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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다르게 살라

  •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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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너는 다르게 살라 
딤후3:1-5

우리는 흔히 '말세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여기도 말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세는 고통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Chalepos라는 말은 '어렵다' '힘들다'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마지막날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마지막 때가 오는 것을 알아서 그 때를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날의 현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입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합니다. 경제적으로 혼란합니다. 문화적으로 혼란합니다. 도덕적으로 혼란합니다. 종교적으로 혼란합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일에 일정한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고 도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따르는 것을 합리(合理)라고 하고 이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불합리(不合理)라고 합니다. 합리적인 사회는 행복한 사회요, 불합리한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 합리적인 사회에 사는데도 사는 보람이 있고, 기쁨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합리한 사회에 사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불행입니다.

서구사회 선진국은 합리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선진국 사회에서 오래 사시던 분은 우리나라에 와서 얼른 적용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우리나라가 서구선진국에 비해서 아직도 모든 방면에 불합리적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랑과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합리를 알고, 합리적으로 사는데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흥하고 행복하며, 악한 사람이 망하고 설 자리가 없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입니다. 의롭고 참된 사람이 대접과 존경을 받고, 악하고 부정한 사람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폭력은 짐승의 법칙이요. 비폭력은 인간의 법칙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폭력의 법칙이 아니고 비폭력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 부조리가 얼마나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는 불행의 요인이요, 불만의 시요, 민족의 번영을 가로막는 암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한마디로 오염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공기의 오염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 방식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기풍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양심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정신자세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이 같은 데서 돌아서라' '너는 다르게 살라'고 명령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권력 만능의 세상입니다. 권력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권력만 있으면 부유해지고, 권력만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민의 의식수준이 낮을수록 이런 현상이 더 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권력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권력 의지를 충족시킬 때 사람에게 통쾌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이란 것은 막강한 힘과 기능을 갖습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권력이란 것이 만능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그 수명에도 한도가 있고, 그 기능과 역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평민출신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힘은 모두를 정복합니다. 그러나 그 수명은 짧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행은 권력일변도입니다. 군정시대만 그런 것 아니고 문민정부가 되었는데도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는 다원 사회입니다. 여러 가지 힘이 다원적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균형과 조화 속에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의 대원칙입니다.

저마다 제 자리가 있고, 제 구실이 있고, 제 책임이 있습니다. 질서와 직분의 원리를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습니다. 현대를 소위 다원적 기능사회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문적인 분업사회입니다.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교육은 교육, 예술은 예술, 학문은 학문, 종교는 종교 각 부분의 사회가 제 기능과 제 직분을 다 할 때 전체 사회가 바르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정치 일원화사회가 되고 권력 만능의 사회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불행한 것입니다. 국민들의 성공의 기준, 출세의 척도를 권력을 잡는데 두고, 저 마다 권력의 주변에 모여들고, 권력획득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은 매우 불행하고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소위 정치부재의 문제가 왜 생깁니까? 수십 년 동안 야당이 권력획득만을 위해 싸워왔지 정치에 대한 비전, 철학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말 바꾸는 것을 너무 쉽게 하므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사회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서려면 이 권력 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이런 의식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사회와 국민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은 인간의 한 가치요 기능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인간의 목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엄연한 두 주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정의입니다.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권력이 있는 것입니다. 손과 입이 내 생명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내 생명이 손과 입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금력 만능의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돈이면 다 라는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돈을 가지면 우리는 여러 가지 욕구충족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금력이 권력 못지 않은 막강한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금력 만능의 부조리가 생기고 배금사상의 병든 풍조가 휩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권력과 결탁합니다. 소위 정경유착이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양심을 팔고, 지조를 버리고 신의를 배반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나라 파는 행위도 서슴치 않고 밀수와 탈세를 감행합니다. 돈 만 벌 수 있으면 부정식품도 만들고 부정 약품도 만듭니다. 권력의 자리를 남용해서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합니다. 한 사회가 배금주의 사회가 될 때, 돈의 노예가 되고, 그 사회는 병들고, 민족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고 국민의 도덕은 기둥이 무너져 해이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나라가 병들고, 썩고, 멍들고, 기울어집니다. 권력과 금력이 결탁할 때 그 해악은 극도에 달합니다.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돈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절대로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되어서도 안됩니다. 돈이 결코 인생과 사회의 만능 약은 아닙니다.

