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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언어생활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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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언어생활 (약 3:1-12) 
 
 
오늘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의 언어생활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절의 “선생 된 우리”라는 표현에는 야고보가 포함됩니다. 이 구절의 선생이 모든 가르치는 교사들을 뜻하지 않고 야고보처럼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는 직임을 감당하는 직분자로 제한됨을 알 수 있지요. 당시 유대 사회의 스승이었던 랍비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의 삶도 지도하는 귀한 존재로 생각되었습니다. 부모와 랍비가 동시에 위험에 빠지면 랍비부터 구하는 것을 옳게 여길 정도로 존중받았지요.

가르치는 자를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사를 보면, 밖으로는 핍박이 안으로는 잘못된 이단 사상들이 교회에 위협했던 상황에서, 교부들은 감독들의 권위를 존중하며 감독들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도록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이 교회를 보존하고 계승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직분을 귀하게 여기고 가르치는 자의 권위를 존중할 때 참 교육이 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목회도 일종의 직업처럼 생각해서 일정한 기간 공부하고 자격증을 얻어 영업하려는 그릇된 열망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주 신문 지상에 등장하는 목회자들의 비윤리성 때문에 목회 직분 자체가 경시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직분을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하려는 자세를 가르치는 자도 많이 잃어버렸고, 배우는 자도 가볍게 여기는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교회를 위한 참된 스승들을 세워 주시도록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때라 생각됩니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1b)는 말씀은 선생이 되는 사람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마도 선생이라는 직분에 매력을 느껴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대체로 랍비의 지위가 가진 권위와 명성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그가 받을 “더 큰 심판”을 주목하게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의 직분을 생각하도록 경고한 셈이지요.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헬라어 성경은 2절에 ‘왜냐하면’(가르)이라는 접속사가 있는데, 이를 살려서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많은 것들을 실수하기 때문이다”(2a)가 됩니다.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는 이유는 심판의 기준이 더 엄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말로 가르치는 직분의 특성상 말실수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유가 고작 ‘말실수’ 때문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2b)고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하는 것도 가능한 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에 따르면 성도의 언어 행위는 그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는데, 말은 그 속에 어떤 인격이 살고 있는지 알게 합니다. 말은 ‘고작’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야고보는 3절부터 말이 가진 엄청남 영향력과 파괴력을 설명해나갑니다.

먼저 말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두 가지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3-5a). 말(馬)과 큰 배를 움직이려 할 때 덩치 큰 그것 자체를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능숙한 기수는 작은 “재갈”을 통해 자기 뜻대로 말을 부립니다. 능숙한 사공 역시 “작은 키”를 조작해서 자기 뜻대로 큰 광풍을 해쳐나갑니다. 이처럼 선생은 “작은 지체”인 혀를 놀려서 몸 된 교회를 움직여 나갑니다. 그래서 “혀”는 작지만 그 영향력이 “큰 것을 자랑”하는 지체입니다.

선생의 혀가 바르게 사용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그 가르침에 제어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인도되며 바르게 성숙해 나갈 것입니다. 반면 큰 영향력 때문에 혀가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 파괴력 또한 큽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5b-6). 교회는 언제나 거짓 교사의 가르침 때문에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핍박은 육신의 생명만 빼앗았지만, 잘못된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치명적인 독이었습니다. 교회를 파괴했던 거짓 가르침들을 생각하면 혀는 참으로 “지옥 불에서” 왔다고 표현할 만합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몸 된 교회의 성격과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는 말씀을 더욱 마음에 새겨야 하겠지요. 말에 실수가 없도록 애써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말하는 수준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혀에 재갈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뜻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들어 섬기는 자세가 꼭 필요하겠지요.

목사가 교회의 공적인 교사이지만 성도는 누구나 교사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성경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라고 했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했습니다. 이 명령의 말씀들이 단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사명은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성도의 말 한마디에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말의 영향력은 교회의 교사일 때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문제아로 찍혀 있던 학생이 희망을 주는 담임의 말 한마디에 큰 용기를 얻고 삶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화가 나서 내뱉은 부모의 말 한마디가 자녀의 가슴에 못 박혀 일생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한 마디 말이 한 사람의 생애를 불타오르게도 하고, 한 마디 말이 한 사람의 생애를 불태워버리기도 하지요. 말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서 원수처럼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손으로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말로는 수많은 사람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말의 영향력을 알고 ‘고작 말 한마디 쯤’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즉흥적인 말 한마디가 교회 전체를 불사르는 고통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생각하고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한 마디의 말은 이제 짧은 시간에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이 한 인생에 치명상을 가하는 독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말조심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 벌레와 해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를 제어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7-8). 혀는 조절이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말을 잘 하는 방법에 대한 책자들이 많습니다. 그 책들을 다 읽어 부지런히 연습하면 혀를 길들일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력하면 길들일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할지라도 성도는 그럴 수 없다는 말씀을 인정해야 할 사람입니다. 성도의 참된 언어생활은 인간 스스로에게는 어떤 소망도 두지 않는 이 절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면 포기하고 적당히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성도다운 언어생활을 추구하도록, 온전함에 이르도록 가르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절망에서부터 시편 기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의존으로 나아갔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께 의존해서 성도다움을 추구해 나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자세입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온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예배 때는 감동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서, 예배 후 회의 때는 분노하며 “저주”하기도 하는 모습이 성도의 실상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되면 ‘찬송’(율로게오)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인간과 관련되면 ‘축복’으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존재는 사람을 향해서도 축복하는 존재라야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이것이 마땅치 아니”(10)함을 회개하고 다시 기도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성도의 올바른 언어생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되먹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9)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작품에 대해 저주하는 것은 그 작품을 만드신 분을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지요. 고대의 저주 문구는 오늘날에는 악담이나 욕으로 사용되는데,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악담이나 욕도 마땅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고까지 하셨습니다. 상대편이 모욕적인 악담과 욕을 퍼부을지라도 축복하고 기도해줄 수 있어야 성도답습니다.

언어생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끕니다. 참으로 은혜로 살고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포기해버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향해 힘써나가는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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