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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눈물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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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눈물 (창 50:15-21)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5-21)

얼마 전 전문적인 여론 조사기관에서 한국을 위시하여 동남아 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의 경우 71%에 해당하는 사람이 1순위로 '성격(性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격을 가장 원하는지 다시 질문하자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너그러운 마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각박한 현실, 무한 경쟁사회에서 부부로서 살아갈 이상적인 배우자는 성격이 너그러운 사람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부사이에 항상 날을 곤두세우고 산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나와 같은 죄인인 이웃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너그러운 마음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욱 너그러운 성품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정13;4) 너그러움이야 말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에서 아주, 정말, 크게 너그러운 마음을 소유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단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는 이유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외국인에게 팔려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서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랑받는 아들에서 노예 신세로 떨어져, 그는 서럽고도 힘겨운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했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았습니다. 주인을 위해 그 아내의 정절을 지켜주려고 했는데도 오히려 파렴치한 강간미수범이 되어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도 당하였습니다. 가정 총무에서 죄수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잊혀진 사람이 됩니다. 언제 나갈지 전혀 기약도 없는, 죄수 아닌 죄수입니다.          

사실 마음의 상처를 말하고, 억울한 것을 말한다면 요셉만큼 상처를 받고 요셉만큼 억울한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형제들에게 당한 배신감, 충성스럽게 일하고 섬겼던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억울한 대접,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감옥생활의 분노,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아마도 세상과 사람을 저주하는 사회 부적응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에 원망과 미움을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로 있을 때나, 모함을 당하여 왕의 감옥에 갇혔을 때나, 요셉은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신앙적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훈련의 시간이 다 끝났습니다. 바로 왕에게 불려가서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하여 신임을 받아 나이 30에 애급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총리가 되고 9년이 지났을 때, 그의 형제들이 멀리 고향으로부터 양식을 구하려 애급에 내려왔고 거기서 요셉을 만났습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던 요셉이 당시 최고 강대국이었던 애급의 총리가 된 사실 앞에 반가움보다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과거를 말하지 않았고, 부모 형제들을 모두 애급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 아버지 야곱이 죽었습니다. 형제들은 다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요셉이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자신들에게 보복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자기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에게 작은 힘이 있을 때 아무 잘못이 없는 어린 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타국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자기들이 요셉에게 했던 것처럼 요셉이 다시 돌려준다 하여도 말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최선의 일을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만들어 냅니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거짓 유언을 전한 형들은 그것만으로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직접 요셉 앞으로 나옵니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살려달라고,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동생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동생인 요셉의 종이 될 터이니 목숨만 보존해달라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요셉은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오랜 원한을 이렇게 풀어주시는구나,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이제 내 마음에 있는 상처는 다 치료되었다. 차마 형제간에 보복할 수는 없어서 망설였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날이 오게 하시는구나. 이제 내 마음의 맺힌 한이 다 풀렸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보면 요셉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성도여러분, 요셉이 왜 울었을까요?  

** 요셉의 눈물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성도여러분, 고난이 없이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논하는 정도를 넘어서 7년 흉년에 죽을 수십만, 수백만명의 목숨을 살리는 자리에 앉아있는 요셉입니다.  실제로 굶어서 죽을 수백만의 인생들이 요셉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사람들을 살리고 또 인류의 구원을 위한 아브라함의 후손의 혈통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특별히 세운 위대한 정치인입니다.  

이런 위대한 지도자가 그냥 그냥 될 수 있겠습니까?  학생들이 반에서 일등하는 것에도 밤을 새우는 애씀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서 목숨을 구걸하려는 형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다. 형님들이 나에게 한 행동도 수많은 생명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만약에 벌을 준다고 하여도 그것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나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하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합니다.  마치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는 것처럼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도리어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합니다.  두려워하는 형들이 간곡하게 말하는 요셉의 진심을 알았는지, 요셉을 요셉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도여러분, 두려움이 어디서 올까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이유는 자기 인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눈앞의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자주 두려워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현실에서 도망가거나, 술, 도박, 게임 등, 중독(中毒)이라는 방법으로 현실에서 도망치기도 합니다. 너무 두렵기 때문이지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나는 하나님이 자녀다’ 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나는 영생을 가졌다. 나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 라는 확신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 하신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자기 인생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은, 사람 앞에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도 항상 처음 예수님 만난 때의 감격이 있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 항상 감격이 있게 하옵소서.’   

요셉은 이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라고 항상 고백하여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요셉의 눈물에는 용서와 관용이 있습니다.  

왜 요셉에게 마음의 상처가 없었겠습니까?  그에게 원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태도는 참 멋집니다. 그는 모든 것을 용서했고 모든 것에 관용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너그러움으로 넘쳐납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부요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容恕)와 관용(寬容)입니다. 
  
용서(容恕)가 죄를 보고 넘어가는 것이라면, 관용(寬容)은 받아주고 품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와 관용의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막11:25절에 보면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라고 하셨고 빌4: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죄를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용서고, 그를 품어주고 받아 주는 것이 관용입니다. 특히 관용이란 말은 내 안에 나 하고는 다른 사람을 품어 주는 것입니다.  다르지만 받아주는 것, 틀리지만 품어주는 것, 잘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는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와 관용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당할 수 있는 모든 손해는 다 당하고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단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당하는 법적인 불평등을 받았고, 자녀들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단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기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적의를 품거나 분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가 관용입니다.      

