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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관계와 분깃 (행 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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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관계와 분깃 (행 8:1-25)


유명한 명화 '대부(The Godfather)' 제1편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대부(代父) 돈 꼴레오네'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마피아 두목 자리'를 물려주게 되는데, 그의 세 아들들 중에 첫째 아들은 이미 암살당했고 둘째 아들은 성격이 너무 약하고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보기에 가장 '똑똑하면서도 파이터(fighter)의 본능이 있는' 셋째 아들 '마이클'을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원래 마이클은 자랄 때부터 마피아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가운데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서 군복무까지 하는 등, 대부의 가족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손이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가 라이벌 마피아의 자객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거의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이 마이클이 민첩하게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여 자기 아버지를 살려내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복수까지 적극적으로 자청해서 실행에 옮긴 것이 계기가 되면서, 마피아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자택 뒤뜰에서 대부는 이제 어엿한 마피아 두목이 된 자기 막내아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어두운 표정을 짓습니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마이클은 "아버지, 도대체 아버지의 마음에 아직도 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모든 것을 제가 다 알아서 잘 처리한다니까요."라고 다짐을 하면서 대부를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대부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실은 너만큼은 이런 일을 시키지 않고 '상원의원 마이클 꼴레오네', '판사 마이클 꼴레오네' 등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면서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둡고 살벌한 마피아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 왔던 대부는 그래도 자기 아들 대에 가서는 '악당'이 아닌 '고위층'과 관계를 가지고 '뒷골목 세계'가 아닌 '밝은 사회'의 행복을 누리게 될 수 있기를 갈망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 제2편과 3편에 보면 마이클 역시 아버지 대부와 똑같은 꿈을 이루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실패하는 것으로 영화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비단 마피아 두목들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지금보다는 '좀 더 고귀한 인간관계'를 나누면서 '더욱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하게 되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의 인생에서는 그런 꿈같은 일이 현실로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새 생활입니다.
이 세상사람 중에 좀 더 높은 사람 정도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되고, 이 인간사회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정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분깃'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정말이지 마피아 두목이 국회의원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정도와는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엄청난 '신분 격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성령과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이며, 우리의 생애를 '하늘의 은사'들로 가득 채워 주는 '성령의 분깃'은 과연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사마리아 교회'가 설립될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을 통하여 오늘날도 전도를 통하여 택자에게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의 관계'는 오직 '바른 교회를 통하여 참된 복음을 영접함'으로써 제대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절의 본문에 "1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바로 그 핍박에 발 벗고 앞장서서 교회를 "잔멸"하려고, 즉 기독신자의 씨를 말리려고 가차 없이 체포해서 투옥시켰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은 그래도 예루살렘교회를 지켰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무서운 박해를 피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도 절묘하게 선용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또 한 번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이방 지역 선교였습니다.
바로 4절로부터 8절에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기록한 사실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 즉 피난 가던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오히려 그 와중에 복음을 곳곳에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했는데, 그는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빌립이었습니다.

