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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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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1-12) 
 

1. 믿음, 믿음, 믿음!

세 번에 걸쳐서 “믿음”이라는 주제로 설교하기로 하고 오늘이 그 마지막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에 나오는 <탕자 비유> 혹은 <두 아들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영어성경은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But when he came to himself(KJV)/ his senses(NIV))’, 즉 ‘자신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그 전까지는 자신을 몰랐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비로소 자신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외국으로 간 둘째 아들은 거기서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으로서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동물인 돼지를 치는 직업을 택했으나, 설상가상으로 돼지 사료조차도 먹을 수 없을 만큼 궁색해졌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실패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실패의 자리가 그로 하여금 자신을 바로 알게 만들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보다 자신의 재산을 더 사랑하는 줄 알면서, 또 자신의 피땀이 녹아있는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주셨던 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라도 돌아가면 자신을 받아줄 그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자신을 알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 그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나’라는 실체를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인생의 새로운 여정인 신앙의 길입니다. 

두 번째로, 지난주일은 두 가지 “참된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참된 믿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 즉 원래의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거나 혹은 세상이나 사람들에 의해 변화된 예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교단마다 가르치고 전하는 예수님이 조금씩 달라보이지 않습니까? 교회마다 다른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교인들마다 다 다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으로,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은 말씀과 표적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을 통하여 자신을 바로 알기를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표적이 가리키는 것보다 표적 그 자체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요한복음 4장 48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가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가 아니라, 어떤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예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 자신들을 만족시켜 주는 예수였기 때문이었음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신앙의 두 번째 모습은 말씀 신앙입니다. 

가나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온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탁을 듣고 자신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아들, 아니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아들을 위해 예수님이 직접 가셔서 그 아이 위에 손을 얹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명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그가 표적이나 어떤 물리적인 변화 등 可視的인 증거가 없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갔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말씀만을 붙드는 신앙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기록된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세 번째 설교인 오늘은 “역사하는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1) 갈라디아서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더불어 주님의 복음을 분명하게 설명한 서신서입니다. 로마서가 복음을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해설했다면, 갈라디아서는 “변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증적”이라는 말은 이단에 맞서서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고 그들의 문제를 지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에는 율법주의 이단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만 믿어서는 안 되고,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율법주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운명의 굴레, 혹은 운명의 덫처럼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라고 해도 유대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유대 신자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들에게도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쳤고, 심지어 할례 받을 것까지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율법을 뛰어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이나 과거에 매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성도의 자유란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자유를 뜻합니다. 

2) 갈라디아서 5장 1절~12절

바울은 1장부터 4장까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에 대해 말한 뒤, 5장과 6장에서는 ‘자유자로서의 실제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적인 해설에 이어서 실제적인 지침에 해당하는 것이고, 1절은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란 율법의 종으로서 짊어졌던 멍에를 가리킵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약 시대, 곧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은 ‘율법의 정죄, 율법의 공포, 율법의 형벌’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습니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율법이었기 때문이고, 또 율법을 알면 알수록 절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은 그 멍에를 제거하셨고, 믿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일 필요도,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어진 것이죠. 왜요?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 하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굳게 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두 갈래 길에 서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할례를 받을 것인가?’ ‘은혜 안에 거할 것인가, 아니면 은혜 위에 율법을 더할 것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더할 것인가?’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육체를 따라 살 것인가?’ 바울은 이 둘 갈래 길에 서서 혼란스러워 하는 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킴으로, 할례를 받음으로, 즉 육체의 행위를 따라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례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속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5절과 6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割禮나 無割禮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원어 성경에는 5절과 6절 각각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가 의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7절부터 9절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은 후 신앙생활을 잘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교리에 미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던 자리에서 복음을 무색하게 만드는 잘못된 교훈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교훈은 ‘누룩’과도 같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잘못된 교훈은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누룩과도 같은 異端 邪說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아주 단호합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 비록 이단이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왔고 그로 인해 이탈이 잠시 있었지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라면, 결국 바른 복음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바울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었습니다. ‘바른 복음을 전한다는 바울은 왜 그렇게 힘든 삶을 사는가? 왜 그는 고난을 당하는가? 왜 그는 사람들로부터 미음을 받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11,12절에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고 바른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주로 핍박은 유대인들이 준 것인데,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것을 전하는데 핍박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 때문에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서의 할례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는 자라면 할례의 무익함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곡식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복음과 신앙을 혼잡하게 만들고 있던 거짓 교사들은 반드시 주님의 교회에서 끊어질 것이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5장 1절부터 12절을 정리해 볼까요? 요점은 이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말라!” 만약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필요 없으며,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에 반대되는 교리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할례냐, 그리스도냐?’ ‘율법이냐, 은혜냐?’ ‘행위로냐, 믿음으로냐?’ ‘육체를 따라서냐, 성령으로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에 필요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뭔가를 해야만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아주 위험합니다. 왜요? 복음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구원론의 문제보다 기독론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이나 행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부족한 분으로, 완전하지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탄광촌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무디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디가 한 광부에게 구원에 대해 설명하자 그 말을 들은 광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구원이라는 게 너무 싼 거군요. 그래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너무 싸단 말입니다. 그렇게 좋은 거라면 많은 값을 지불해서 사야 하지 않습니까?” 무디는 광부의 말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오늘 당신은 갱에 들어가셨지요?” 광부가 대답했습니다. “네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깊이 내려갔습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는 광부가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수백 피트 쯤 되지요.” 다시 무디가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깊이 내려갈 수 있었습니까?” 광부가 웃으면 말했습니다. “내려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지요.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럼 내려가기 위해서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요, 회사에서 이미 승강기를 설치해 놓았지요. 그래서 저는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무디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회사에서 설치해 놓은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의 버튼만 누르면 되는 것이지요.” 그제서야 광부는 무디의 말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금과 나중의 복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 중에서 6절,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은?

