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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 감사, 감사!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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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 감사!  (살전 5:18)
 
 
1. 추수감사절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라!

1) 추수감사절의 첫 번째 이야기

곡식 추수와 관련하여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감사 제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4)인데요. 最初의 人類들서부터 시작된 추수와 관련된 감사 의식은 어느 민족에게서나 다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3장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못 박음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고백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오랜 역사를 가진 추수 감사제가 교회의 절기로 지켜지게 된 것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식량난과 영양실조와 추위 등으로 신대륙에서의 첫 번째 겨울을 지낸 후 백 두 명 가운데 마흔 네 명이나 죽었으며 그 나머지도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때 그들을 도와주었던 것은 마음씨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대륙의 原住民인 인디언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던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갖다 주었고,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다음해인 1621년 청교도들은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가지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으로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으면서 축제를 가졌는데, 이것이 근대적인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두 번째 이야기

이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아메리카 인디언의 입장에서 기록한 문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이자, <세계교도소선교협회> 책임자이며, 현대 교회에 대한 성경적이고 시대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Charles Colson이 기고한 것입니다(Thanksgiving and the Original Intent of the Constitution, 2003년 11월 4일). 

청교도들이 미국 메사추세츠 플리머스 지방에 도착하기 10년 전인 1608년, 상인들이 먼저 그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무역을 위해 ‘왐판노그’ 인디언을 찾아갔다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을 납치하여 스페인으로 데려가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예가 된 인디언 소년 중에 ‘스콴토’라는 아이가 있었는데요. ‘스콴토’는 어느 스페인 수도사에게 팔려가 그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스콴토는 다시 영국으로 팔려갔고, 거기서 신앙이 깊은 ‘존 슬레이니’라는 사람 밑에서 일했는데, 이 ‘슬레이니’는 스콴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신대륙으로 가는 배를 태워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618년, 스콴토는 노예로 끌려간 지 십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歸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인 메사추세츠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엄청난 고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스콴토의 고향을 휩쓸어 그 전염병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 가운데서 스콴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듣게 하시고 1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신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해였습니다. 영국에서 온 청교도들이 스콴토의 고향에 정착했습니다. 스콴토는 긴 항해와 신대륙의 추위를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이런 스콴토에 대해 메이플라워호의 선장이었던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스콴토는 우리를 위하여 특별하게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옥수수를 어떻게 심는지와 어디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땅에서 안내자가 되어주었으며, 자신이 죽는 날까지 우리들을 돌보아 주었다." 마치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던 야곱 집안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준비시키셨던 것처럼, 스콴토는 청교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특별한 도구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감사절은 1623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공식 절기가 되었고, 1789년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지킬 것이 권장되었으며, 1863년 링컨 대통령은 국가적인 축일로 선포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1904년부터인데요. 처음에는 장로교 단독으로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다가, 1914년 미국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최초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변경하여 지켰으며, 이것이 후에 주일로 바뀌어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3) 추수감사절의 세 번째 이야기

이상에서 본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청교도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놓으신 인디언 스콴토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길고 긴 항해와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으로 가족을 포함하여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그래도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첫 수확물로 하나님께 감사절을 지냈고, 그들을 도와 그들과 함께 첫 추수감사절을 지낸 ‘스콴토’ 역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멀리서 찾아온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인과 아벨 때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대로 지켜야 하는 절기’로서 “수장절”을 말씀하신 것이 교회적인 절기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절이 교회적인 절기로 자리 잡기까지에는 청교도들과 한 인디언의 시련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 즉 추수감사절은 그런 시련과 고통을 딛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서 시작된 절기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인 추수감사절은 이제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즉 추수감사절의 “그 다음 이야기”는 여러분이 적어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추수감사절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에 대한 해답을 여러분에게 주고 있습니다.

2. 이렇게 감사하라!

일반적으로 감사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입니다. 다른 말로는 <조건적인 감사>, 혹은 <반사적인 감사>라고 부릅니다. ‘먹을 것을 주셔서’, ‘건강을 주셔서’ 등 일반적인 감사로서, 조건이나 이유가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철학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가난하다가 부해져서, 건강이 좋지 못하다가 건강을 회복해서,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이 깊어진 것입니다. 전에는 은혜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까 은혜요, 전에는 복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복이란 말입니다. 

