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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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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 (마 5:1-4)  

 
새해 벽두에 우리는 산상수훈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을 읽다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세상이 하찮다고 무시하는 것을 예수님은 존중해주십니다. 
세상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만 해도 그렇지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어떻게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겠습니까? 
웃고 즐기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 참 복도 많네! 어떻게 저렇게 웃고 살까?’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가치 충돌이지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울지 않아도 될 일로 말미암아 울고 있으며, 울어야 할 일에는 오히려 울지 않는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애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1. 자기 자신의 죄의 문제로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깨끗하심과 맑음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자신이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주님은 애통이라고 하셨습니다.

Dr, Pierson은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통이란 우리가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느끼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 있다고 느꼈을 때 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내세우는 도덕성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의로움이 얼마나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애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삼하 11-12장에는 여러분이 잘 아는 얘기가 나옵니다. 
좀 얘기가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암몬자손과 싸울 때의 일입니다. 
다윗왕은 부하들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해가 기울자 시원한 바람을 쐬러 왕궁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높은 곳에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태가 하도 고와 왕은 그 여인을 불러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왕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 달 정도 지나 그 여인으로부터 전갈이 왔는데 임신을 했다는 거예요! 
문제가 커지고 만 것입니다. 
왕의 부정에 대한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자신의 부정을 숨기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방법이 있겠어요? 
다윗은 아주 지혜롭게도 전쟁터에 나가 있는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급히 불러 그의 아내와 잠자리를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지금처럼 DNA검사를 할 것도 아니고, 그래 놓으면 누구 아인지 알게 뭡니까? 
그런데 우리아는 왕의 속도 모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삼하 11:11절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때문에!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전우들에 대한 의리 때문에! 
도저히 자기 양심으로는 따뜻한 밥을 먹고, 아내와 더불어 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 근처에도 가지 않고, 바깥에서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새벽에 전쟁터도 달려갔습니다. 
다윗왕이 얼마나 속이 탔겠습니까? 

얘기도 못하고! 
다윗왕은 이 충성스러운 신하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받기보다는 더 무서운 흉계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죄는 더 무서운 죄를 낳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성령이 지적할 때 빨리 손들고 회개해야지 그 죄를 숨기려고 하다보면 더 무서운 죄를 낳습니다. 

다윗왕이 꾸민 흉계란, 우리아를 가장 위험한 전선에 내몰아 죽게 하고 남편이 없는 아내를 합법적으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왕은 밧세바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라고 얘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보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누가 보았을까요? 

하나님이셨습니다! 
삼하 11:27절에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책망합니다. 
성경 그대로를 읽겠습니다. 

삼하 12:7-9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하나님은 다 아셨습니다! 
너무도 자세히 아셨습니다! 
마음속의 흉계를 어쩌면 그렇게 훤히 아셨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알고 감쪽같이 합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의 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때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기 시작합니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밝은 빛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토해놓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이렇게 보답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또 어디 있을까?’ 
다윗은 며칠 몇 야를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뒹굴었습니다. 
얼마나 애통했던지 베개를 눈물로 적시고 침상을 눈물로 띄웠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애통 중에 드린 기도가 시편 51편입니다.
시 51(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시51편중의 몇 구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봅니다. 

“하나님 선한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나를 씻어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소서. 꺾여진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이렇게 눈물로 호소했던 것입니다! 

애통이란 다윗처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죄 좀 어떻게 해주소서.’라고 안타까워하는 마음,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니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사오리까?’라고 인정하는 마음, ‘나를 씻어 주소서,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은 없애주소서.’라고 무거운 양심의 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2. 애통이란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을 때 눈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이란,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아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만 내 자신이 스스로 갚지 않고 눈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Dr.Goulder의 분석을 따른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 7:1-2)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남을 평가한다는 말에는 ‘비판’과 ‘비난’이 있습니다. 
① ‘비판’이란 ‘검토 평가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말에는 남을 세우기 위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② 그러나 ‘비난’이란 ‘남의 잘못이나 흠을 책잡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남을 깎아 내리기 위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7장의 ‘비판’이란 말은 ‘비난’이란 뜻이 더 강합니다.

