을 때 식당이나 공원에서라도 모여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속회모임을 갖도록 했고 
그것도 어려우면 평일 또는 주일에 교회에서라도 모여 
속회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평일에 시간 내기도 귀찮고 … 서로의 집에 오가는 것도 귀찮으니 
주일에 교회 온 김에 … 속회 모임도 해치우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물론 교회는 예배하는 곳입니다.
주일은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좋은데 
여러분 가정이 잃어버린 예배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가정에서 가정예배 / 속회예배 드리기를 멈춘 이후 … 
심방예배를 멈춘 후 … 
여러분의 집에서 찬송 소리가/기도소리가 멈췄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즈음 집에서 여럿이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가 났던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걱정됩니다. 
예배를 거절하고 예배를 귀찮아하고
문 닫아버린 여러분의 집에 누가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거절하고 귀찮아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벧에돔은 여호와의 궤 모시기를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집에 두었습니다.
오벧에돔이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 열심히 청소를 했습니까?
오벧에돔의 집이 크고 좋은 집이라, 가구가 멋있어서 …
언약궤를 그 집에 두기로 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좋은 집, 깨끗한 집, 잘 정리된 집이라야 
예배를 받으신다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라 하셨고,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 4:23)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예배자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
예배를 통해 우리 가정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싫어하여 집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집이 좀 누추하면 어떻습니까?
정리가 좀 안되어 있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 오벧에돔처럼 …
예배가 필요한 때에, 하나님의 궤가 있어야 할 때에 
문을 여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복을 받기 원하면서
스스로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들과 찬송과 기도를 함께 했던 적이 언제입니까?
그것이 싫다면 진정한 신앙일까요?

소중히 여김 받는 가정

지난 심야기도회 때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셨고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계시는
‘이태화 원로장로’님이 우리 교회에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에 심방 한 번 오실랍니까?”
“네, 오라고 하시면 가야죠.”
“우리 집에 아직 한 번도 안오셨습니다.”
아마 장로님 집에 한 번도 가지 않아서 서운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칠순 잔치를 할라 그러는데
목사님이 오시면 집에서 하겠고, 안 오시면 관둘랍니다.”
그게 초대인지 … 뭔지 … !
그래서 정해진 날짜에 장로님 댁을 갔습니다.
그런데 칠순 치르신다는 분이 누워계셨습니다.
쩔쩔매며 … 일어나서 저를 맞으셨습니다.
제가 집으로 심방 간다고 
구석 구석 집안 청소를 하시고 몸살이 나셨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사한지 …
저는 ‘심방’이라는 생각만 하면 그 장로님이 떠오릅니다.
그 장로님은 아들 뻘 되는 저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목사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고신일목사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고신일목사를 통해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5절에 보면 
목사에게는 3가지 중요한 직무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권/강단권>입니다. 
둘째, <축복권>입니다. 복을 빌(빌 축, 祝) 복(福) 권한을 말합니다.
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판결권/치리권>입니다.
이렇게 복을 비는 축복권이 있는 목회자가
복을 빌기 위해 가정과 사업장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사업장을 위해, 직원들의 형통함을 위헤 
복 빌어주기 위해 심방 가는 것입니다.

함께함으로 누리는 축복

이제, 저와 여러분은 기능적인 편리함만 쫓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물론 시대가 변했고, 생활 방식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과거의 전통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요 4:23),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26:5)

여러분의 가정에서 … 일터에서 …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바라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찬송소리, 기도소리가 울려야 합니다.
목회자들의 심방과 성도들과의 교제가 이어져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크리스챤들의 문제는 
예배드리기 위해 열어야 할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예배드리기 귀찮다고, 
목회자, 속도원들이 찾아오는 것이 싫다고 …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달리아(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온 집안 식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에 힘쓴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행 10:1~2)
그는 천사의 지시에 순종하여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행 10:7~8, 23)
그리고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행 10:24)

고넬료는 베드로가 도착하자 극진히 맞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5절에 보면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영접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학력이 뛰어났습니까? 벼슬을 했습니까? 
돈이 많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는 베드로이기에 
극진히 영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33)

그들은 베드로 앞에 있는데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말씀을 전하러 온 베드로 앞에서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던 
고넬료와 같은 자세/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다면
사실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씀을 전하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우습게 여겼고, 결국 멸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호와의 궤를 모심으로 큰 복을 받았던 오벧에돔처럼
여러분의 가정에 … 일터에 …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강권합니다.
성도 여러분들과 가정과 일터에서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예배드리는 분들 모두
힘들어도 … 어려워도 … 불편해도 … 귀찮아도 …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벧에돔이 누렸던 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예배를 위해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 집의 문도 예배를 위해 열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문을 열고 예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늘 사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예배하라 명하시고 예배를 받으시며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에게 복주시는 하나님!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오늘 말씀을 듣고 마음 문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고 닫혀진 가정의 예배의 문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벧에돔이 받았던 복을 저들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복에 복을 누리는 하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치는 자가 아니라
말씀대로 실천하는 순종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