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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재감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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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 (요 9:1-1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어느 동네를 지나가실 때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그 사람을 보고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면서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드셔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게 보였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네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라는 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발라주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그렇게 했더니 눈이 떠졌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소경이었던 사람을 보고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라는 분이 뜨게 해 주셨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을 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소경에게 ‘너는 그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소경은 ‘그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을 향해 화를 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 아들인지를 확인하고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부모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우리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니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고 말했습니다. 22절에 보면 부모는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교로부터 출교 당할 것이 두려워서 말하기를 꺼려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우리는 예수를 죄인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며 네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다시 말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강요합니다. 즉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소경이었던 사람이 ‘나는 예수라는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분을 통해 눈을 뜨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유대교에서 출교 시켰습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전에는 소경이었기에 사회로부터 소외당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시인함으로 유대 사회에서 쫓겨나 소외를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었던 사람이 유대교에서 출교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 ‘네가 너를 눈뜨게 한 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소경은 ‘예, 내 눈을 뜨게 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너와 말하고 있는 네가 바로 그다’ 라고 말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 꿇으며 절하며 ‘주여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뜨며 변화되는 과정이 오늘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소경인 사람을 대하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제자들, 바리새인들, 부모입니다. 그들은 한 곁같이 소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의 존재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아픔에 대한 관심과 그의 존재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단지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의 기쁨과 감격을 함께 나누기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강요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시킵니다. 그의 부모는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당하게 될 불이익과 고통을 두려워하며 진실을 외면하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떠넘깁니다. 제자들에게도, 바리새인들에게도, 부모에게도 소경이었던 사람의 존재감은 전혀 없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구걸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의 존재감을 인정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을 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해 두려움과 외로움에 쌓여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찾아가셔서 그를 만나 주시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며 그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출교를 거론하며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위협했습니다. 그런 위기 가운데서도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출교를 기꺼이 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신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을 때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도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면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고,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어도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면 그 사람은 행복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유대교로부터의 출교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그는 참 자유인의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존재감에 대해 저의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제는 참으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김양수라는 친구와 학교 가다가 학교를 가지 않고 시내로 놀러 나갔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 친구가 영화도 보여주고, 먹을 것도 사주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 친구는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두 달 동안 학교를 가지 않고 시내를 배회했습니다. 나중에는 혼자 더 이상 놀 수가 없어서 학교를 갔습니다. 선생님께 죽을 만큼 혼날줄 알았는데 전혀 혼나지 않았습니다.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가정 방문은 물론 없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학교 성적으로 인해 저는 두 달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어도 누구 하나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었던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존재감을 심어 주신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과 같은 삶의 정황에 있는 저에게 ‘너는 나의 보배고, 존귀한 자이고, 나의 영광이라고’ ‘너는 나에게 천하보다 귀한 존재’ 라고 말씀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공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존재감을 그렇게 크게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저는 길을 가면서도 울었습니다. 부대에서 보초를 서면서도 울었습니다. 저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시는 분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목회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은 저에게 있어서 저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한 최선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신 분이 또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님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시면서 제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날들을 철야로 기도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잘나지 못한 아들이지만 어디에 가든지 제가 당신의 아들임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대형 교회를 이끄는 목회도 아닌데 저의 어머니는 언제나 저를 최고의 목회자로 믿고 격려하며 저의 존재감을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아들에 대한 자긍심은 저로 하여금 존재감을 갖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저의 모습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에게 존재감을 심어준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저의 아내입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제가 책을 제대로 읽으며 공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2학년 후반기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저의 약점을 알고 있기에 언젠가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면 대단했을 텐데’라고 말을 할 때 저의 자존감과 존재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 줄을 알면서도 기꺼이 동의하며 남편으로서의 존재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저 개인에게 존재감과 관련해서 바램이 있다면 제가 목회의 현장에서 떠나는 때, 제가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때에 저와 함께 신앙생활 했던 성도 여러분들로부터 ‘당신은 참 좋은 목사였습니다’ 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저는 참으로 행복한 목사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저의 아들들이 저를 향해 ‘아빠는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아빠였습니다. 아빠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감을 가지고 산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너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다. 너는 내 아들 예수와 생명을 맞바꿀 만큼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가정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과 존재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있는 그대로 보배로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부부는 서로에게서,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서 소중함을 깨닫고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함께 나눠드린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찬양을 불러 보겠습니다. 옆 사람들과 함께 한 번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한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나 자신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 그리고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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