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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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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1-11) 
 
 
❚꿈의 종류

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한글사전에서 ‘꿈’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두 가지 의미가 나옵니다. 첫째,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처럼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느끼는 정신 현상.” 여러분도 어젯밤 주무시면서 이 꿈을 꾸셨지요? 좋은 꿈 꾸셨습니까? 둘째, “실현시키고 싶은 바람이나 이상.” 사람은 누구나 이 꿈을 꾸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부터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 함께 나누려는 말씀은 바로 이 후자, 즉 “실현시키고 싶은 바람이나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꿈’입니다. 그런데 이 ‘꿈’ 역시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루어지는 꿈’이고 또 하나는 ‘허황된 꿈’입니다. 전자는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꿈을 뜻합니다. 후자는 도저히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허황된 꿈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허황된 꿈을 일컬어 ‘개꿈’이라고 합니다. 이 ‘개꿈, 허황된 꿈’과는 반대로 가능한 꿈,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을 다른 말로는 ‘비전’(vision)이라고 합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보다’는 뜻을 가진 ‘비지오’(visio)에서 나왔습니다. 텔레비전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지요. 뭔가를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란 이런 뜻이 됩니다. 꿈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현실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허황된 꿈, 실현 불가능한 개꿈이 아니라 정말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다”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비전을 크게 가져라!” 무슨 일을 하든지 비전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분야에서 어떤 꿈을 꾸고 또 이룰 것인가? 같은 일을 해도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오늘 하루도 밥 안 굶게 해달라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게 해달라는 정도겠지요. 

하지만 같은 일을 해도 분명한 꿈을 꾸며 비전을 품고 내가 이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진 사람은 정말 다릅니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을 택하여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꿈꾸는 사람들, 즉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환경이나 조건이 남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이나 재능이 남들보다 더 뛰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경도 남들보다 나쁘고 능력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꾸는 꿈, 즉 비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고, 자신의 위대한 비전을 하나님 안에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대한 사람들’로 기억합니다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위대한 사람’보다 ‘위대한 꿈을 꾼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오늘부터 네 주에 걸쳐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비전의 인물 요셉에 대해 말씀을 나누면서 성도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꿈을 꾸고 비전을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새 성전 입당이라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새 성전과 더불어 우리 교회는 새 역사를 열어가려 합니다. 좋은 교회를 넘어서 위대한 교회로 새 시대를 열려 합니다. 이런 시점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요셉을 통해 위대한 비전을 배우고 함께 꿈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마다 그 사람의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형용사인데 이를테면 ‘참 좋은 사람’ ‘막돼먹은 사람’ ‘성질 급한 사람’ 등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성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지요. 나는 한 마디로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부터 살펴보려는 요셉이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이렇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 그만큼 요셉을 꿈을 많이 꾸고 또 그 꿈을 따라 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어린이 교회학교 공과에는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꿈쟁이 요셉.’ 이 말이 맞습니다. 요셉은 정말 꿈꾸는 사람, 꿈쟁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요셉이 꾼 두 번의 꿈에 대해 나옵니다. 요셉이 어디 꿈을 두 번만 꿨겠습니까만 그 중에 대표적인 꿈을 두 개만 소개한 것이겠지요. 첫 번째 꿈은 7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요셉이 묶은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은 자기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비록 서열로는, 혈육으로는 형들이 위지만 장차 자기가 가장 위가 되고 형들은 나를 섬겨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형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안 그래도 3절부터 보면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 중에서 이 요셉만 편애해서 형들은 아주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는데 말이지요. 야곱이 요셉만 편애한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3절에는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디 늦둥이는 각별하게 정이 가는 법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까닭은 요셉이 바로 야곱이 그토록 사랑한 라헬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내보다 사랑한 아내가 낳은 자식이요 노년에 얻은 늦둥이니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게다가 나중에 하는 행동을 보면 요셉은 틀림없이 늙은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자,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사랑하는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줍니다. 채색옷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때때옷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긴 소매가 달린 옷이나 복사뼈까지 닿는 긴 옷을 뜻합니다.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아주 값비싼 명품 옷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형들은 시장에서 파는 만 원짜리 옷 사주고 요셉만 수십 만 원짜리 명품 옷을 사준 셈입니다. 그러니 형들이 얼마나 시기가 나고 화가 났겠습니까?