이상이 갈라디아서 5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즉 주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율법이나, 할례나, 그 어떤 행위, 혹은 갖추어야 할 조건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유일하게 ‘하나’, 마치 조건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즉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지만, 오직 하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맨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반납입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위하여 율법이나 할례나 행위가 필요치 않으나, 구원받은 자에게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믿음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당수의 교인들이 구원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 그 이후에 따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잘못되었습니다. 받은 바 주님의 사랑, 얻은 구원에 대해 사랑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두 썬다싱』이라는 책에 보면, 인도의 성자 썬다싱이 소개한 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젊은이가 도박을 했습니다. 도박을 한 사람은 오백 루피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이 그 나라의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박을 하다가 적발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한 명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부잣집 아들은 즉시 오백 루피의 벌금을 내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들은 벌금을 내지 못하여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갇혀있는 아들의 벌금을 물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돌에 손을 찍히기도 하고 베이기도 하여 피가 흘렀습니다. 감옥 창문을 통하여 면회 온 어머니의 손을 본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손에 난 그 상처들은 무엇인가요? 손가락에 흐르는 그 피는 또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너를 구하려고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단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힘들여 일한 대가로 오백 루피를 마련해 아들을 감옥에서 구해냈습니다. 그러고 얼마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부자 젊은이가 그를 불러 다시 도박을 하자고 꾀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거라네. 자네는 쉽게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나는 어머니의 눈물과 땀, 어머니의 상처와 피 덕에 풀려났지 않았나? 어머니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준 이런 도박을 앞으로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희생이 그 젊은이를 새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여러분을 새사람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새사람의 특징은 믿음과 행함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는 이 둘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면서 같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이 죽은 것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행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선한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받은 바 구원과 그 은혜에 감사하여, 사랑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실입니다. 

성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박사가 어느 흑인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한 부인이 일어나 “신앙이란 참 좋은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받은 안위가 얼마나 큰가!”라는 주제로 간증을 했습니다. 이에 바클레이 박사는 “참, 좋습니다”라고 말한 후, “그런데 실행하는 면에서는 어떻습니까? 부인은 남편을 위해 보다 좋은 음식을 준비하게 되었는지요? 가정에서 친절하고 어진 분이 되었는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클레이 박사의 뒤에서 “목사님, 묻는 것 좀 그만 두어 주세요, 그는 제 아내입니다”라고 간절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그 교회 담임 교역자의 소리였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아내의 말과 행동이 실제로는 달랐던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신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신앙으로 인하여 받는 하나님의 위로는 너무나 크고 놀랍습니다”라고 했지만, 실제 생활은 모범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간혹 성도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은 靑山流水와 같이 잘하지만, 그것이 生活化 되지 못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불신자들에게,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德을 세우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생활화 된 것을 말합니다.

3. 참 믿음의 사람이 되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모든 회개하는 죄인에게 외칠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할 것은 …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갈5:6)’을 존중히 여기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청교도 학자 리차드 백스터는 “사랑이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이 아니다. 사랑은 열매로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온 영혼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또한 사랑으로 歸結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허락된 구원에 감사하면서, 그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믿음, 세상과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믿음, 이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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