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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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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45절-52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예수님의 언행심사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유 없는 언행심사가 없다. 오신 이유, 역사하신 이유,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이유가 다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이 땅에 와서 일을 다 마쳤으니 올라갔다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부활 승천도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손 털고 ‘나 이제 올라가련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이유가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제자들에게 재촉하여 빨리 벳새다로 건너가라고 하셨을까? 벳새다는 고기 잡는 집들이 많이 있었다. ‘벳새다’ 하면 그 뜻이 ‘고기 잡는 집’이다. 제자들이 그 많은 무리들에게 하루 온 종일 떡을 나눠주느라고 쉬지도 못하고 피곤할 텐데 왜 이런 제자들을 벳새다로 건너가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무리들을 다 집으로 보내고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다. 그러면 문제. 예수님은 모든 걸 다 아시는 분인데 제자들을 벳새다로 건너가라고 하고서 당신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1.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갈 때 마귀가 풍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바다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기도하려면 의례히 산으로 올라가니까.


2. 보통 보면 좋은 것은 예수님이 했다고 하고 나쁜 것은 마귀가 한 것이라고 하니까 풍랑을 일으킨 것도 마귀가 일으킨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마귀가 풍랑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려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이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선신이고 마귀는 악신이라는 대등한 개념을 갖는 이원론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은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많이 생각을 한다. 말은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지만 실지로는 이방신관적 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 연단시키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가라고 하신 것이고 풍랑을 일으키신 것인데, 이 때 이 풍랑을 뚫고 건너가는 제자들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3번이 정답인데 1번과는 산으로 올라간 것까지는 맞는데 3번은 산으로 올라간 의도성이 1번과는 전혀 다르다. 인간들도 상당히 오해하기 쉬운 게 있다. 그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고 지레짐작하여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것은 마귀시험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그 분은 만능의 능력자요 뭐든지 다 아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바다 가운데로 보내놓고 당신은 혼자서 산으로 올라가신 것을 나쁘게 말하면 제자들을 바다 가운데로 보내놓으면 그 제자들에게 풍랑이라고 하는 마귀의 시험이 올 것임을 다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시험을 당하지 않으려고 혼자 산으로 도망을 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면 예수님은 나쁜 분이 돼버린다.


아닌 말로 만능의 능력자 이 분은 마귀를 무저갱에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분이니 마귀가 파도를 일으킨다고 해도 그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주님을 그런 주님으로 보는 것을 주님을 주님만큼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주님을 주님만큼 모르면 불신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그런 경우가 참 많다. 몰라서 불신이 되는 것이다. 즉 모르는 상태는 불신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알고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에 대해 바로 모르면 불신이요, 모르면 재앙이요, 모르면 비구원이 돼버린다. 우리는 적극적인 면에서 신앙정신이 돼야 한다. 어정쩡하면 안 된다. 자기에게 속는다.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이 남에게 속은 것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은 게 더 많다. 사기꾼이 자기를 속이면 자기는 그 사기꾼을 욕을 하고 법에 고소를 할 테지만 실은 그 사기꾼에게 속을 수밖에 없는 본인이 문제다.


자기에게 사기를 친 사람에게 ‘그 사기꾼이 나쁘다’ 하는 것은 제 삼자가 할 말이지 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네가 할 말은 아니다. 네가 당했으면 네가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은 옳은 것을 가르쳐 주는데도 귀담아 듣지 않고 네가 왜 몰랐느냐?’ 오늘날 사기꾼 교회, 사기꾼 목사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도 보면 가정이 해체가 되는 거다. 그런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배는 이미 바다 한 가운데 왔고 해가 지면서 캄캄해지고 있는데 바람마저 부는 것도 심상치가 않다. 이제 바람은 점점 더 강해지고 파도도 덩달아 일어난다. 물질적 개념으로도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바람에 물결이 자꾸 쓸린다. 그러니까 이 물결 저 물결이 막 합쳐진다. 이게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의 민심도 세상 정치적 바람, 세상 유행적 바람을 잘 탄다. 어떻게 유행을 잘 타는지? 정치적 바람, 세상 옷 유행바람, 놀이문화의 유행바람 등 참 많다.


오늘 예배 전에 학생들이 특송 할 때 찬송가 템포를 봤다. 찬송도 템포가 빨라야 할 노래가 있고 느려야 할 노래가 있다. 그런데 중고등 학생들이 찬송 부르는 걸 들으니 전부가 토끼처럼 톡톡 튀고 있다.


슬픈 노래를 톡톡 튀게 부르면 어떻게 되느냐? 슬픈 일을 생각하며 슬픈 찬송을 부르면 템포가 빨라지느냐, 느려지느냐? 느려진다. 슬픈 노래를 부를 때에 그 노래가 슬퍼지며 자기 속에서 그 분을 참지 못하면 크게 악을 쓰면서 나올 거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마음으로 끙끙 앓는다. 마음을 타고 그 아픔이 신음소리로 나오는 거다. 찬송을 지도하는 분들은 그런 점을 많이 생각을 해야 한다. 템포가 빨라야 좋은 게 있고 느려야 좋은 게 있는데 모든 노래의 템포가 빠르게만 흘러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게 되면 감화성이 어디로 잡히는구나’ 이것도 있는 거다.


바람에 이어 이제는 파도도 덩달아 일어난다. 세상은 원래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 곳이 세상이다. 안 일어나는 게 세상이 아니라 일어나는 게 세상이다. 물질적 개념으로 세상은 늘 바람이 부는 곳이지만 교회 안에도 성령의 바람이 분다. 그러면 어떻게 부는 거냐?


