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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바보 (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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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바보 (히 12:2)


어떤 러시아 남자가 모스크바 크래물린 궁전 앞을 뛰어 다니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습니다. 
“바보 후루시조프! 후루시조프 바보!”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23년 금고형이 떨어졌는데,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서기장 모독죄 3년, 국가 기밀 누설죄 20년”   
재미있는 유머입니다. 

바보라는 것이 비밀인데, 그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입니다. 바보란 다른 말로 밥통입니다. 밥통은 밤만 축내는 식충이를 말합니다. 지능이 모자라거나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멍청한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예수! 바보! 이런 말은 신성모독 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바보”는 해석을 달리합니다. 
  
바보란 “바라 보다”의 줄인 말입니다. 바보란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십니다. 예수 바보, 바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 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사신 바보   

“그는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사신 분입니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지금 치루어야 할 댓가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고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할 것이 아니냐”(눅24:26)고 하신 말씀이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오늘의 고난 없이는 내일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일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가 무얼 보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만 알뿐입니다. 세상은 난리가 나도 그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거기에 빠져 있습니다. 
  
일본사람 다나가 고이치가 2002년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을 때 일본의 과학성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석사도 박사도 아니고, 대학 교수도 아닌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1983년 후쿠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교토시에 있는 시마즈 제작소에 들어가 연구소 주임으로 일해왔습니다.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하고 승진 시험도 거부하고 주임 자리를 고집해 왔습니다. 그가 43세에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신약개발과 암 조기 진단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공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낙제를 당해 1년 늦게 졸업했으니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오직 연구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그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만큼 바보같이 보였습니다. 머리도 짧게 깎았고 옷도 대충 되는 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센몬빠가였습니다. 전문 바보라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된다. 다른 것은 못해도 된다. 하나만 잘하면 그것이 최고다. 한 분야의 1인자가 최후의 1인자다.” 
  
예수님은 누구 신가? 센몬빠가 이십니다. 오직 앞에 있는 기쁨만 바라봅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예수님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하였습니다. 
  
최근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디젤”이 “smart no! Be stupid!” “스마트 노! 바보가 돼라!”는 브랜드 광고를 내걸었습니다. 스마트가 멋이 있지만 바보에게는 배짱이 있습니다. 스마트한 사람은 비판을 하지만, 바보는 행동을 합니다. 스마트는 똑똑한 바보요, 바보는 창의적인 행동가입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목표가 있는 사람입니다. 목표를 향해 바보처럼 달려가기 바랍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바보

십자가란 흉악범을 못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고대로부터 로마시대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로마의 경우 반란죄를 지은 자를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죽임을 당하는 기구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갈3:1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모욕하더라”(마27:40-44).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요, 바보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  
“십자가를 참으사” 이것은 하나뿐인 목숨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자기희생을 말합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사고로는 이해가 안되는 바보입니다. 죄없는 그가 죄인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보를 영어로, 이디어트 idiot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그리스어 idiotes 이디어테스에서 유래된 말인데, “공공의 문제에 관심이 없이 오직 사사로운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적인 이익보다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이 바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타산에 약한 사람을 바보라고 하는데, 바보의 참된 뜻은 이해타산에만 밝은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엄마는 바보야! 하고 소리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사는냐는 겁니다. 엄마 바보가 가정을 지켜왔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약1:4) 참음이 부족하다 싶으면,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는 바보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바보” 이십니다. 바보는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느라 피곤합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기 소신을 지키며 내면의 평화를 유지합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홀레스 닷지라는 자동차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저택에서 젊어서부터 근무해온 나이 많은 문지기가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몹시 게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닷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가! 내일부터 출근 하지마!”하고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퇴근해보니 노인은 여전히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오늘 아침 해고당했잖아!” 하지만 노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장님을 용서했거든요!” 노인은 해고당한 직장에 날마다 나타났습니다. 해고당한 경비원이 주인을 용서했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바보인데 그 바보가 최후의 승자입니다. 바보는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 행동합니다. 
  
바보는 막무가내식의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 바보 속에 자기 긍정의 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보는 망상가입니다. 망상이란 이치에 어그러진 생각입니다. 허왕된 꿈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허왕 된 생각 꿈 같은 이야기를 하여 바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역사 발전을 주도해왔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망상과 꿈이 재료입니다. 모든 사업가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꿈이나 망상이 기적의 모태가 됩니다. 선구자나 발명가는 모두 망상가 소리를 들었습니다. “꿈 깨!” 하고 핀잔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루고자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당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동지상고 야간학생이었습니다. 아이스케키를 팔면서 부끄러워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얼굴을 안 보이게 가렸습니다. 어머니가 지나가다가 보시더니 모자를 벗기면서 “네가 하는 일이 그렇게 부끄러우냐? 부끄러우면 그만둬라!” 하고 야단을 쳤답니다. 어머니는 Tiger mother였습니다. 호랑이 엄마가 자식을 강하게 키웠습니다. 
  
대학 다닐 때 학생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면회 와서 질질짜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하느냐? 기도하느냐? 성경을 읽느냐?”고 묻고 “나는 너를 믿는다!” 하고 갔답니다. 그 아들이 커서 28살에 현대건설 이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 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현대건설에서 뽑으려 하지 않아 대통령께 직접 편지를 보내어 현대에 입사했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부딪쳐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자기를 긍정하고 도전했습니다.   

한 소년이 추운 겨울 교회에 가는데 눈보라가 너무 심해 본 교회까지 못 가고 가까운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안 계시고 집사님이 설교를 헸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 말씀을 읽고 설교하면서 스펄전을 향해서 예수를 바라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자라서 세계적인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 믿음의 창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성자이십니다.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 사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바보 예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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