그런데 불난 데 부채질 하듯 요셉이 자기 곡식 단에다가 형들의 곡식 단이 절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더 화가 났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두 번째 꿈은 한 술 더 떠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더라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란 아버지와 어머니를 뜻하고 열한 별은 형제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아예 부모와 형제들 모두가 자신에게 절했다는 뜻입니다. 앞선 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형들만 분노하고 미워하더니 이번의 꿈 이야기 때문에 요셉을 그토록 편애하던 아버지 야곱조차 아들을 꾸짖습니다.

결국 형들의 분노가 도를 넘어 요셉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게 됩니다. 시기, 질투, 분노가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뒤에 12절부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가서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말입니다. 요셉은 성실한 성품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요셉이 들에서 방황하면서 형들을 열심히 찾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도단이라는 곳에 있는 형들을 천신만고 끝에 찾게 되는데 멀리서 오는 요셉을 보고 형들이 하는 말이 19절에 나옵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참 인상적인 말입니다. 요셉을 뭐라고 부릅니까? ‘꿈꾸는 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말은 칭찬이 아닙니다. 비꼬는 말입니다. “야, 저기 만날 꿈이나 꾸는 꿈쟁이가 온다”라고 비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이 명칭은 바로 요셉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형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요셉은 꿈을 잘 꾸는 소년이었습니다. 언제나 꿈을 꾸고,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꿈을 좇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꿈꾸는 자의 두 가지 특징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꿈꾸는 자, 즉 비전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의 특징을 두 가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꿈꾸는 자는 단순합니다. 오늘 요셉의 모습을 보면 좀 이상한 점이 몇 가지 발견됩니다. 먼저 2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자질 한 것이지요.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요셉의 유일한 단점이다.” 실제로 이 사실 외에 성경은 요셉의 그 어떤 단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 가장 흠 없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성경이 이것을 요셉의 단점이라고 말한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형들이 양을 치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자기들끼리 양을 잡아먹고 맹수가 물고 갔다고 거짓말 할 수도 있고, 게을러서 양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고는 그 채색옷을 찢어 숫염소의 피를 적시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 하는 장면(31~33절)을 보면 형들은 평상시에도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속였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요셉처럼 이런 상황을 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입 다물지요. 괜히 형들에게 미움 받아봐야 좋을 것 없지 않습니까? 특히 4형제의 막내로 자라 눈치가 극도로 발달한 저는 절대 그런 손해 볼 짓 안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눈치가 빨라서 말 안 하는 것이 과연 옳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일들을 살펴보면 요셉은 결코 형들을 야단맞게 하려고 이를 사람은 아닙니다. 따라서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정말 어리석으리만치 그가 단순하고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같으면 형들이 나를 미워하는 줄 뻔히 알면서 그런 꿈을 꾸면 형들에게 그대로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하지만 요셉이 두 번이나 자신이 꾼 꿈을 그대로 전한 것은 요셉이 그만큼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눈치도 없고 잔머리도 못 쓰는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요셉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이렇게 순수(pure)하고 단순(simple)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너무 계산이 빠릅니다. 이것이 옳고 그르냐의 기준이 아니라 이것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기준으로만 판단합니다. 머릿속의 계산기가 너무 빨리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위 ‘눈치’라는 말로 포장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늘 생각이 복잡하고 세속적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 같은 사람을 이렇게 비웃지요. “어수룩한 사람, 눈치 없는 사람, 손해 보고 사는 바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단순한 사람, 그래서 손해도 보는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시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산이 빠른 사람, 특별히 손익계산이 빠른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주저합니다. 계산부터 합니다. 그리고 자기 계산에 안 맞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셉처럼 단순해서 순진한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무조건 순종합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느냐 아니냐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길을 묵묵히 갑니다. 이익 손해 안 따집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도 늘 묵묵히, 어떤 시련과 배반을 당해도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을 것이라 믿고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자신조차 하나님이 쓰시기에 너무 닳고 닳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너무 계산이 빠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야, 나 손해 안 봤다” 하며 뿌듯해 합니다. 우직하게 순종하다 어려움도 당하고(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다룹니다) 손해도 보는 사람들을 바보같다, 어리석다 비웃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는 너무 머리가 좋고 계산이 빠르지 않습니까? 너무 세상에서 닳고 닳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단순화 시키십시오. 생각을 단순화 시키십시오. 결정도 단순하게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편리하게 쓰십니다.

