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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인가? (요일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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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요일 3:1-3)

나는 누구인가? 오늘은 이 모습, 내일은 또 다른 모습 두 가지 모습을 같이 가진 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의연한 나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형편없이 초라한 약자인 나... 나는 누구인가? 외롭게 던져진 이 질문이 나를 놀리누나

Bonhoeffer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나치독일에 저항한 죄로 감방에 갇혔을 때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질문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 건강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자아상(self-image)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습니까? 저도 제 어린 시절을 되돌이켜 보면 나는 못났다, 못생겼다, 나는 힘이 없다 생각하며 열등감으로 고생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왜 그렇게 자기를 못난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꽤 똘똘하게 잘 생긴 아이였었는데…

우리는 자아상을 어디서 얻습니까? 자기가 어떻게 생긴 것을 우리 혼자는 모릅니다. 거울을 보거나 남이 얘기 해줘야 압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우리 주변에 있게 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거울 중에 하나는 선생님이십니다. 그 거울들이 우리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 거울이 올바른 거울이 아니라 비뚤어진 거울입니다. . 

마음이 비뚤어진 부모가, “아이구 못난 것, 왜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내 속을 이렇게 썩이냐?” 할 때, 그 어린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생깁니다. 선생님이 “너는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거기에 비뚤어진 모습이 학생의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그들 자신이 비뚤어져있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비뚤어진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한국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사회분위기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습니까? 학벌, 출신지방, 부모의 직업… 이런 것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고아나, 과부가 되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이 2등급 인간이 됩니다. 

지금도 저는 어렸을 때, 이웃에 살던 국제 결혼했던 가정이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았는지를 기억합니다. 이런 비뚤어진 인상이 하나 둘 우리 마음에 쌓이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못된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에는 자신에 대해 가진 비뚤어진 생각이 아픔이 되어 상처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이 뜻밖에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내가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비뚤어진 자아상을 가지게 되는 데는 이렇게 사회나, 가정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그런 편견과 잘못된 자아상을 극복하는 것은 나 자신의 책임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살아가면서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늘 우울하고 불안합니다. 

또 잘못된 자아상은 두려움에 쌓여 자기의 꿈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달란트 비유를 다 아실 것입니다. 그 비유 중, 한 달란트 가진 자가 나오는 데, 그 한 달란트 가진 자는 자기의 꿈을 일찍이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에이, 나 같은 것이 무얼 해.” 쉽게 좌절하며, 꿈을 펴지 못합니다.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방어태세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잘못된 자아상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을 맡기려 하면 사양부터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상처와 아픔을 고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도 우리를 고치시기 원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건강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의 일을 위해서. 그의 천국건설에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만큼 우리를 아시는 분이 누구이신가? 그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들의 참 모습입니다. 너는 나의 것이라, 먼저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한 번 뇌어보시오. 어떤 느낌이 듭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듣는 이사야 43:1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까 인용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훼퍼의 시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외롭게 던져진 이 질문이 나를 놀리누나. 주여, 내가 누구이든, 주는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시는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감옥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쓴 것입니다. 요즈음 본회퍼의 전기를 다시 읽으면서 그는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모범을 보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깨닫는 그 순간에 무한한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이든 만든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소유권을 누구에게 팔거나 양도하기까지는 만든 사람이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는 당연히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드셨는가? 

시편 139편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신묘막측이라,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라는 영어번역이 더 실감이 납니다. 인간을 하나의 예술작품에 비긴다면, 그 앞에 설 때에 소름이 돋고, 저절로 탄성이 터지도록 훌륭한 걸작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행사’라고 번역된 이 말을 어떤 번역은 masterpiece라고 했습니다. 걸작품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욕이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애정과 정성을 들여 만드신 존재입니다. 하나도 똑같은 것은 없이 모두가 독특한 가치를 가진 귀중한 존재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그는 땅에 쭈그리고 앉아서 흙을 개어 하나하나 인간을 빚으십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이 땅에 앉으셔서 정성껏 다듬어 인간을 빚으신다는 그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들은 “있으라”, 말씀하셔서 일거에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만드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그 인간 하나 하나에 다른 것에는 없는 독특한 가치를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란 말은 그런 하나님의 창조 이미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를 남과 비교하며 남과 같지 못한 자기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그의 이름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내 가치를 인정하고 어깨 펴고 살기에 충분치 않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성경에는 우리들에 대해 기가 막힌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도 귀한 존재이지만 자녀는 어떻습니까? 비교가 안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하늘 나라의 공주요 왕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귀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이런 말을 여러분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듣기에 좋은 말인데, 실감이 안 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그런 영광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옷은 너무나 낡고 헤어졌습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너무나 추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너무나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한 것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이야기 하나를 드리고자 합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헬렌의 이야기입니다. 헬렌은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제우스의 딸이면서 미모가 출중해서, 모든 사람이 이 왕녀를 탐을 냈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둘러싸고 많은 전쟁이 있었답니다. 그 전쟁 중에 이 여자는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 후에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됩니다. 메넬라우스(Menelaus)라는 장군이 이 여자를 너무 사모해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 나섭니다. 