1) 왜 사람들이 남을 비난할까를 생각해봅니다.

① 사람들은 흔히 남을 비난하여 깎아내리면 상대적으로 자기가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착각이지요! 
선거철에 보십시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봉사하겠다.’ 하면 됐지 왜 상대 후보에 대하여 흑색선전을 합니까? 
그것은 상대후보를 깎아내리면 자연히 자기가 올라가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난은 열등감의 소산이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에 대하여 많이 비난할 경우에 그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부생활에 대하여 많이 비난할 경우에 그 사람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윤리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댈 경우에 그 사람의 윤리 생활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결점, 약점을 보상하려는 심리적 동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② 비난을 하게 되면 너무 재미있어서 하면 할수록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체험해봐서 알지요! 
남을 칭찬할 때에는 10~20분을 넘기기 힘듭니다. 
한마디만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남의 약점을 들춰내고, 실수를 지적하고, 남을 비난할 때에는 1~2시간이 모자랍니다. 
왜 그렇게 호기심이 발동하고 재미있는지…. 
‘쯔쯔’ 혀를 차며 안타까운 척 하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재미있고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아세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큰 사건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gossip으로 망한다.’ 
“그렇대”, “그렇다는구먼.” 하는 소곤거림으로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교우들의 마음이 갈리고, 이렇게 해서 교회가 큰 시험을 받습니다.

③ 비난이 습관화 되면 비난 중독증에 걸려 비난거리를 찾아 나서거나 급기야 비난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자세히 관찰해보세요! 
어떤 말이 돌 때마다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끼던 사람이 또 끼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왜 그럴까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난중독증에 걸린 것입니다.

‘하수구 같은 사람이 있고, 바다 같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수구 같은 사람이란, 하수구를 보면 갖가지 오물이 다 나옵니다. 
꽁치대가리, 머리카락, 밥알, 김치 쉰 것........
이렇게 들어가는 대로 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면, 바다 같은 사람이란, 바다는 그 모든 하숫물을 조용히 다 받아서 정화시킵니다. 
어떤 분은 별소리를 다 듣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좋은 말,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만 나옵니다.

2) 그러면 좋은 비판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잠깐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비판이란, 비난과 다르게 남을 세우기 위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기능을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독재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면 어떻게 민주주의를 창출할 수 있었겠습니까?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좋은 비판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세우고 공동체를 발전시킵니다.
인간관계에서 좋은 비판을 하자면,

① 개인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담임목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를 뜯어보니 편지에는, 뜻밖에도 ‘주기도문’만 쓰여 있고 다른 내용은 아무것도 없어요.
‘참 이상하다. 점잖은 분이 사람을 놀리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며’자에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 목사님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나라이 임하옵시(고)’가 습관이 됐어요! 
‘이것을 고쳐주려고 편지를 했구나.’ 
지혜롭지요! 
개인적으로 잘못을 지적해야 합니다.

② 자신을 먼저 비판하고 남을 비판해야 합니다. 
마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사람은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진 결점과 흠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날 때 쉽게 발견하고, 비난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결점이 없으면 십중팔구 그냥 지나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결점이 내 눈에 보이면, 그 결점이 나에게도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게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것이 보인다는 것이지요! 
남이 교만해보이면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남이 잘난 척 하는 것이 보이면 내가 잘난 척 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남이 인색해 보이면 내가 인색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③ 기도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권면은 없습니다. 
최선의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주는 보다 더 좋은 권면은 없습니다.
이렇게 비난을 받아 마음이 쓰라리지만 내가 직접 대적하지 않고 눈물어린 눈동자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란 ① 지은 죄의 문제로 슬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②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고 내가 직접 대적하지 않고 눈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위로가 늘 넘치는 삶이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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