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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절망의 나락에서 울부짖었다,하나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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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정연희(소설가·서울문화재단 이사장·그루터기교회 권사)

어떤 삶이든 시련과 역경이 있다. 질곡과 아픔이 있다. 인생의 고비마다 신앙으로 버텨내고 극복해온 사람들. 그들의 삶은 어떤 책이나 설교보다 생생하고 깊은 울림을 준다. 왜 크리스천이 되었나.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진정 무엇을 말하는 가.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천 리더들의 진솔한 자기고백을 통해 신앙의 참 의미를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출생 전부터 위협은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는 비탄의 통곡을 마음 놓고 터뜨리셨고,할아버지는 손자의 이름을 지어가지고 오시다가 인줄이 계집아이인 것을 보시고는 문지방도 밟지 않고 돌아서버리셨다. 둘째딸인 나의 출생은 우리 집안을 초상집으로 만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석달 전,온 동네가 탐을 내고 부러워하던 우리 집안의 맏아들이 어느날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태중의 아이 때문에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리시지도 못 했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에게는 불운을 몰고 온 딸로 태어났다.

‘구박덩이’에 ‘타박네’. 아우라도 남동생을 볼까 기대를 했으나 나는 그런 운도 타고나지 못 했다. 내 아래로 태어난 것은 여동생이었다. 평생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을 받아본 일이 없는 나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끊임없는 협박으로 이어졌다. 부모도,형제도 까닭을 알 수 없는 불합리한 관계로 얽혀 돌아갔다. 육체도 자라고 정신도 어지간히 제 몫을 하고는 있었지만 내게 다가오는 그 어떤 것에도 나는 반응할 줄 모르는 인생의 청맹과니로 살아갔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감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전쟁 중에,그 어려운 가난 속에서도 나로 하여금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머리가 좋지도 않고 공부에 취미도 없던 나를 선생님 몇 분이 아껴주셨고 손수 입학원서까지 제출해주시면서 이화대학에 밀어넣어주셨다. 그 학교는 억지로 먹어야 하는 먹기 싫은 음식이었다. 1주일에 세 차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와 기독교문학 등 황당하기 짝이 없는 종교를 강요 당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온 천하 만민이 믿는다는 그 하나님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에게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황당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인류의,그리고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희극이었다. 그렇다고 철저한 반증이나 질문이 있는 것도 아닌,어정쩡한 이단자는 막연하게 ‘예수쟁이’들을 이성(理性)이 무딘 사람들로 여겼다.

재학 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해 작가의 길이 열렸고 졸업 즉시 신문사에 입사,수습기간도 거치지 않고 기자 대우를 받으며 내 인생의 신산(辛酸)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줄만 알았다. 나는 어머니를 피하여,그리고 가난한 친정을 벗어나는 길로 결혼을 택했다. 그러나 결혼은 색다른 지옥이었다.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남편의 아이를 몇 번씩 중절하는 죄를 예사로 저질렀다. 어떤 형편에서든 나에게 가족은 멍에였다.

내가 속한 세상은 불합리와 폭력투성이었는데 현실은 철저하게 합리를 요구했고,세상은 온통 불가해(不可解)로 가득한데 나는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나 희망조차 더듬어볼 수 없는 절망 속에 갇혀 있었다. 이혼을 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겠다고 믿어 내 삶을 갈가리 찢어가며 낭자한 피투성이로 혼자가 되었다. 작가라는 명성(名聲). 글을 쓰면 돈이 되었고 세상은 나의 실체(實體)를 모르고 늘 과분한 대접을 했다. 남들은 여권(旅券)을 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았을 때,나는 무관의 제왕으로서 취재 명목으로 세계일주를 네 번,다섯 번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나의 인식(認識)의 세계는 황무지였다. 인식의 창문이 아예 닫혀 있었다. 소설가? 아무리 쓰고 또 써보아도 그것은 ‘나’ 가 아니었다. 반응할 줄 모르는 삶. 이웃이 보이지 않는 삶,바른 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고 마땅히 들어야 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소설의 소재(素材)가 있을 리 없었다. 방송국에서 말장사를 해보아도 그저 허무맹랑하기만 했다. 나는 절망의 중독자였다. 절망을 먹고서야 하루를 사는 이상한 짐승이었다. 절망의 족쇄(足鎖)를 절그럭거리며 원인 모를 멸망의 길로 계속 전진하는 짐승이었다.

