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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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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934: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구약시대의 여리고 성은 굉장히 튼튼한 성이었습니다. 그 성안에 기생 라합이 살고 있었는데 그 때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의 인도로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을 때에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안에서 낮에는 물 팔고 밤에는 몸 팔며 여리고 성안의 많은 남자들 품에 안겨 비위 맞추어주며 고통과 눈물로 세상을 살았던 여자였습니다.

 

그 때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 군대의 두 정탐꾼에게 생생하고도 실질적인 하나님의 대 구원역사의 복음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왔다 갔다 하는 술꾼들이나 장사꾼들로부터 희미하게 들은 얘기는 있었으나 이제는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들은 얘기입니다. 여리고 성은 그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파괴된다고 확실히 믿었고, 죽을 결심을 하고 몰래 들어온 이스라엘 두 정탐꾼을 숨겨 무사히 빠져나가게 도와준 것입니다. 자기에게 들어온 진리의 복음을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사수하여 자기의 신앙을 지킨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던 그 튼튼한 성이 이스라엘이 부는 나팔소리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지는 그 날에 정탐꾼과 약조한대로 기생 라합과 그 곳에 모인 자기에게 속한 모든 일가친척들은 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한 자는 모두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날 예수 믿으면서 진리의 말씀 밖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세상에 대한 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고 있으니 주님의 천국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세상복음입니다. 세상에 속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튼튼한 성 여리고가 진멸을 당한 후 여리고 성을 건설을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예언이 붙었습니다.(6:20, 21, 26) 이 예언을 믿지 아니한 히엘이라는 자가 여리고 성을 건설을 하다가 저주를 받아서 죽었습니다.(왕상 16:34) 예수님의 비유에서 여리고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해를 당하는 자가 있었습니다.(10: 30) 여리고에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불렀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고, 삭개오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리고는 저주를 받은 성으로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해 내시는 다양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선민 이스라엘이 애굽 같은 세상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올라갑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이 만들어지면서 올라갑니다. 무너질 여리고 성, 불타질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탈출하여 진리와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저주받은 여리고 같은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 탈출을 해야 구원이 됩니다.

 

20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진정 여리고 성의 종말을 아는 자는, 저주받은 여리고 성의 정신과 사상을 아는 자는 여리고 성으로 살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그 곳으로부터 떠납니다. 아무리 여리고 성에서 부귀 영광과 존영을 누린다 해도 그 종말을 아는 자는 그 사상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운동 천국복음이 어떤 사상인지 모르는 자들은 저주받은 여리고 성을 종교적으로 건설하느라고 야단법석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사명적으로 했더라도 여리고 성의 정신 사상으로 된 것은 여리고 터 위에 세운 것이니 모두 저주받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현재 자기가 여리고 신앙정신 사상으로 되어 있음을 진리를 받고 알았으면 진리 따라 빨리 나와야 합니다.

 

20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눈먼 자들이 사람 다니는 길가에 앉아서 무엇을 했겠느냐? 돈 구걸 세상 구걸밖에 더 했겠느냐?

 

영적 소경은 여리고 같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에 무너질 줄 모르고 돈 구걸 세상 구걸 그 목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다고 하나 영적인 눈이 감겼으면 자기가 배우고 듣고 느끼고 살아온 것이 세상을 구하는 구걸밖에 모릅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볼 수 없고, 사는 길이 무엇인지 볼 수 없고,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없고, 과거의 온 길을 볼 수 없는 것이 영적 소경입니다. 저주받은 여리고 성이 무너졌고, 또 앞으로 여리고 성은 저주받아 분명히 무너질 것이므로 그 속에서 깔려 죽을 수밖에 없는 소경인데 돈 바구니에 돈 떨어지는 그 소리만 계산을 합니다. 이게 영적 소경입니다.

 

소경들이 어느 길모퉁이에 앉아 구걸을 하니 수입이 좋더라. 몇 달 만에 아파트를 몇 평 짜리를 샀네하니까 침이 꼴깍넘어갑니다. ‘어느 소경은 목 좋은데서 몇 억을 벌었다네하니까 침이 꼴깍 꼴깍넘어갑니다. 무너질 여리고 성에서 자기 죽는 것은 생각 밖입니다.

자신들의 육의 눈이 뜨여 있다고 자신들이 영의 눈이 감겨져 있는 이 면을 모르고 있는 바리새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소경이 된 것을 모르니까 무너질 여리고 같은 세상에서 종교적 건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지적해주고 영의 눈을 뜨게 해 주려는데 자기들은 영적인 면에서 소경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축복을 많이 받았다네하면 그 소리에 귀가 번쩍해 가지고 나에게도 축복을 좀 빌어 주십시오!’ 참말로 어리석은 영적 소경들입니다. 신앙이치를 모르면 신앙사기를 당한 줄 모르고, 소경이면서도 소경이 아닌 것처럼 눈만 껌뻑 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소경들은 자기들이 눈이 감긴 것을 압니다. 눈이 뜨여지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 바로 이 분이시다하고 바로 아는 것입니다. 눈은 멀었을지라도 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이 뜨여지기를 바라는 여리고 길가에 앉아있는 소경에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 것이 소문으로 온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자기에게로 찾아온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믿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성이 자기의 영의 눈을 뜨게 해 주려는데 자기는 영적인 소경인지도 모르고 교만을 떠는 자가 많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이 말을 하는 것을 보아 이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문적 역사적으로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는 만나 보지 못했지만 그 분에게 눈을 열어 달래야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보아야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두 소경도 그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느냐?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큰 소리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 간절성, 그 애탐성. 그러나 무리들은 그 간절성, 그 애탐성을 얼마나 무시를 하는지! 참말로 고약한 무리들입니다. 평생을 세상을 구걸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심판에 여리고가 무너질 때에 깔려 죽으라는 말밖에 안 됩니다.

 

성경을 바로 깨닫고 영의 눈을 바로 떠서 확실하게 믿어보자고 하는 교인들의 정신을 짓밟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을 똑똑히 알지도 못하면서 건성으로 따라다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방해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큰 소리로 또 불렀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2032, 33: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아무리 바쁘셔도 멈추어 서게 할 수밖에 없는 그 기도, 그 간절성은 눈을 열어달라입니다. 누가 들어도 당연하고도 옳은 소원성입니다.

 

성경의 뜻을 모르고, 주님의 소원 목적성을 확실히 모르면(세상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면) 영의 눈을 밝혀 달라는 소원은 당연한 기도인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영의 눈도 멀어 있으면서 쓸데없는 기도들을 하니 어떻게 영의 눈이 열리겠느냐? 세상을 구걸하는 기도를 하니 얼마나 생각이 짧고 어리석은지!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눈을 만져 보게 하니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해 주니 주님을 따라갑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같이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주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을 박는 자들이 누군지?

예수님을 팔아먹는 자가 누군지?

예수가 어려워지니 달아나는 자가 누군지?

자기에게 눈 뜨이기를 가로막은 자가 누군지?

여리고 신앙사상이 어떤 사상인지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똑바로 증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리고 길가에 앉은 소경의 증거는 무엇이겠느냐? 돈 바구니에 돈 들어온 것 가지고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줄도 모르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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