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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학자의 혀, 학자의 귀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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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혀, 학자의 귀 (사 50:4-9)
 
 
1. 말, 말, 말!

사람은 말을 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지요. 만약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톰 행크스(척 놀랜드 역)는 배구공을 대화의 상대로 삼았고(미국 영화 Cast Away, 2000), 교도소 독방에 갇힌 사람은 창가에 날아든 새를 대화의 상대로 삼은 것은 사람이란 누군가와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런데 그 말이 안 하니만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말이 아닌 무기가 될 수 있고, 得보다는 失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흠이라는 분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聖人은 부득이 해서 말을 했고, 賢者는 말해야 할 때 말을 했고, 후세의 儒者의 이름을 가진 자는 말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을 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부득이 해서 말을 하는 사람은 성자와 같고, 필요할 때 말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말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사람이 말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 해도 그 말이 때로는 필요 없는 말, 해로운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말이라는 것이 생각보다는 위력적이고 심지어는 파괴적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말들을 쏟아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떤 말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가 하면, 어떤 말은 남에게 상처만을 주기도 합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는 길을 가는 낯선 이를 미소 짓게 하지만,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언어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사람을 경악하게 만듭니다. 말하는 사람은 모래위에 글씨를 쓰듯 하지만, 듣는 사람은 쇠 철판에 글씨를 새기듯 들을 때가 있습니다.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는 모로코 속담처럼, 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혀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들은 귀는 천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는 말처럼 자신은 지나가는 말로 별 생각 없이 말했을지라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은 예리한 칼과 같기 때문에 조심스레 다루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왕하는 말, 정말 말을 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렇다 보니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부럽고,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은 더 부럽고, 말을 감동적으로 하는 사람은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말은 정말 뜻대로 잘 안 됩니다. ‘세상에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화살입니다. 한 번 쏜 화살은 정지하는 일없이 곧장 날아가 버립니다. 둘째는 기회, 혹은 시간입니다. 

지나가 버린 기회, 흘러간 시간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셋째는 말입니다. 말 역시 한 번 내뱉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데이 C. 셰퍼드란 사람이 쓴 <세 황금문>은 사람이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첫째 문은 “그것은 참말이냐?” 둘째 문은 “그것은 필요한 말이냐?” 그리고 마지막이고도 가장 좁은 문은 “그것은 친절한 말이냐?” 그리고 그는 “이 세 문을 지났다면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 말고 크게 외치라”고 권했습니다. 어떤 이는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는 金言을 삶의 지혜를 삼았고, “일언전십사(一言前十思)”, 즉 ‘한 마디의 말을 하기 전에 열 번 생각하라’는 격언을 언어생활의 원칙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이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혜롭고 효과적인 말쟁이들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지혜롭고 효과적인 말쟁이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2. 유익한 말, 덕스러운 말의 조건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고난 받으시고 승리하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6절에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원수들이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고 모욕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너무나 닮았지요? 그러기에 이 말씀을 예수님의 수난과 연결지어 ‘고난의 종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런 노래가 세 번 나오는데, 42장 1절부터 17절, 49장 1절부터 6절, 그리고 오늘 본문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학자의 혀와 귀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예수님 같은 언어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1) 학자의 혀