1973년 9월,나는 간통죄로 피소되었다. 40일 동안 증거도 없는 수사가 계속되다가 심증만 가지고 구속된 뒤에 국사범(國事犯)처럼 72일 동안 아무런 증거도 없이 엄중한 재판을 받았다. 1973년의 그 살벌한 정국(政局) 속에서 나 때문에 구속된 또 한 사람은 끝내 간첩죄로 새로운 수사가 시작되었다. 친고죄를 기초로 정보부 직원과 합세하여 목숨까지 노린 기상천외의 사건이었다. 나는 72일만에 간통 재판 사상 유례 없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정보부에서 간첩죄로 몰아붙인 그 사람은 목숨을 보증할 방법이 없었다.

‘나 때문에 한 사람이 죽는구나. 나 때문에,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대로 살아갔을 한 사람이 나로 하여 죽게 되었구나….’ 그리고 내 손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시답잖은 것이기는 했지만 재물도 흩어졌고 건강도 나락으로 처박혔다. 사면팔방 손닿는 것이 없었다. 낮에도 첩첩히 두꺼운 커텐으로 빛을 차단하고 엎드려 있던 나는 어느 순간에 전신을 던져 통곡하며 소리쳤다.

“ 하나님! 하나님! 이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이라 합니다. 정말 살아계신 분이면 저 가엾은 사람을 살려주소서. 그렇게만 하시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겠고 그 사람을 평생 남편으로 섬기겠습니다.” 통곡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사건은 뒤집혔다. 주간지들이 1년을 두고 그렇게도 재밌게 울궈먹던 사건이 뒤집혔다. 정모와 김모를 간통죄로 고소한 고소인과 중앙정보부원이 구속되었다. 중앙정보부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그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울부짖어 탄원했던 것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전신을 던져 통곡하며 사설을 늘어놓은 것일 뿐 하나님의 실재를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가지 두 가지 기적적인 일들이 폭발하듯 이어졌다.

불가사의한 그 일들은 나에게 오히려 공포였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울부짖음도 들어주시는 분,내 생명의 주인 되시는 그분은 분명 살아계신 분이었다. 살아계신 분임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셨다. 그것은 너무도 눈부신 빛이어서 그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뜰 수도 없었다. 버러지처럼 음습한 구석만을 찾아다니던 내게 내 생명의 주인은 그렇게 빛으로 오셨다. 나를 감옥이라는 죽음의 땅에다 처박으신 뒤에 어둡고 무겁고 음습한 죽음의 토양 속에서 내 영혼의 씨눈을 그렇게 떼어주셨다. 감옥은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워 준 토양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근원적인 질문이 비로소 생명의 빛 앞에 섰다.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된 위협과 협박도 그 빛을 만나기 위한 은혜였다. 온갖 박해와 오해,모욕과 능멸은 생명을 낳기 위한 진통이었다. 그렇게 영혼의 씨눈이 벗겨지자 내 죄가 보였다. 그 죄는 대속자(代贖者) 없이는 사망으로도 상쇄될 수 없는 지옥이었다. 그렇게 영혼의 씨눈이 떨어지자 생명의 존귀함이 보였고,창조의 아름다움이 보였고,이웃이 보였다.

의미도 모르고 진창길 같은 고난을 수없이 겪었던 전생(前生)을 뒤로 하고 이제 생명의 빛 가운데서 고난의 의미를 알아보게 되었다. 고통과 고난은 그분의 속삭임이었다. 고통과 고난은 지혜의 칼이 되어 인생의 가지치기를 단행해주는 스승이다. 인생길에서 쓸데없는 이상열기(異常熱氣)에 휩쓸릴 때는 폭풍이 되어 들뜬 것을 가라 앉혀주는 은혜의 손길이 고통과 고난임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나의 믿음을 종교라 부르지 않는다. 기독교라고 이름하지도 않는다. 생명이신 분,사랑이신 분,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일 뿐,그리고 나로서는 해결 할 수 없는 죽음을 해결해 주신 분 예수,그분의 십자가를 의지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가,얼마나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두고 분석하고 예수 그 분의 십자가를 두고 이론(異論)에 이론을 태산처럼 쌓아가도 나는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의 신비와 사랑을 목숨 다하여 의지할 뿐이다.

◇ 정연희 권사는… 서울시 문화재단 이사장인 정연희 권사는 1957년 이화여대 국문과 3학년 재학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했다. 1964∼68년 이화여대에 출강했으며 한국기독여성문인회·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월간 '주부편지'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문학상,한국 소설가협회상,윤동주 문학상,유주현 문학상,김동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양화진' '여섯째 날 오후' '난지도' '사람들의 고성' 등 다수의 장편집을 내놓았다. 시집으로 '외로우시리'와 기행문집 '해가 뜰 때 아침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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