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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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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마 5:38-48)
   

초대교회를 지나 중세로 접어들기 전에 사막의 교부들이 활동할 때가 있었습니다.  ‘세라피온 압바’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인근의 알렉산드리아 시에 갔다가 몸씨 추운 날 벌거벗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죽게 된다면, 나는 살인자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세라피온은 입고 있는 수도복을 그 거지에게 벗어주었습니다.  이제 세라피온이 벌거벗었습니다.  벌거벗게 된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팔 아래에 꼭 껴안고 있는 신약의 복음서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 하나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수도사 세라피온을 보고 물었습니다.  “세라피온 압바, 어떤 놈이 압바의 옷을 빼앗아 갔습니까?”  세라피온은 신약 복음서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일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이 벗어주라고 해서 벗어주었다는 말이었습니다.  갈 길을 계속 재촉하고 있었는데, 한 곳에서 빚을 갚지 못하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세라피온은 복음서를 그에게 주어버렸습니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성경 필사본은 값비싼 책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옷도 성경도 없이 추위에 떨면서 암자로 돌아온 그에게 제자들이 “선생님, 수도복은 어쩌고, 맨몸으로 들어오셨느냐” 고 물었습니다.  세라피온은 “나보다 그 옷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애지중지하여 끼고 다니는 성경은요”  세라피온 압바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너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19:21)고 날마다 말씀하시는 바로 그것을 팔아치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꿈같은 이야기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제가 율법 토라를 일곱 번 꿰뚫어 읽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그러면 토라는 너를 몇 번이나 꿰뚫어 읽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성경을 잘 해석하는 순간은 성경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해석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에게 말씀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어합니다.  “제발이지 제가 들어도 괞찮은 말씀만 주세요.  행여라도 저를 힘들게 할 수 있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되새김질 하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째로 집어 삼키고 하나하나 꺼내어 되새김질 하면서 묵상하며, 나에게 주시는 영의 양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시면, “살아 있는 성경이 되기 위함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살아 있는 성경이 되기 위함입니다.”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단계에서 성경 말씀이 나를 읽어가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우리 주님의 온전하신 형상에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은 제가 목사 되어 가장 기피한 본문, 기피했다고 하기보다는 정말 설교하기 어려운 본문이 있었다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담대하게 말씀드리기 참으로 곤욕스러운 시간입니다.   “목사님, 왜 설교하기 어렵다고 하십니까?  본문이 난해하여 해석하기가 어렵습니까?”라고 하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 어렵습니까?”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설교하기가 어렵다고 하십니까?”  “예, 먼저 제가 오늘의 말씀처럼 살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자칫하면 허공이나 메아리칠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목사, 너는 왜 너 말하기 좋은 말씀만 택하고 말하기 어려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예,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된 대로 선포만 하겠습니다.”라고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말씀 위에 실어놓고 말씀을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주님의 장성하신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38-42절의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또는 보복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43-48절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탈리오의 법칙’ 동해복수법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한쪽 눈을 상하게 하였으면 분한 나머지 그의 두 눈을 상하게 하고 싶은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복수하는 것을 금하시고 똑같은 방법과 형태로,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게 복수하라고 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율법은 고대 근동사회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보편적인 법률이었습니다.  

고대의 바벨론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었는데, 총 282조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율법과 비슷한 내용이 있으나,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195조에 “아들이 자기의 아버지를 때렸으면, 그의 손을 자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더 엄격합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패역한 자식이 있으면 성문으로 끌고 가고 백성들이 돌을 들어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196를 보면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으면, 그의 눈을 뺀다.”고 했습니다.  

1.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38-42)

우리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맞서지 말라, 악한 자의 행동처럼 똑 같은 행동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을 갚아야 합니다.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점점 더 악의 사슬에 얽매이게 될 뿐입니다.  보복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계속하여 4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씀은 이상향이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참으로 실천하기에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1)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오른쪽 뺨을 치는 사람에게 나도 그의 오른쪽 뺨을 쳐야 마땅한데, 우리 주님은 ‘왼쪽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맞대응하지 말고, 더 때리면 맞으라고 하십니다.   나는 일방적으로 맞아야 하고, 상대는 계속 때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이런 역설적인 교훈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평범한 논리를 가지고는 영원한 진리를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역설적인 교훈에 생명의 양식을 담고 있습니다. 

