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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 (롬 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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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 (롬 3:22-25)


시골 어느 집에서 명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인절미를 만드는데 젊은 색시가 인절미를 만들다 말고 고물을 묻혀 사랑하는 남편 입에다 쏙 넣어주고 쏙 넣어 줍니다.  저만큼의 거리에서 시아버지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구멍으로 군침이 흘러 들어갑니다.  체면 때문에 "그것 나 하나 먹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먼 산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습니다.

때마침 시어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얘야, 아버님은 드렸냐?"  "아뇨.  다 만들어서 드릴려구요."  그래서 인절미를 한 사발 담고 김치 국물을 곁들여서 아버지께 갖다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볼이 미어터지도록 몇 개 잡수시더니 아들 쪽을 향하여 냅다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색시 있냐?  나도 색시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 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인사하십시다.  "제 옆에 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옆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이렇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님,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 처음으로 오신 여러분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경영하시고 바라시는 모든 일들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들이 여러분들을 저희 교회로 초청을 한 것은 그저 저희 교회를 한 번 구경하시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이번 기회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저희들과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로 초청한 것입니다.

1992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인기상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던 노래 가운데 노사연씨가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우리의 만남이 바램이 있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가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우리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와 저희 교회 성도님들이 여러분을 너무나 보고 싶어했고,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보다도, 저희 교회 성도님들 보다도 더욱 더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했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과의 이 한 번의 만남이 여러분의 인생 중에서 최고의 만남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주 행복한 만남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잊혀지지 못할 소중한 만남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들어올 때에는 만 가지 생각을 가지고 왔지만 예배당 문을 나설 때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풍성한 삶이 펼쳐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향한 예수님의 바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보다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거기에다 프리미엄으로 더 풍성한 삶을 얻는 것,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수고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와서 영혼의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서 인생 길에서 시들리고 지친 영혼이 쉼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영혼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을 부족하지만 짧은 시간에 열심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사람은 영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간혹 보면,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되어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를 믿으면 땅에서도 잘되고 형통하게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 기독교 신앙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만이 전부이고, 그것이 정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와 같이 귀한 것들을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서의 우환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환은 물론이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가 다 반드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가난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세상적으로 형통해지고, 안 믿는다고 세상적으로 다 어려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의 차이는 혹 있을지 모르지만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그와 같은 것들은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예수를 믿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귀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이 생명은 그저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건강하고 부자로 형통하게 사는 생명과는 좀 차원이 다른 생명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그 생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소유에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많이 소유하면 잘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못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삽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반대로 소유가 적은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못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소유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치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느냐에 따라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의미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자라고 하여도 존재 가치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가리켜서 소위 '졸부'라고 부릅니다.  저들은 부자일 뿐 절대로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문에 저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공과 행복은 결코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너무 가난하고 너무 병들어 몸이 약해지면 사는 게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민들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나라가 아직 큰 부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부자가 되어 가고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세계 많은 나라들 가운데 불과 3-40년 만에 이렇게 경제적인 성장을 이룬 나라는 없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던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를 향해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한 것은 우리 나라가 유일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가장 잘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참으로 가난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학교에서 일년에 한 번씩 조사하던 '생활환경 조사서'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나십니까?  지난 주간에 이야기를 듣기로는 우리 지역의 어느 중학교에서 부모님들 가운데 스마트폰이 있는 학생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강의시간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서 토의를 하면서 오늘 이 시대의 사회적 소수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발표하게 했더니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집에 라디오가 있느냐?  전화기가 있느냐?  냉장고가 있느냐?  텔레비전이 있느냐?" 그런 것들을 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우선 부자였습니다.  텔레비전은 동네에 몇 대 있었습니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은 그 집이 부자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 아이들은 동네에서 힘을 주고 다녔습니다.  자가용은 재벌이나 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다 큰 부자입니다.  큰 부자를 넘어서 거의 재벌 수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도넬라 메도즈'가 쓴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글에 보면, 은행에 예금이 있고 자가용까지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세계에서 상위 7명에 속하는 갑부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하도 못 먹고 살아서 배가 나온 사람이 부자고 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때보다 분명히 더 행복하십니까?

지난 4일에 한국 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어린이날을 맞아 전국 초중고교생 6,410명을 대상으로 3월부터 지난달까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우리 나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65.98점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OECD 23개국의 평균에도 한 참이나 모자라는 최하위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유는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처럼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없으면 힘들고 어렵지만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소유의 가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치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치 있게 될 때 그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가치가 높아져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만족을 느끼게 되고 진정한 삶의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존재의 가치가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유의 가치는 높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는 절대로 존재의 가치가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존재의 가치는 존재 목적으로부터만 옵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 자체로부터 오지 아니하고 그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이 마이크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이크의 가치는 마이크의 존재 목적에서부터 옵니다.  마이크가 존재하는 목적은 작은 목소리를 크게 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마이크는 그 목적대로 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옵니다.  고장이 나서 고칠 수 없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 이 마이크는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진정한 존재의 가치는 존재의 목적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존재의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존재의 목적은 존재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결정합니다.  마이크의 존재 목적은 마이크가 만들지 아니하고 마이크를 만든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칙입니다.  존재가 스스로 존재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여기 서 있는 오주철 목사의 행복과 성공은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존재에 있습니다.  제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의 목적은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업에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절대로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목적 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아무런 목적과 기대 없이 우연히 태어나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당신의 사랑하는 소중한 자녀입니다.  우리 부모의 모든 기대는 자식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투자를 자식에게 합니다.  하나님이 꼭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대하시고 그 기대를 이룰 수 있는 각양의 좋은 은사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세상에는 저보다 부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제 삶에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 자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을 나그네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압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압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압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압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달려갈 길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답게 사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저는 그것이 생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은 그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끝나버리는 그런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한 100년을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국에 '윌리암 제닝스 브리안'이라는 사람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3,000년 된 미이라 속에서 곡식 단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3,000년 된 완두콩이 있었는데, 쭈글쭈글하게 말라서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도무지 그 안에 생명이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완두콩을 가져다가 땅에 심었더니 한 달이 훨씬 지나서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결국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그는 전도하러 다니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년생 식물도 3,000년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100년도 못살고 먹고 자고 일하다가 죽음으로 끝나겠습니까?  죽음 후에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습니다.  내세가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그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 죽음으로서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죽음이 있고 그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은 인생이 풀지 못한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존 메사츄세츄 대학의 밀턴 메이어는 '오늘의 위대한 사상'이라는 책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죽음에 대하여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은 역사가 없습니다.  수천 년 전과 지금과 동일합니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고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사람들은 동일하게 죽음으로 자기의 생명을 마감합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찾아온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모세는 죽음에 대하여 시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5)