그 빌립이 복음을 전도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과 오랫동안 깊은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 민족들과 결혼했다고 해서 멸시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해방 후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함께 참여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은 일로 해서 앙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몇 백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던 그런 악감정은 초대교회 시절 당시에도 그 골이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하고 있었는데, 그 재기불능처럼만 보였던 사이에서 놀랍게도 재결합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고 바로 빌립의 전도가 그 동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빌립의 전도 방법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것과 똑같은 것으로서 복음 전도의 "말"에 "행하는 표적"이 병행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특히 빌립의 '신유 기적'을 보고 놀라 "그의 말하는 것" 즉 빌립이 전파한 복음의 말씀도 "좇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온 성에 "큰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는 중에 왕성한 전도 활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12절에 보면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믿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사도 베드로의 전도 활동의 결과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사마리아에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한 가지 의외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14절 이하 17절에 그것을 두고 기록하기를 "14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복음 전파 청사진이 지금 또 한 단계 진전되고 있는 징조를 보게 되자 바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또 영적 지원을 하기 위해 두 사도들을 대표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성령"은 아직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는데, 여기서 전자는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자는 '불세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도들은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며 "안수"하여 결국 그들로 하여금 '성령세례'도 받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까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장면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순서에 맞고 완벽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아직까지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두어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비록 신앙을 고백하고 물세례까지 받기는 했지만 그 심령으로 온전하게 복음을 영접하지는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빌립이 행한 신유의 기적을 보고 놀라 그를 추종하기는 했지만 빌립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바로 깨닫고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12절에 기록된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역 성경에는 여기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 원문을 보면 빌립이 "전도할 때에 저희가 그를 믿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니라 '빌립'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외면적으로는 빌립의 전도를 듣고 신앙고백도 하고 세례도 받았지만, 그들의 심령은 참된 복음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빌립이라는 사람에게 끌렸을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지상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물세례'를 받은 교인이라고 해서 다 '성령세례'를 확실히 받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지금 사마리아에 새로 기독신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탄생하려는 중요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그 사마리아교회 역시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영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도록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처럼 성령세례를 늦추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과 유대 바깥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사도들과 상관없이 그냥 독립적으로 세워진다면, 신약의 첫 두 교회들이 출발부터 영적으로 이질감이 생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루살렘교회뿐 아니라 '땅끝까지' 곳곳에 세워지게 될 모든 교회들이 공히 다 같은 '사도의 터 위'에서 단 하나의 '우주적 교회'로 통하게 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처럼 특별히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 집사의 전도와 신유 기적을 통하여 큰 감동을 받고서 나름대로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성령과의 진짜 새로운 관계는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두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충만의 은혜를 입게 됨으로써 비로소 참된 신자들이 되었으며 그들 역시 정통 신앙에 기초한 사마리아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소위 '성령을 받는다'라는 말이 전혀 엉뚱하게 이해되고 너무나 값싸게 사용되고 있는 현상이 팽배해 있습니다.
'성령'은 어디까지나 '제3위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을 무슨 '기(氣)'처럼 여깁니다.
'성령충만'이라는 상태가 마치 무당들이 환각적인 정신 상태에 들어가서 어떤 신비로운 기운을 받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령과의 관계를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것'으로 체험할 줄은 전혀 모르고, 오로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방언'이나 병자에게 안수를 해서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신유'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인 줄로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성령충만의 체험은 바로 참된 복음을 영접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믿는 믿음' 안에서만 제대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행하고 계시는 최고의 이적이요 오직 택자에게만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듣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감동과 역사를 통하여 구원의 믿음을 얻게 만드는 참된 복음은 오직 '바른 교회', 다시 말해서 '정통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를 통해서만 전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하여 힘써 매진하고 있는 선교가 바로 그처럼 사도 시대 때부터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파되었던 정통 신앙을 이제는 '땅끝까지' 이어가고 있는 고귀한 사명임을 깨닫고, 택자로 하여금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이 참된 세계선교운동에 더욱 힘을 모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의 분깃'은 '옛 사람의 악습을 완전히 벗어 버린 후'에야 비로소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9절로 13절에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 가운데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술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요즘에는 누구나 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술사'를 아예 'illusionist' 즉 '눈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오직 여흥(entertainment)으로만 즐기고 있지만, 옛날의 마술사들은 그 똑같은 속임수를 가지고서 마치 자신이 무슨 초능력이나 있는 사람처럼 행세를 했었습니다.
  
시몬 역시 바로 그런 마술사로서 스스로를 "큰 자" 즉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람'인 척했던 것이며, 온 동네 사람들은 그를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즉 '어떤 신적인 능력을 행하는 초능력자'로 떠받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평소에 그 시몬의 "마술에 놀랐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이제 빌립의 행하는 신유 기적에는 더욱 놀라 그를 따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하루아침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다 잃어버리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시몬은 자기 스스로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는" 일종의 '새신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 역시 다른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오직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즉 비록 빌립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충성심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그 신앙 수준은 실제로 아주 낮은 단계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는데, 바로 18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에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24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이 안수하며 기도드림으로써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 것을 목격한 시몬은 그들에게 "돈을 드리면서" 자기도 똑같은 "권능"을 소유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도들이 행한 권능을 자기가 부리던 마술의 일종인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흡사 자기가 옛날에 다른 마술사들에게 돈을 주고 새로운 마술을 배웠듯이 사도들의 권능 역시 마찬가지 방법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몬에 대한 베드로의 책망은 아주 신랄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는 그런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이 도에 아무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으며" 결국 "망할" 사람이 될 뿐이라고 추상같이 꾸중했던 것이었습니다.
  