둘째, 꿈꾸는 자는 성실합니다. 요셉이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안 나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할 때도, 또 감옥에 갇혔을 때도 윗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만 그가 성실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요셉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행동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틴에이저, 청소년입니다. 여러분, 요즘 청소년들에게 심부름 시켜보셨습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다른 집은 몰라도 저희 집 두 아들은 심부름 한 번 시키려면 참 힘듭니다. 꼭 상전 모시는 것 같이 사정을 해야 겨우 들어줍니다. 요셉도 사춘기 시절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갔는데 못 찾으면 쉽게 포기할 만도 한데 끝까지 찾아 나섭니다. 아버지가 시킨다고 형들을 찾아 척박한 광야에서 그토록 헤맨 이 17세 청소년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우직하리만치 성실한 친구입니다. 눈치도 요령도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시키니까 “예”하고 찾을 때까지 헤맵니다. 

이런 우직함이, 이런 성실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도 우직하게 믿게 한 것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애굽 보디발 집에 노예로 팔려갔어도, 또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갔어도 그는 참으로 단순하고 우직합니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시킨 일을 그토록 우직하게 끝까지 해낸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뜻이 있어 보내신 줄 믿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련에도, 그 어떤 미움과 모함에도 배신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 그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꾼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때 꾸게 하신 그 꿈이, 언젠가 형제들과 부모와 모든 사람이 내게 절하는 날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을 붙잡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실성을 지녀야 합니다. 

단순히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그런 성실성 말고 목적이 분명한 성실성입니다. 왜 내가 성실해야 합니까?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내게서 이루고자 하시는 꿈이 있음을 믿고 그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나의 비전으로 붙잡고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성실히 살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성실과 하나님을 위한 성실, 비전을 위한 성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성실성과 비전을 가진 사람의 성실성의 차이입니다.

❚꿈이 있다면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디 꿈이라는 것이 요셉 같은 17세 소년에게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런 오해를 합니다.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내 상황이 지금 어떤데?” 꿈이란 게 소년 소녀들이 꾸고 젊은이나 꾸는 것인 줄 압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합니다. 꿈은, 비전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고 환경이나 조건과도 상관없이 살아있는 사람은 다 꾸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은 생명이 있는 한은 그 꿈을 포기하지 말고 꾸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도 옛날에는 꿈이 있었지” 하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나도 한 때는 큰 꿈을 꾸었지”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가 꾸는 꿈이 무엇인지, 또 꾸어야 할 꿈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사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처럼 오늘도 우리는 아직 잡지 않았지만 그 꿈을 향해 달려가는 영원한 소년 소녀여야 합니다. 잠언 29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란 ‘계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계시, 꿈, 비전이 없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방자하게 행한다고 했습니다. 자제력 없이 제멋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아니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아닌 개꿈, 허황된 세상적인 꿈, 인간적인 꿈만 좇는 사람은 이렇게 제멋대로 방자하게 살게 됩니다. 꿈을 위해 요셉처럼 절제하고 자신을 잘 지키며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조금만 출세하고 유명해지면 금세 딴 짓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꿈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꿈을 위해 요셉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이든 성실해야 합니다. 환경이나 조건을 탓하는 것은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내가 꾼 꿈이라면 쉽게 포기하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면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꿈과 비전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아니, 내 꿈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어떤 일을 이루기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꿈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깨닫고 믿고 나의 비전으로 삼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것을 본 사람입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요셉처럼 나를 향하신, 내 가정과 가족과 자녀들을 향하신,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알고 믿고 이루어가는 꿈꾸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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