2)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서는 “네 겉 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6:29)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도 내어주고,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내어주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무엇을 어쩌라는 말입니까?  ‘나는 벌거벗고 다녀도 좋다’, ‘그래 다 가져가라’고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가난하고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3)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이 말씀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군인들이 출전할 때에 민간인을 징용하여 짐을 운반하려고 하면 1마일 정도 약 5리 정도는 운반해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성인들이 걷는 도보로 약 1000보의 거리를 운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고 하십니다.  오 리를 간다면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십 리를 가주라는 역설적인 말씀에 영원한 진리, 생명의 진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4)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어떤 사람이 와서 돈을 달라는 하면 그냥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와서 돈을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꾸는 사람이 아니고, 꾸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교훈의 말씀을 주시면서 4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 같이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이웃에게 대하여 열린 마음의 자세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태도가 더 나은 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으로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열린 자세로 만나야겠습니다. 
두 번째 큰 단락으로 43-48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43절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최고의 말씀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웃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보이지 않습니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을 보면 구약의 말씀에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과 유전에 보이는 것으로, 율법을 잘 준수하고, 하나님의 명령인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아니하고 율법을 저버릴 때에,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하여 율법에 보호막을 치고 울타리를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규례에 또 규례를 더하면서 율법이 은혜가 아닌 공로로 변질되고, 랍비들이 제정한 소소한 규례가 더 엄한 율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같은 선민 유대인 간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원수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이라는 사람은 같은 민족으로만 보고,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44절에서 우리 주님의 사랑은 절정을 이룹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구절은 당시에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을 완전히 철폐하시고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아가파오’라고 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기복이 심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하는 것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최후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우리들에게 무슨 원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44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눅23:34에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우리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에게 햇빛을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고 있습니다.  나는 당연히 햇빛을 받아야 할 사람이고, 비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알기에 문제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를 포함시켜주시는 것을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으시고 꾸준하시고 의로운 자,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은혜를 내려주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 나를 인정해주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46)  사실 세리들은 멸시와 천대의 상징이요, 죄인의 반열에서 선두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창녀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47)  사람이 그의 절친한 친구만을 사랑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잘 아는 사람, 좋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 자기를 알아주고 높여주는 사람만 인사한다면 그것을 불신사회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수년간 교도소생활을 마치고 만기출소에서 감옥 문을 나서는 날, 그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평생 사기 치는 것뿐이었으니, 누가 그의 출감을 반겨주겠습니까?  그런데 꼬마 하나가 달려와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그의 품에 안겨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꼬마에게 "얘야, 난 너 같은 손자가 없단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로구나!"하고, 그 품에 안겼던 아이를 놓아주었습니다. 

그 때, 젊은 부부가 다가와서 "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젊은 부부에게 “누구십니까?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난 가족이 없는 사람입니다”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김순임 씨를 아시지요? 김순임씨”하고 물었습니다.   김 순임 씨는 할아버지가 30년 전에 1년 간 동거한 적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 아들이 자라서 손자를 낳아 가지고, 교도소를 나서는 아버지를 맞이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오기만 해봐라. 그 즉시 죽이겠다 굳게 결심하고 칼도 준비해놨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 하다가 목사님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아버지를 마중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평생 맛보지 못한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자기 집에 모시고 갔습니다.   

여러분, 원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사는 것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운 감정을 가지고 살면 그 미운 마음이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칼날이 되고 맙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미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있습니다.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의 목표입니다.  신앙의 고지는 지금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에 점령하지는 못하여도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고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면, 고지는 점령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당장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천국 가는 길에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우리 주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나의 것을 내어주면서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처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기를 살아 있는 성경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주인이 되시므로, 우리 모두 작은 예수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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