인간이 목적이요, 돈은 인생의 수단입니다. 그리고 돈은 섬겨야 할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정이라는 주인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돈을 벌되 옳은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공정한 경쟁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업의 도의요, 상업윤리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번 돈을 정재라 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을 부정축재 라고 합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오늘 우리나라의 소위 대 기업가중에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이유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해서 그렇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이 존경과 신망을 받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은 처벌과 멸시를 받는 사회풍토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돈과 기업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요 민족과 사회의 복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위해서 옳게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돈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옳게 써야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정과 책임이 따르지 아니하는 부정축재는 사회를 망치고, 나라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불신 풍조의 사회입니다. 현대사회를 계약사회라고 하는데 서로 속이고 약속을 지키지 아니할 때 계약사회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본은 속이지 않고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정부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은 학생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용자와 고용인, 의사와 환자, 상인과 손님,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두터운 믿음이 있고 확고한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신의가 있을 때 단결이 되고, 단결이 있으면 힘이 생기고 힘이 있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불신이 있으면 분열이 생기고, 분열이 있으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불행하게도 불신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믿지 못합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니까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신의의 나무에 화목의 꽃이 피고, 단합의 향기가 풍기고, 행복의 열매가 맺힙니다. 반면에 불신의 나무에는 불화의 벌레가 벌고, 파장의 병이 들고, 불행의 낙엽이 집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최대의 형벌이 무엇입니까? 옳은 말을 해도 다른 사람이 믿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간 부도 수표라고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사회에 설 땅이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친구도 안 생깁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풍토가 왜 이렇게 희망을 가지기 어려울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공약을 했으면 그대로 지켜야 하고, 지키려고 힘쓰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서곤 하니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만 민주주의요 헌법과 제도, 조직만 그럴듯하지 민주주의가 아직 정착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거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지구상에서 가짜 물건을 가장 많이 만들어 파는 나라가 우리 나라 아닙니까?

국가의 지도층은 국민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상인은 고객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나 약속했으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어기면 불신감 내지 배신감이 생깁니다.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혼란을 없애려면 서로 믿고 믿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허망한 생각으로 가득한 사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면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요행과 운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내가 힘써 해야 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기도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줄로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면 장사가 잘되는 줄 믿으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부지런하고 더 연구하고, 개발하고, 성실하게 해야 성공합니다. 성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고 나는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의 결과입니다. 우연이나 요행을 믿는 사고 방식은 망국의 사고요, 약자의 망상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망한 생각입니다. 이런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주를 보고, 관상을 보고, 토정비결을 보고, 운명론을 신봉합니다.

여러분,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을 하룻밤에 쌓을 수가 없습니다. 요행을 기대하는데서 절대로 위대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요행만 바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요,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날치기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에게는 분수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를 지키고, 제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아마 세계 선교 역사상 이만큼 놀랍고 성공적인 선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니느웨 12만 온 시민이 회개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왕이 회개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심지어 짐승들까지 이 거국적인 회개운동에 참여시켰습니다. 이렇게 전 민족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날 때 니느웨시는 새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니느웨시에 내리려 했던 하나님의 진노 재앙이 내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요나는 니느웨시에서 하나님의 심판만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요나가 니느웨 시민에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온 시민이 회개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판 날에 니느웨 사람이 일어나 이 세대를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니느웨 시민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복음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범한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진리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멀리 피하려 했던 요나를 들어서 구약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부각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만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런 가운데 잘못을 깨닫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캐묻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에게 잡혀가시게 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선생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내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잡히게 되고 대제사장 앞에 끌려가시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멀리서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험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혼자서 원수들 사이에 끼어 불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까 베드로는 은근히 겁이 나고 무서운 생각마저 들게 되고 마음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이때 어느 비자가 하는 말이 "당신도 역시 갈릴리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세요?"라고 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겁이 나서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며 말을 더듬었습니다. 한 번만 아니고 두 번, 세 번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때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네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뛰어나가서 바깥 어두운 곳에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매우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주님을 만나 뵙기는 했지만 용기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는지 사실 막연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하던 고기잡이나 다시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디베랴 바다에 가서 3년 동안 놓았던 그물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물에 고기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밤새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새어 가는데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뵙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별 생각 없이 그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베드로가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 말씀 그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많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귓속말로 "형님,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베드로는 벗고 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조반을 흥분 속에 먹었습니다. 그리고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그때 주님께서 시몬에게 "네가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던 것이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물으셨다면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기 때문에, 자신을 살펴본즉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주님의 양을 치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한 큰 죄를 범한 베드로이지만 회개할 때 다시 기회를 주어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한 번의 실수나 과오 때문에 우리를 완전히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실패의 경험에서 오히려 값진 교훈을 배워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패하고 잘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잘못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일어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리는 선수라야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야 마지막에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해져서 시험에 들고, 유혹에 빠져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의 충고를 듣고 자기의 죄를 깨닫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했을 때 낙심하지 맙시다. 다시 일어나면 소망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개한 사람에게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아무리 아버지를 배신하고 멀리 떠나 허랑 방탕하였지만,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여 아들의 권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 링컨만큼 실패를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시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실패할 때 마귀는 찾아와서 '이제는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찾아와서 '더 큰 일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더구나 회개한 다음에는 지난날의 일을 돌아보지 맙시다. 요나가 잘못한 일에 사로잡혀 있었으면 니느웨 성의 큰 역사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 되었으면 회개하고 용서받고, 두 번째 주시는 기회에 전력을 기울여 일해서 놀라운 역사가 우리 하나 하나를 통해 일어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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