사실 성경에는 말, 즉 언어생활과 관련하여 “혀”에 대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에 보면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부드러운 혀는 뼈라도 꺾을 수 있지만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킨다”고 하는 등 여러 곳에서 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도 보면 이 혀의 중요성에 대한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이렇게 성경에 혀에 대한 말씀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혀에 관한 성경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 이사야서 6장입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신의 혀가 부정하다는 사실이었고, 그런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선지자의 소명을 주시기 전에 그의 입술을 먼저 정결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혀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사도행전 2장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모여 기도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데, 그때 그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방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방언이란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혀가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시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혀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혀부터 변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거짓말을 하는 혀였다면 이제는 진실을 말하는 혀로 변해야 하며, 이전에는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혀였다면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혀가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가시와 같았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성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어떤 혀가 나옵니까? “학자의 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학자의 혀야말로 그리스도인 모두가 가져야 할 혀입니다. 그렇다면 “학자의 혀”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하여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학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란 공부를 많이 해서 말을 잘 하는 사람, 말솜씨가 좋은 사람, 말재주가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학자라고 말을 다 잘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중, 어느 뉴스 채널에 나온 교수님 한 분이 리비아 사태에 대해서 뉴스 분석과 논평을 하시는데 말도 잘 못할뿐더러 원고를 보면서도 더듬거리는 것이 보는 사람이 답답하게 하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글을 읽으면 정말 그 깊이와 넓이와 감동이 남다른데, 강의는 왜 그렇게 졸리는지! 아마 여러분들도 한두 번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글도 잘 쓰시고 말도 잘 하는 학자들이 더 많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학자”는 히브리어로 ‘림무딤’인데, 이 말은 ‘가르치다’와 ‘가르침을 받다’는 반대되는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 조금 주의를 기울여 4절을 재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 즉 가르치는 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즉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배우는 제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말인즉슨 앞의 ‘학자’는 “혀”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뒤에 나오는 ‘학자’는 “귀”와 관련되어 가르침을 받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먼저 말하는 학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워 다른 사람을 가르쳐 진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진리를 가르치는 학자 혹은 학자의 혀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는 “학자의 혀”를 가지고 곤고한 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곤고한 자”란 ‘지친 자’를 뜻합니다. 성도는 학자의 혀를 가지고 선포하는 말씀으로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학자의 혀”는 공부를 많이 하고, 진실한 인격과 그 인격과 학식이 어우러진 말을 하고, 그리고 그 말에 따른 삶이 뒷받침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이 배우고 깊이 있게 배워서 그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권위, 그리고 그에 맞게 인격과 삶이 따르는 사람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학자”이고 그가 가진 “혀”를 “학자의 혀”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수없이 많은 말을 하며, 수많은 말들을 들으며 살아가지만,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그 말에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나 이웃들에게 도무지 유익이 없는 무익한 말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죠. 또 한마디 말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며, 사람들 사이에 금이 가게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점점 말이 거칠어져 가고 있습니다. 

가끔 길을 걷거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예쁜 여학생들이나 젊은 아가씨들이 옛날 같으면 뒷골목 폭력배들이나 쓸 그런 쌍소리를 거침없이 해대는 것을 들으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모임 가운데서도 거침없이 세상 사람들 간에 행해지는 저속한 말들과 욕설이 오고가는 것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폭력과도 같은 말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혀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학자의 혀를 받아서 언어로 말미암아 거칠어진 사람들과 이 사회와 공동체를 순화시키며, 말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피곤하고 지친 이웃들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며 치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곤고한 자”를 도와주는 “학자의 혀”입니다. 성도는 슬픈 자를 위로하고, 피곤한자에게 힘을 주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바른길을 안내하고, 지친 자에게 용기를 주는 학자의 혀를 가져야 합니다. 

얼마 전 미국 링컨센터에서 발레리나 ‘스테파니 바스토스’의 아주 특별한 발레 공연이 열렸습니다. 공연장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아주 특별한 공연을 한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공연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녀가 정상인이 아닌 ‘의족의 발레리나’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녀는 마이애미 뉴월드 스쿨을 졸업한 재원이었으나, 1995년 교통사고를 당해 발목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발레리나인 그녀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스토스의 곁에는 지혜로운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의족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딸에게 그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아, 네가 잃은 것은 오른쪽 발목 하나뿐이란다. 의족으로도 사람들에게 멋진 춤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습니다. 바스토스는 어머니의 이러한 격려와 도전에 용기를 얻어 힘차게 재기했습니다. 그리고 “의족의 발레리나”라는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이, 어머니의 지혜로운 혀가 그녀를 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학자의 혀”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두 번째 말하는 것이 이러한 “학자의 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2) 학자의 귀