한 항구에 그가 도착했을 때, 드디어 그렇게 찾아 헤매던 헬렌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헬렌은 안타깝게도 기억상실증에 걸려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누더기를 입고, 허리는 구부러지고, 몸을 파는 여자가 되어 있습니다. 메넬라우스는 비록 누더기에 싸여있고, 눈초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옛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지만, 이 여자를 알아보았습니다.

“Helen!”이라고 부릅니다. 이 여자는 그 소리에 얼굴을 돌립니다. “Helen, 당신은 트로이의 헬렌이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쳐들고 허리를 폅니다. 그의 고상한 자태가 나타납니다. 드디어 왕녀의 고귀한 신분이 회복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안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의 모습이 상처받고 일그러졌어도,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못났다고 하고 나 자신도 나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내게는 네 지금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가가 아무 문제가 안 된단다. 네 신분은 회복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피가 나의 죄를 씻은 것을 믿는 순간에 우리의 신분은 회복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아상은 우리에게 쓸데없는 열등감을 가지게 하지만, 동시에 우월감도 가지게 만듭니다. 두 가지 다 잘못된 자아상에서 나오는 생각이며,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게 하는 악한 생각입니다. 이 것을 고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귀한 존재야. 내가 너를 회복하게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 너는 그만큼 귀한 존재야. 너는 내 자녀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너무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게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해방합니다. 기를 펴지 못하고 살던 사람이 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웅크렸던 삶이 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는 거지요 창녀요, 불구라고 세상이 정해준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비록 우리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로, 지은 죄로 얼룩지고, 비뚤어져 있어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걸작품이요, 귀한 집 자손인 것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의 중요한 메시지는 용서와 은혜만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 건강한 삶을 위한 설교를 하면서 조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 참으로 듣기 좋은 이야기이고,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 것만으로는 반쪽 메시지가 됩니다. 

나머지 반쪽은 책임입니다. 왕녀가 자기 신분을 회복한 뒤에는 왕녀답게 사는 것이 따라야 합니다. 왕녀가 거지같이, 창녀같이 살면 안 됩니다. 그 용서와 회복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말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셔야 했지만, 우리들도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쉬운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담 없는 교회는 가장 나쁜 교회입니다. 제자가 되는 대가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담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 책임 다 해야 하지만, 특히 교회 밖에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의 고귀한 신분을 알아채고 있습니까? 내놓고 “나는 예수 믿소” 이야기 안 해도, 어쩐지 기품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시장에서 직장에서, 옆집 사람과의 관계에서, 식당에 가서 식사할 때에도 그 기품이 나타납니까? 식당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종업원에게 반말을 쓰고, 무리한 요구를 해대고, 불평을 하면, 그 것이 왕의 자녀의 기품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제가 맥도날드를 자주 갑니다. 한국 분들 많이 가는 맥도날드에 가면 이따금씩 열을 내서 교회이야기, 목사이야기, 장로이야기 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분명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때는 옆에서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는데, 교회에 대한 불평, 남에 대한 험담을 듣게 되면 얼굴이 뜨뜻해집니다. 세상 이야기를 할 때는 자기는 의인,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하게 되는 것을 듣습니다.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사람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도 귀한 사람이고, 세상에서 보아도 기품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크리스천의 기품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려놓고 비우는 뼈아픈 노력과 희생을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악마의 제물이나 이용거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고귀한 신분을 회복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도 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며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전환점(turning point)이 언제 왔는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나는 나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도, 떳떳하게, 또 당당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위축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하와이에서 소위 온갖 유명한 사람들, 대통령도 만나고, 과거에 총리하신 분들도 여러분 만났는데,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렇게 여기 서 있어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미국 사람들 만나도 편합니다. 6년 동안 감리사 하면서 백인, 흑인, 사모아인 통가인 일본인들의 지도자 노릇을 해야 했는데 편안했습니다. 

야, 김웅민이 많이 달라졌다. 저 자신이 신기합니다. 그전에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시하지는 않는가, 책잡히지는 않는가, 이런 것 때문에 알게 모르게 긴장하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지는 가에 신경쓰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잘 하자 하는 관심이 더 강해집니다. 참 놀라운 해방의 경험입니다. 

여러분도, 자기 가치를 못 찾아서 고민하고, 마음에 아픔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 이 복음을 들으시오. 나는 누구인가?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라!” 놀라운 복음이지. 이 복음을 받고 믿으시오. 놀라운 해방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임할 것. 그리고 이 사실에 응답하며 사시오.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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