저는 처음에 이 말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보고서의 자료를 보니까 이 지구상에 하루에 120만 명이 죽습니다.  매초에 30명이 죽습니다.  울산보다 큰 도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하루에 120만 명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게 홍수처럼 쓸어가 버립니다.  아무리 무서운 대지진이 일어나도 하루에 120만 명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게 인간을 땅 속으로 묻어버립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나 여러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수는 없습니다.  정한 때가 되면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심판 후에는 반드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보면 모든 인생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

죽음에는 세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그가 어떤 신분과 처지에 있든지 관계없이 죽은 것입니다.  눈에 어떻게 보여도 죽은 것입니다.

둘째는 육신적인 죽음입니다.  줄기에서 잘려진 꽃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영적인 죽음이라면 그 꽃이 시들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 육신적인 죽음입니다.  인간은 70-80년의 인생을 살다가 죽습니다.  꽃이 시드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인생이 시들어 죽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어린아이가 부쩍 커버린 사실에 놀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그만큼 늙고 시들어 버린 것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그만큼 다가선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 합니다.  거역할 수 없고 막을 길이 없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보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멸망의 죽음이 있습니다.  꽃병에 꽂힌 꽃이 시들면 모아다가 아궁이에 불태우게 됩니다.  육신의 생명이 있을 때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영혼들을 마귀가 와서 쓸어다 집어넣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끝장입니다.  아무도 그 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테는 그가 쓴 '신곡'에서 지옥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상태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들이 원줄기에서 끊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지막 아궁이에 던져져 불태워지는 사실도 깨닫지 못합니다.  단지 며칠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이 육신의 삶만을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만큼 단순하고 무식합니다.  태어날 때 죽은 몸이요, 육신이 죽고 영원히 죽어 멸망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는 영원한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영원히 사는 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3장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값을 주고 사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예화를 통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와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온유했고 성품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난폭했습니다.  형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동생은 집을 나가 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늦은 밤이었습니다.  모두가 깊이 잠든 형의 집 대문을 누군가가 심하게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동생이었습니다.  반갑게 맞이해서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불을 켰습니다.  불빛 아래서 동생을 보니 그는 온 몸이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다른 사람과 심하게 싸우다가 사람을 죽인 뒤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 때 밖에서 경찰이 문을 열라고 소리쳤습니다.  형은 동생을 살릴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윽고 형은 말했습니다.  "빨리 네 옷을 모두 벗어라!"  동생이 옷을 모두 벗자 피묻은 옷을 형이 입으며 말했습니다.  "내 옷을 네가 입어라!  그리고 너는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숨어 있거라."

드디어 경찰이 들어와 형을 잡아갔습니다.  재판이 열려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형은 간수에게 편지를 주며 동생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형이 자신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형집행이 끝난 뒤였습니다.  울며 돌아서는데 간수가 형의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너 대신 내가 죽는다.  너의 피묻은 옷을 내가 입고 네 죄를 대신하여 내가 죽는다.  너는 내 깨끗한 옷을 입었으니 이제는 죄 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가거라."

동생은 형의 옷을 입고 그 형이 죽지 않았으면 살았을 거룩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 형의 역할을 우리 예수님이 대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성인은 되셨을지 모르지만 나를 구원한 구원자는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으시면서 죄인들의 죄 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떤 사람도 회개하고 예수만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히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산천이 아무리 푸르러도 반드시 메마른 때가 옵니다.  농부가 불태우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육신적인 죽음 뒤에 심판을 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날에 여러분은 누구를 부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를 불렀습니다.  전도자 무디는 죽음을 앞두고 이 말을 하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아, 아름답구나.  어린아이들이 뛰논다.  정말 저것이 천국이구나.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어.  나는 간다."

최권능 목사님은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이 말을 하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전보가 왔어.  빨리 오래.  나 간다.  우리 아름다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나폴레옹은 죽음을 앞두고 조세핀을 불렀습니다.  조세핀이 누구입니까?  나폴레옹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불렀습니다.  그 사실을 나폴레옹이 알았다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불가지론자입니다.  하나님, 천국, 지옥 등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에 이렇게 소리치고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지옥으로 간다."

우리 곁에 왔던 부처라고 추앙을 받았던 성철 스님은 열반송에서 이런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1초에 30명, 하루에 120만 명의 생명을 거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명도 하나, 둘, 분초를 헤아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단지 무사하게 하루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떼쓰지 마십시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더 사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세상에 내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존재적 가치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영원히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이 시간 구경만 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들처럼 예수를 믿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땅에서도 잘되고 형통할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영원히 잘 사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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