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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시 139: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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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시 139:7-18)

  
먼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이죠.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본문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①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렘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지난 주간 끔찍한 사건이 있었죠. 경찰 간부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그랬다는데,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감시 카메라는 의식했는지, 헬멧을 쓰고 범행을 했습니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마구 욕했습니다. 한참 욕을 해대고 있는데,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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