본문은 계속해서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의 “학자의 귀”라는 표현은 앞의 “학자의 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혀로 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듣는 것부터 잘하라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잘 듣는 사람이 말을 잘 한다는 것이죠. 말하기 전에 먼저 귀가 열려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귀가 열려야만이 그 말문이 열립니다. 들을 귀가 열리지 않으면 말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영어 회화 교재를 보면, 거의 대부분 <듣고 따라 하기>, 즉 라는 난이 있습니다. 먼저 정확한 발음을 들어보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최근에 제가 경험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신학대학원에 장학금을 주러 갔다가 교수님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 중, 제가 ‘세속적’이라는 말을 영어로 “씨큘러”라고 했더니 한 교수님이 그 자리에서 제 발음을 고쳐주셨습니다. “쎄큘러”라고요. 그래서 저는 돌아와서 그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쎄큘러”가 맞더라고요. 그 다음, 현재 박사 과정 공부 중인 학교에서 5월 학기 강의 개요를 보내왔는데, 그 ‘강의 개요’를 제가 페이스 북에다 ‘실라버스’라고 올렸더니 다른 목사님들의 반응이 재미있었습니다. 

“발음 죽인다!”, “실라버스는 콜롬부스 동생이냐?” 그래서 이번에도 제가 정확한 발음을 모르고 있다 싶어서 그 발음을 한 번 들어보았더니 “씰러버스”가 맞더라고요.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죠? 잘 들어야 바로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말을 합니다. 즉, 말하는 법을 배울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그냥 말을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말하기를 배우고, 대화법을 배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여러분,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듣고 말하기’를 잘 합니다. 반면에 문제를 만드는 사람일수록 ‘말하고 듣기’ 파입니다. 즉 말부터 하고 그 다음에 겨우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여기 나오는 “학자”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남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듣는 사람, 먼저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훌륭한 제자만이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고, 훌륭한 학생만이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울 줄 모르는 사람, 배우기를 멈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훌륭한 학자의 혀를 가지려면 먼저 제자로서의 귀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입은 한 개만 만들어 주시고 귀는 두개를 만들어 주신 까닭은 듣기는 많이 하고 말하기는 적게 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듣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말하는 자가 되기 전에 먼저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학자가 되기 전에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제자는 일차적으로 누구의 제자입니까? 그리고 무엇을 배우는 제자입니까?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즉 스승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배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우리의 귀가 열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혀까지 변화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이 어느 정도까지 변화 시킵니까? 오늘 본문이 예언하는 장차 오실 고난의 종, 메시아이신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7).” 고난 앞에서도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고난을 가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호와로부터 들은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로부터 잘 들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학자, 아니라 성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며, 사람을 살리며, 나아가 한 가정과 사회와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말로서 말이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위대하며,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위대함을 자기 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마저 아버지가 가족처럼 사랑하던 자기 영지 내의 농노들로부터 끔찍하게 살해되는 것을 지켜본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과 사회에 대해서 비뚤어진 그 소년은 그 후 친구들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황제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사람과 사회를 버렸고, 사회도 그를 버린 것이죠. 이렇게 그는 어릴 때부터 상처와 아픔과 분노로 빗나가기 시작하여 결국 사형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형수들을 싣고 가는 열차가 어느 간이역에 잠시 멈췄을 때, 어떤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예수 믿으라’는 말과 함께 작은 책 한 권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이었습니다. 뻬뜨로 빠블롭스끄 요새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다가, 문득 그 부인이 ‘예수 믿으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그녀가 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입니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형 직전에 기적적으로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위대한 삶을 살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름 없는 어느 여인으로부터 들은 주님의 복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속사람과 더불어 인생이 변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학자의 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혀의 관리자, 좋은 말쟁이가 되기 원합니까? 말로 사람을 돕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하고, 살리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께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매일, 매순간의 삶에 주님의 말씀이 넘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변화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3. 잘 들어야 잘 말할 수 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피곤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언어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어로써 하나님의 백성 됨을 나타내야 합니다. 말로써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며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혀로써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학자의 혀와 학자의 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가 열리고 혀가 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세상 지식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격이 바로 서지 않은 사람에게 세상 지식은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근심과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을 통하여 듣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은 피곤한 사람을 위로하고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피곤한 자들을 위로하고, 여러분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사정을 잘 들어주는 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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