전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신학적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죄를 구속하사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기쁨이자 복인 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 구속하여 주신 것이 감사의 조건이며, 오늘도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보호하여 주심에 감사하는 것이 신학적인 감사, 곧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이상에서 말씀드린 감사의 태도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것으로 감사에 대한 가장 짧고 간단하면서 가장 확실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본문을 보실까요? 

“범사에 감사하라!” 여러분, 이 “범사”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가 전에 설명 드린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한번 복습을 해 보겠습니다. 

➊ 먼저 “범사”란 “모든 것”이란 뜻으로, ‘예외 없이, 빠짐없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즉, 여러분의 삶에서 크고 중요한 일만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에 대해서까지,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일만 아니라 불쾌한 것, 불행한 것, 아픈 것, 없는 것, 사라진 것, 빼앗긴 것에 대해서까지 감사하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식지 않은 감정에 대해, 풀리지 않은 관계들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의 먼지 같이 아주 적은 것에까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➋ 두 번째로 “범사”란 ‘모든 시간에’라는 뜻입니다. “범사”의 첫 번째 의미가 ‘모든 일, 모든 장소, 모든 상황’을 뜻한다면, 두 번째 의미는 시간적인 것으로 ‘항상, 언제든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모든 시간, 一分 一秒의 예외도 없이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날숨을 내쉬고 들숨을 들이키는 그 모든 호흡의 순간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숨을 내쉬면서 감사하고, 그 내쉰 숨을 다시 들이키면서 감사하라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호흡이 다하도록, 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종신토록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와 성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성도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상이 “범사”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원어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범사에 대한 감사는 성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이 사역하면서 감옥에 갇힌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습니까? 예배당 건축 과정에서 생긴 일로 잠시 감옥 생활을 하신 목사님이 항상 “나는 출옥성도다”라면서 자랑하셨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출옥성도”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분들을 부르는 명예로운 이름인데, 그 목사님은 자신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무나 자주 감옥을 드나들었고, 특히 노년에 가서는 감옥이 아예 그의 집이었기 때문에 “출옥성도”, 혹 “옥중성도”라는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십시오. 

그는 한차례의 體罰로도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24), 선교여행 중에는 세 번이나 조난 사고를 당했고, 한 번은 茫茫大海에 혼자 24시간 동안 떠있기도 했습니다(25). 또 복음을 위한 열정으로 자지 못했고, 굶주렸고, 헐벗었고, 쉬지도 못했습니다(27). 아무튼 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즉 자신의 삶의 “범사”에 대해 감사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범사의 의미를 오늘은 “case” 별로 구분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그래서 감사”

첫째로 여러분은 “그래서 감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라는 것은 제가 붙인 이름인데요. 이 “그래서 감사”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물리적인 감사>, <조건적인 감사>, <반사적인 감사>와 같은 것입니다. 감사할 만한 조건이나 이유가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이러한 감사를 하라는 것은 현대인들이, 아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조건적인 감사조차도 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➊ 분명히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도 은혜인 줄 모르기 때문이고, 분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복인데도 복인 줄 모르기 때문이고, 분명 좋은 것인데도 그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그래서 감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➋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은혜와 복이요 감사거리인 줄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신 좋은 것 복된 것 은혜로운 것을 몰라보거나,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곧 여러분을 떠나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Thank You”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뭔 말을 하면 무조건 “Thank You”부터하고 보고요,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이해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Thank You”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향한 “Thank You”는 얼마나 인색한지요! 어느 분이 “감사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살아있는 것, 숨 쉴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잠잘 수 있는 것, 입을 수 있는 것, 가족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서 있는 것인 줄 알고 감사하는 것, 그것이 “그래서 감사”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와 복을 헤아려 보시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나 감사”

