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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눅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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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눅 2:52)

우리는 자녀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주일입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방정환 선생이 처음 만들어 낸 말입니다. 1920년 「개벽」이라는 잡지 8월호에 ‘어린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있어서 무관심의 대상, 멸시의 대상, 그리고 특별한 의견이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도 그런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만, 당시에 어린 아이를 함부로 불렀던 호칭들로 어린 것, 어린애, 애녀석, 아새끼, 아해놈과 같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호칭들은 어린 아이들을 경멸하는 투로 부르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도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게 된 호칭이 바로 ‘어린이’라는 호칭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평등의 호칭이었습니다. ‘젊은이’, ‘늙은이’와 같이 ‘어린이’도 뒤에 ‘이’자를 붙이면서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지만, 아직도 버려지는 아이들이 있고 지금도 여전히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현상도 눈에 띄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어린이들을 너무 존중하다 못해서 어린 아이들이 가족의 우상이 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띕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들이 쩔쩔 맵니다. 가족의 모든 패턴을 자녀에게 맞추며 삽니다. 이사를 가는 것도 자녀들을 위해서 가고, 어디에 머무는 것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교육적인 면에서는 더욱 과도한 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자녀가 공부를 잘할까?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출세를 할까? 여기에 모든 정성과 시간과 사랑을 쏟아 붙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한시되는 결정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녀들의 신앙교육입니다. 세상교육에 대해서는 열의를 쏟는데 신앙교육과 성품교육에는 그것의 십분의 일도 열정을 쏟아 붓지 않는 신앙인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가 놀라곤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가?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할 것인가? 어떻게 이 사회를 신뢰가 넘치는 사회로 만들어갈 것인가?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야만 이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에는 우리가 관심을 덜 쏟고 있습니다. 

어릴 때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신앙의 교육을 놓치게 되면 그 아이가 자라났을 때에는 신앙교육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언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2005년도 갤럽조사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 중에 37%가 모태신앙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9~10살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이 37%입니다. 그리고 10대에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20%, 20대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20%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님들 중 77%가 20대 이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등학생들, 중고등학교 청소년들, 대학, 청년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붓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가족의 전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접하고 신앙에 대해서 들었던 것은 누구로부터 듣게 되었을까요? 모태신앙, 즉 어머니가 나를 태중에 잉태해서 내게 신앙을 가르쳐준 경우가 21%입니다. 그 다음으로 조금 자란 이후에 부모, 배우자, 형제, 자매, 가족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27%입니다. 

이것을 보면 약 50%가 가족을 통해서 신앙을 전수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개신교의 경우 아버지와 자녀들의 신앙이 일치하는 경우가 57%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자녀들의 신앙이 일치하는 경우가 70%입니다. 그리고 부모전체와 자녀들이 신앙이 일치하는 것이 85%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신앙과 여러분의 신앙이 일치하고 있습니까? 혹은 여러분의 신앙과 자녀들의 신앙이 지금 일치하고 있습니까?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은 한 가족이 함께 소유하는 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참 소중한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본 분들이라면 모두가 동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바르게 키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잘못 키우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자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에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자녀와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수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때로는 실패의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돈을 잘 벌기 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속적인 사회에서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권만 사면 부자가 됩니까? 그런 부자는 부자도 아니지요. 나보다 먼저 부자된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여유자금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 주식은 어떻게 변화 되고 있는가? 경제신문 하나라도 꼼꼼히 읽어야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연구하고 남에게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이 땅에서 정말 멋지고 소중한 인물,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인물로 키우겠다는 열망이 있으면서도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책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저절로 되겠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어느 순간이 되면 스스로 되돌아올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자녀들을 그냥 내버려두면서 키웁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 왜 내 자녀가 이렇게 자라납니까? 왜 내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갑니까?’라고 하나님께 항의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를 그르치는 1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녀를 그르치는 1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10가지 중에 3가지 이상 잘못했다고 한다면 자녀에게 위험이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조건 들어줘라. 이것은 자녀로 하여금 절제와 훈련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자녀들이 나쁜 말을 할 때 농담으로 여기고 웃고 지나가라. 그러면 자녀들은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악한 것을 즐기게 됩니다. 

세 번째입니다. 자녀에게 영적인 신앙교육을 시키지 말라. 그러면 자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오만한 인간상을 가지고 잘못 성장하게 됩니다. 

네 번째입니다. 아이에게 죄책감을 줄 수 있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말라. 아이가 죄책감을 가질까봐 “오냐 오냐”만 합니다. 아이가 잘못해도 꾸짖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은 자기반성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자녀의 뒤를 쫓아다니며 어지럽히는 것을 치워줘라. 이것은 특별히 사랑이 많고 자녀를 잘 돌보려고 하는 부모들이 이렇게 합니다. 그냥 쫓아다니면서 치워줍니다. 자녀들은 어지럽히기만 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힘들고 어려운 것은 거부하는 얌체와 같은 인간으로 자라게 만듭니다. 

여섯 번째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가 자주 싸워라. 어떻게 될까요? 아들들은 여자가 싫어집니다. 딸들은 도대체 내가 어떤 남자와 결혼할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일곱 번째,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소유할 수 있게 하라. 무엇이든지 먹고 마시고 소유하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땀을 흘리는 노동과 수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여덟 번째, 아이와 함께 있을 때 이웃을 험담하고 선생님을 험담하고 경찰을 헐뜯어라. 그러면 모든 일에 남의 탓만 하면서 자라는 인간상이 되고 맙니다. 