오늘날 나와 마음이 잘 안 맞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쪼끔 노력하는 그런 정도의 사치스러운 관용이 아니라, 나를 정말 괴롭히고 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사람을 품는 넓은 마음을 일컬어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서 알게하라”(빌4:5)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드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섭섭해도 마음이 틀어지고, 없는 섭섭도 만들어 내서, 다시는 그 사람 얼굴도 안 보려는 우리들 아닙니까? 말다툼했다고 교회를 옮겨버리는 우리들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때의 성도들이 보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속 좁은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용서나 관용을 정신지체자가 하는 일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조차 품지 못하는 형편에...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품어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위해 축복을 해줄 만큼 넓은 가슴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 앞에서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용서하고 관용할 수가 있습니까? 사실 간단합니다. 우리는 쉽게 남을 용서하고, 쉽게 남에게 관용할 수가 있습니다. 용서와 관용(寬容)의 본질은 긍휼(矜恤)입니다. 긍휼이란 곧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 라고 했습니다.  혼자 살려면 긍휼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살려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느냐?  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오. 우리는 죄인입니다. 정말 죄인입니다. 죄인인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니 나도 나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니 나도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니 나도 나를 긍휼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나도 다른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대.단.한 사람이면, 내가 잘.난. 사람이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자존심 상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불쾌합니다. 그러니 남도 불쌍히 여길 이유도 없고 남에게 긍휼을 베풀 이유도 없습니다. 차갑게 비판하고, 냉정하게 율법대로 판단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은 긍휼이 여기는 것은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2;13)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심판하십니다. 내가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관용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2001년 한 해 동안에 일본은 11,391명이 다른 사람을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우리나라는 597,570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들보다 보다 53배나 많습니다. 인구 비례로 치면 126배나 됩니다.  2004년에는 1만 807건과 62만 7천 건입니다. 더구나 고소나 고발을 당한 뒤 무혐의 등으로 불기소되는 경우가 70%입니다. 일단 고소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툭하면 ‘法대로’입니다.  문제는 일본은 800만 이라는 우상을 가진 나라고, 우리는 1/5 이 기독교인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고 극한 대립 현상을 보이는지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밖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싸움이 많은지요.   우리는 요셉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피해자인 그가 오히려 가해자를 위로하고, 가해자를 위해 울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일입니다. 
  
** 용서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용서와 관용이 핵심이 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 받으신 이유도 용서를 위함이었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용서를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천해야할 덕목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용서와 관용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復活)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용서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하고 관용해야 하는 이유를 좀 더 살펴보면...

첫째는, 나의 잘못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나의 잘못의 가능성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관용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나도 그런 잘못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용서합니다. 자신을 사랑합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먼저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받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한 자신을,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감히 내가 무엇인데 하나님이 용서하신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롬 8: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이젠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이 말씀 앞에서 누구나 자신을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실수하고 잘못한 형제의 허물에 대하여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도 그 사람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을 내가 저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정신병이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미움이 원인입니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 인가?’ 이 말은 ‘나를 못 받아들이겠다. 나는 내가 싫다’ 는 말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것밖에 안되는가!’ 이 말은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다 이해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와 우리들에게 최선을 다 하셨고, 그분은 정말 나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나도 나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셋째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스스로 미움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미움과 분노로 나를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해보십시오. 내가 자유 합니다.       

성도여러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뭔데 남을 용서하고 말고 합니까? 내가 남에게 지은 죄, 그 수많은 상처 입힌 것들이나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용서할 것 보다 회개하고 사과할 것이 몇배 더 많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용서 받는 존재이지 용서를 베푸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 용서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때 전쟁 포로였던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포로로 잡아가두었던 그 사람을 용서 했소?” “용서라뇨? 어떻게 그 작자를 용서 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그의 포로인 셈이군.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미움의 감옥...시기의 감옥...질투의 감옥... 원망의 감옥..’ 그러니 용서한다는 건 곧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용서는 결국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 믿음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과 실천입니다.  어느 강가에 노를 저어 배로 사람을 건너 주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배에 탔습니다. 젊은이가 배에 올라앉고 보니 한쪽 노에는 믿음 또 한쪽 노에는 실천이라는 글씨가 써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그 뜻을 물었습니다. 노인은 웃으면서 젊은이에게 한쪽 노를 내어주며 “자 믿음이라는 한쪽 노만 저어보게..” 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믿음이라는 한쪽 노를 들고 믿음..믿음 ..외치며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어찌 되었을 까요?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실천이라고 쓰인 노를 주며 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이번에는 실천이라는 노를 손에 잡고 실천 실천 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이번에는 배가 반대편으로 제자리 돕니다. 이제는 믿음과 실천이라는 두개의 노를 동시에 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힘을 다해 “믿음” “실천” “믿음” “실천” 외치며 노를 저었더니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노인은 오랜 삶을 통해서 진리를 알았던 것이고, 자기가 항상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글을 세기고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이, 늘 제자리만 맴돌 뿐입니다. 용서 받음을 믿는다면 이제는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 받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늘 죄인처럼 사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분명히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은 사람다운 삶을 삽시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일지라도 독을 묻히지 않고 향을 묻힙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은 용서와 관용 밖에 없습니다. 서로 원망하며 물고 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혀서 자신이 입은 상처를 보상 받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차라리 향나무처럼 내가 아프더라도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예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내가 아프더라도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예수의 향기를 나누어 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부활로 돌아왔습니다.  한나는 한 맺힌 여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나중에 아이를 많이 낳았고, 또 브닌나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악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브닌나를 용서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음미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형제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아래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그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겸손하고 더 기도하고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나에게 지금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시면서 형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는 요셉의 신앙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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