두 번째로 여러분은 “그러나 감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그러나 감사의 삶”은 첫 번째인 “그래서 감사”의 “닮은꼴”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사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러나 감사”는 기뻐할만한 것이 없고, 감사할 만한 것이 없어서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닮은꼴이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한다는 것과, 감사할 것이 없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은 어떤 조건에 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고, 직장이 위태롭고, 자식들은 속을 썩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깨어지고, 계획했던 일은 제대로 되지 않고, 바라고 원하던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러면서 점점 나이가 들어 건강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런 형편에 어찌 감사할 수 있냐고 그들은 항변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요? 이처럼 좋지 않은 것에 대해, 불쾌한 것에 대해, 가난한 것에 대해, 몸이 아픈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러나 감사의 삶”이란 그렇게 감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감사할 수 있을 만한 때에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어서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주님을 신앙하는 성도는 그 감사의 자리까지 이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아픔과 실패와 고통을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3) “그리될 줄로 믿고 감사”

세 번째 감사는 두 번째의 “그러나 감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지금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거나, 혹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믿으면 그 믿음대로 될 줄 믿고 소망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감사를 “소망의 감사”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감사에는 소망이 표현되어야 하고, 그 소망의 감사는 믿는 자에게 그대로 된다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33장 10절, 11절에 바로 이 감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아시리아에게 망한지 오래고, 남 유다 왕국도 바벨론 제국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의 어려움을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10절)라고 표현했습니다.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이렇게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니 그 고민과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나라가 곧 망하니 어서 빨리 돌이키라’는 것이었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더 어려질 것’이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선포한 말씀이 33장입니다. 특히 10절,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10).”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荒凉하여 滅亡 직전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回復시켜주실 줄로 믿고 그 소망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를 못살게 굴던 점령자들이 돌아가고 평화로운 시대가 到來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지금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사도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감사는 소유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지금의 상황과 모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참된 감사는 믿음과 소망의 분량대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 되게 하실 줄로 믿고 소망하면서 감사할 때 그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도 믿음과 소망대로 “될 줄로 믿고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마지막 네 번째는 현실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지금의 현실에 감사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미래에 대해 그 어떤 전망도 할 수 없으며, 나중이 지금에 비해서 좋아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지금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감사하고, 나중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더 좋아지고 더 부해지고 더 건강해 지지 않을지라도 감사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기독교 방송에서 시각장애인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 나온 내용입니다. 소년 인수는 중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에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 닦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避難民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 말했습니다.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을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느냐?” 이 윤인수 목사님과 그 어머니의 이야기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앞날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겁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이고, 또한 성도 여러분들이 서야할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은 무엇을 감사할 것인지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 보셨을 것입니다. 아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감사의 제목들은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감사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고 현실이 감사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감사하는 것이 이 감사의 날에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뜻”이라는 말을 여러 곳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지’, 즉 “명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설사 기분 나쁘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현재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고, 어떤 일은 시작할 수 없거나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을 전망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도리어 미래가 더 불투명하고 어두워 보인다 할지라도 그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3. 쌓을수록 좋은 감사!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마일리지 서비스>라는 것을 아시지요? 신용카드를 포함하여, 항공사, 백화점이나 동네 슈퍼마켓 등, 물건을 구입하면 일정 금액을 적립해 주어 나중에 그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매할 수 있게 해 주는 제도입니다. 알뜰한 사람들은 이 마일리지를 쌓아가기 위하여 마일리지를 적립해주는 카드나 기관을 잘 이용합니다. 이러한 마일리지의 특징은 오랫동안, 그리고 자주 이용해야 그 점수가 누적되어 특별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일리지처럼 누적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누적되면 손해인 것도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로, 폭식, 미움, 편견, 나쁜 습관, 과도한 소비는 누적될수록 손해입니다. 그러나 누적 될수록 좋은 것이 있습니다. 많이 웃으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이 누적되고요, 많이 걸으면 건강이 누적됩니다. 칭찬이 누적되면 점점 밝은 사회가 되고, 책을 많이 읽으면 교양과 품위가 누적됩니다. 그 중 여러분이 가장 우선적으로 적립해 가야할 것은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감사 마일리지는 얼마만큼 적립 되었습니까? 좋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 감사한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람의 감사 마일리지는 정말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 불쾌하고 괴롭고 아프고 힘들고 가난한 그 모든 경우에 감사할 때, 나중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때, 여러분의 감사 마일리지는 그만큼 쌓여갈 것이고 그 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모든 일에 예외 없이,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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