아홉 번째, 아이가 잘못했으면 당신이 대신 나가서 사과하라. 이것은 자녀들을 책임지지 않는 비겁한 인간으로 만들고 맙니다. 

열 번째, 비관적인 인생을 자꾸 심어줘라. 그러면 세상을 어둡게 보기 시작합니다. 한번 실수하고 실패하면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잘 키우셨습니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자녀를 키워나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습니다

본문은 열두 살 난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세계, 그의 지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과 이웃과의 관계까지 모든 것을 축약해서 그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여기 보면 키가 자라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몸이 자라났습니다. 키가 자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 그의 육체가 제때에 잘 자라는 것만큼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다음으로 또 무엇이 자라났다고 합니까? 지혜가 자라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났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혜도 어린 아이의 지혜에서 청소년의 지혜로, 또 청년의 지혜로 자라나듯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본문 앞에 사건하나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다 끝났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내려오는데 한참을 오다보니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깜짝 놀라서 도대체 내 아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화하고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아주 의연했습니다. 

성경은 이때 예수님의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살이 어떤 나이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성인이 되는 나이입니다. 율법의 아들이라고 칭호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나이입니다. 부모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누가복음 2:48)

어머니는 야단을 친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이렇게 행하여서 네 아버지와 내가 여기까지 다시 오는 고생을 하게 하느냐?”하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꾸짖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누가복음 2:49)

어머니도 ‘어찌하여’하고 질문하고 아들도 ‘어찌하여’하고 거꾸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 어머니와 아들이 생각이 달랐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은 항상 생각이 같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인 성전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표현하면서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인 마리아보다 더 큰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부모님께 거역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부모님이 소중하고 귀하지만 열두 살이 되었을 때에는 부모님보다 더 큰 존재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 앞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모습이 되길 원합니다. 열두 살까지는 부모님에게 매달립니다. 부모님이 최고입니다. 부모님의 가치관이 내 인생의 전체입니다. 부모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12살이 넘어서,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할 나이입니다. 이때 내 부모님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근원입니다. 

여러분, 성전의 교육이 지혜교육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지혜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것이 지혜교육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부모를 경외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년 예수님을 보면 12살 때 이미 세속적인 표현으로 마마보이의 자리를 벗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굉장히 강한 교육열이 있어서 누구보다도 자녀들을 소중하게 사랑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마마보이로 만드는지요? 18살, 20살, 아니 어떤 분들은 결혼까지 했는데도 마마보이로 만듭니다. 아들이 엄마의 입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아내와 의논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도 상처를 주고 아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며느리에게도 상처를 주는 고통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늘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에는 떠나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 손에서 꽉 잡고 있다가 손을 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자라는 것입니다. 언제 놓아야 할까요? 어머니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고 깨달을 때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딸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내 목숨까지도 바칠 만큼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무엇을 더 말해주어야 할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너를 사랑하신단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것이 말씀교육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지혜교육입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어머니,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떠나도 마음이 허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담대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가지고 모든 문제들을 이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그렇게 키우지 않습니다. 너무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열두 살까지는 꽉 붙잡아야 합니다. 엄하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순간 가르치고 꾸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된 것은 칭찬해야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내 어머니가 얼마나 귀중한 분인지, 그분들이 내게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12살이 넘어가면 자녀들에게 내가 가진 권위를 넘겨주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붙들림을 받도록 하는 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불순종했을까요? 부모님을 떠나갔을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부모님도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무서워할 줄 모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내 부모님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분인지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부모님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누가복음 2:51)

예수님은 내려가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잘 받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모를 뛰어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가슴속에 담아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때로는 우리가 가졌던 생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놀랍게도 자녀들은 12살이 되면 부모님의 장점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도 꿰뚫어봅니다. 우리는 자녀들 앞에 가서 다시 한 번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얘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사랑하신단다. 그러니 이제는 기도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혹 그동안 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면 미안하구나.” 하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정말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물로 자라나게 됩니다. 

두 가지 부탁만 하겠습니다. 
12살이 넘지 않은 자녀가 있다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기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손주도 좋습니다. “하나님, 나보다 더 귀한 아들, 나보다 더 멋진 딸, 하나님 쓰실 만한 아들, 딸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12살이 넘었으면 끌어안고 기도하든지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십시오. 12살이 넘으면 부모라도 머리에 손을 얹으면 기분 나빠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도 이제는 인격과 자격지심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살은 미묘한 나이입니다. 그때는 어깨에 손을 얹으시거나 껴안고 기도하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너를 사랑한단다.” 그렇게 축복하십시오. 

또 한 번은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한턱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하지 마시고 꼭 1대1로 하십시오. 자녀가 셋인데 한꺼번에 한턱을 내시면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조금 돈이 드시더라도 첫째 딸 따로, 둘째 아들 따로, 셋째 따로 사주십시오. 그리고 그냥 들으십시오.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니? 작년에도 너와 식사를 했는데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또 듣고 싶구나.” 그리고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의 복을 기쁜 마음으로 누리시고 그 자녀들이 멋지게 자라는 것을 감사하면서 우리에게 이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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