시몬이 비록 겉으로는 아주 열성적인 신자가 된 것 같았지만 그가 옛날 마술을 행하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미신적인 사고방식과 악한 구습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면, 그는 실제로는 '성령을 통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직 맺지 못한 사람이며 따라서 '성령의 은사에 따른 분깃' 역시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사람일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몬에게 그의 "마음에 품은" "악함을 회개하고" 아직도 "불의에 매인바 되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악독"을 깨끗이 청산해야만 주님께서 그를 "사하여 주실" 것이라고 경책했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자기에게 그런 저주가 "임하지 말게" 기도해 달라고 베드로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가 과연 어느 정도 진실하게 회개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이 시몬이 나중에 한 이단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으며, 후에 '성직 매매'를 뜻하는 'simony'란 단어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해 주면서도 그 대상자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악습을 '악독'한 것이라고 일깨워 주지 않고 그 '불의'한 행동을 당장 그만 두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중생인이 누리게 되는 '성령의 분깃'을 결코 받을 수 없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선교를 한답시고 '성령'을 아예 '귀신의 영'과 섞어 버립니다.
  
즉 선교 지역의 원주민들이 원래 믿고 있던 '토착신'을 자기네의 '천주'와 '같은 신'이라고 하면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토착신을 섬길 때 사용하던 온갖 주술이나 의식들 역시 그럴듯한 이름만 새로 붙여서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그처럼 '악한 구습'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완전히 철폐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어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로지 새로운 형태의 '짬뽕 미신'이 또 하나 더 탄생하게 될 뿐일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 것'을 깨끗이 비워버려야 그 자리에 '새 것'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몰랐을 때에 행했던 '귀신 놀음'을 완전히 타파해 버려야 그 대신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소위 '고유의 전통문화'니 '미풍양속'이니 하는 미명으로 치장된 것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악독'과 '불의'에 불과한 것들은 철저히 타파하면서 복음을 전파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선교는 원주민들과 마찰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불신자들이나 다른 우상 종교인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전도만이 옛날의 '마술사 시몬'들로 하여금 진정한 '성령의 분깃'을 받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비록 소수이지만 그런 까닭에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보내는 자'가 절실히 필요한 이 선교운동에 자기 한 사람의 기도와 물질의 후원을 정성을 다하여 보태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세계선교운동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무슨 '프로젝트 선교'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민족에게 빵을 나누어 주고 무료 의술을 베풀어 주고 학교를 지어 주는 '사업'(project)들도 물론 필요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제 사업'일 뿐이지 '선교'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드는 데에는 효과가 있겠지만 '성령의 관계'와는 사실상 아무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짜 선교는 오직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자'를 만들고, 그처럼 참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통하여 인침을 받은 성도들을 모아서 '교회'를 반드시 설립해야만 합니다.
그런 선교가 되어야 거기에는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하여 '바른 대신(對神)관계'를 회복하는 역사,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온갖 '축복의 분깃'을 누리는 열매들이 따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for us)의 시대, 신약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God with us)의 시대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저와 여러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God in us) 즉 '성령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성령께서는 지금도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택자를 부지런히 불러 모으고 계십니다.
사람끼리의 관계를 화목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는 참된 복음을 선포하며, 겉모양만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악습'을 완전히 내버리고 '교회중심으로 성령의 분깃'을 누리게 해 주는 축복의 중생인이 되게 하는 참된 선교운동에 더욱 '보내는 자'로서의 사명에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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