안 좋은 소문의 바람은 귀로 귀로 어떻게 파도를 잘 치는지? 그렇게 되면 교회든 사회든 직장이든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문제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면 안 된다. 귀가 얇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귀가 간지러워서 귀신의 말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다.


제자들은 사나운 파도 위에서 교대로 힘 것 노를 저어가며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바람에 배는 점점 밀리고 제자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예수님은 이것을 산에서 다 아신다.


이런 일을 한 번쯤 경험한 사람이라면 ‘날씨가 어떠하면 바다가 어떻게 되겠고, 뱃사공들이 얼마나 애를 쓰겠구나’ 하는 걸 아는 거다. 안 당한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있든 없든 ‘현재 나에게 부딪히는 모든 것은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주님의 은혜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하필이면 내가’ 한다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이 당했으면’ 하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복된 사건이다. 하나님은 선이시니 선의 뜻으로 나에게 준 것이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면 표면적 사건이야 악조건적인 사건이지만 내 속에서는 선이 생산이 된다. 이게 참 옳은 거다. 돈 없고 가난하고 집 없고 헐벗는 그런 자리에서 선의 사람으로 깨닫고 나올 수 있다면 복된 사람이요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우리 집만 이러냐’ 하고 원망불평을 해놓으면 그런 사람은 아닌 말로 ‘복권을 탔다고 해도 너는 그것 때문에 망할 사람이다. 네 스스로가 목숨을 재촉할 사람이다’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자기의 삶 속에서 선, 의, 하나님의 공의 이걸 다 창출해 내야 한다. 이게 이룰구원의 정신이다. 이게 믿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 어떤 악조건에서도 굴할 필요가 없는 거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속마음을 다 알고 계신다. 오늘날 자기의 마음도 다 아신다. 자기를 만드신 분이신데, 자기의 뇌세포 조직, 오각의 오감성을 만드신 주님이 우리를 모르실까? 다 아신다. 누가 얼마만큼 봉사정신 희생이 강한지, 누가 얼마나 게으른지 다 아신다. 누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예수를 믿는 건지 다 아신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그 모든 것을 모르는 것처럼 사는 자가 많다.


밤 사경쯤에 즉,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사이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 옆으로 지나가시려고 한다. 그러면 이게 진짜로 지나가시려고 하는 거냐,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냐?


지나가시는데 예수님의 하얀 옷이 바람에 나부끼니까 제자들이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키면서 바다에 유령이 나타났다고 하며 서로 고함을 친다. 유령을 다른 말로 하면 도깨비, 또 다른 말로 하면 귀신.


귀신에 홀렸다느니 하는 건 마귀장난들이다. 귀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귀신에 홀렸다고 하는 건 마귀의 장난들이다. 눈으로 뭐가 보이면 ‘저게 뭐 같다’ 하며 속에서 지레 겁을 먹고 얼굴이 새파래서 와들와들 떠는 것은 그런 귀신놀음에 쉽게 놀아날 수밖에 없는 자기가 문제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자기의 목숨의 애착감이 일반인처럼 들지를 않는다.


제자들이 손가락으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유령이 나타났다고 서로 고함을 치니 제자들이 정신이 혼미해지고 오돌오돌 떨면서 ‘이제는 죽었다’ 한다. 파도가 허옇게 일어나서 배 안으로 덮치는 게 손톱 긴 유령의 손이 자기의 목을 잡는 것 같기도 한다.


그 때 들려오는 소리가 귀에 익은 소리다. 누구 소리냐? 주님의 소리다. 네가 그만큼 주님을 따르고 믿었느냐? 그렇다면 네가 주님의 음성을 아느냐? 주님의 음성이 어떤 음성이냐? 소프라노 음성이냐? 베이스 음성이냐? 그걸 말하는 거냐? 주님의 의사성이 주님의 음성이다. 평소에 그걸 잘 알아들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잘 몰랐고, 이게 육적으로 표현이 된 거지만 우리가 이 장면을 다시 볼 때 우리는 평소에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개인적 사건, 가정적 사건, 국가적 지역적 세계적 사건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한 집안 식구라도, 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어도 가족끼리 서로의 말뜻을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으면 여기는 의사불통이 생긴다. 그래서 가족끼리 서로 큰소리를 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건 저수지의 물둑이 터지는 것과 같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누구의 음성이냐? 주님의 음성이다. 환난 핍박 고통 속에 있는 성도에게 진리이치 생명이치 주님의 구원의 음성이 안심하라고 하신다. 환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해진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자기가 세상에 살면서 두려워할 게 뭐냐? 직장에서 끊어지는 거? 병원에서 사형선고 내려진 거?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뭐가 제일 두려우냐? 죽으면 천국 가는 건데 갈 때까지 뭐가 제일 두려우냐? 아버지의 사랑과 끊어지는 게 두려운 거다.


알고 보니 물귀신이 아니라,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놀란 것이다.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니 제자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던 바람이 저절로 그쳐지고, 이에 제자들이 또 한 번 놀란 것이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신 이 분이 누구냐? 제자들이 떡을 떼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해졌다고 한다.


떡과 물고기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사를 한 것은 이 떡과 물고기를 먹고 눈을 밝게 열어달라는 기도였는데, 보통 음식을 먹을 때 뭐라고 기도하느냐? ‘이 음식 감사히 먹겠습니다. 오늘도 양식을 주셨으니 힘주시고 구원 잘 이루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


축사를 음식을 놓고 감사기도를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말라. 축사의 내용은 감춰져 있다. 풍랑 파도의 사건 환경에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 그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축사다.


떡과 물고기를 먹고 눈을 밝게 열어달라는 기도였는데, 제자들은 창조의 주시요 만능의 능력자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적으로 육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것만 생각을 한 모양이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그 생각이 ‘믿음이고, 아니고’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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