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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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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1,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보고 어찌하여 말랐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잎이 무성하여 늘 푸른나무가 금방 주님의 저주에 시들어 죽었으니 이상할 수밖에! 인간의 육으로 눈으로 볼 때는 신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나처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만 있다면! 나무가 말라지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믿음만 있다면 산도 바다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들이 발동했을까?

영웅성이 발동되었을까?

주님으로 닮아져야지하는 마음이 더 발동되었을까?

아니면 그냥 들은 것인가?

도대체 그 믿음이 뭘까하고 생각했을까?

 

그 믿음만 가진다면 배고플 때 돌맹이 몇 개 갖다놓고 떡이 되라고 명령해서 찰떡 쑥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나무의 잎사귀가 만원짜리로 다 열려라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꼴 보기 싫은 사람, 기분 나쁜 사람 찾아가서 저주나 팍팍 하고 싶지?

 

우리에게 그런 요소 비슷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영화의 장풍처럼 불 받아라, 성령 받아라, 입을 넓게 벌려라, 성령 들어간다!’ 성령이 주전자의 막걸리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 걸까?

40일을 금식기도 하면 되나, 400일을 금식기도 하면 되나?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를 천 번 하면 되나?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천 번 하면 되나?

400명의 목사님한테 안수를 받으면 되나?

교파를 초월한 사상 최대의 집회에 참석을 하면 그 믿음이 생기나?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살아나는 흉내를 내면 생기나?

예배당을 400개를 세우면 그 믿음이 생기나?

아름드리 소나무 400개를 맨손으로 뿌리째 뽑으면 생기나?

작두 위를 걸어가야 생기나, 자전거를 한 대 씹어 먹어야 생기나?

 

주님도 인간, 나도 인간, 옛날 선지자 사도들도 인간입니다. 모세도 나와 똑 같은 인간인데 지팡이만 들면 물이 다 피로 변하고, 황충이가 곡식을 다 먹고, 이가 바지가랑이로 스물 스물 올라오고, 개구리가 밥상 밥그릇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하고도 하나님을 속이고 인색해서 사도의 저주에 죽어 나갔고 한 이것을 가지고 공갈 협박 쳐 먹지? 엘리야가 두 손을 드니 번갯불이 떨어지고, 사람을 태워 죽이고.

 

이런 것 다 하나님의 절대권을 가진 믿음입니다. 지금 이런 믿음을 가졌다면 종교계에 뭔가 한 번 보여주고 싶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인데, 믿음이라 할 때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세상 쪽으로 믿음이 들어갑니다.

이방종교인들 즉, 점쟁이의 말을 들으면 미신의 믿음이 들어갑니다.

진리이치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늘나라에 대한 신령한 믿음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 것을 자랑한다면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 생기겠느냐, 세상을 향한 믿음이 생기겠느냐?

무당이 성경 가지고 말하면 무엇을 자랑하면서 말하겠느냐? 그 소리 듣고 참 진짜 예수님의 믿음이 들겠느냐, 무당 예수가 되겠느냐?

세상 안 믿는 사람이 성경 가지고 말한다면 그 믿음이 참 믿음이겠느냐, 세상 믿음이겠느냐?

 

성경 가지고 성경의 말을 하는데 무엇이 자기 속에 들어서 비 진리로 변질이 되어 버렸느냐? 자기 속의 주격적 지식이 문제입니다. 자기 속에 가진 지식이 타락적인 주격적 지식인 고로 그 지식이 자기 양심을 지배하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는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한다고 해도 목적은 세상으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격적 지식이 어디에 속한 것을 모르면 아무리 믿으라, 믿사오니하여도 참 진리의 본질의 믿음으로는 한 발작도 못 들어갑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의가 인간 주관에서 나온 주관적인 믿음을 말하게 되거나, 그냥 믿는다거나, 무조건 믿는다거나 얼버무리고 맙니다. 참말로 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을 분류해 보면

 

첫째, 신념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세상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믿음입니다. ‘신념을 갖고 해 봐라, 신념을 갖고 밀어붙여라이런 말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여졌을 때 그 말들을 곧 잘 합니다. 밀어붙이면 50내지 60% 정도는 이루어집니다. 자기 주관적입니다.

 

둘째, 신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부탁한대로 해 줄 것을 믿는 것. ‘누구에게 무엇을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자기 일처럼 잘 봐줄 것이다하며 의뢰해서 믿어두는 것. 자기 주관에서 결정된 것을 상대방에게 잘 해 달라고 의뢰하여 믿는 것,

 

셋째, 신의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인격적으로 나와 무슨 관계인지 인격적으로 잘 아는 것.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모르면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모르는데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성이 이루어지느냐?

 

나의 속에 타락적인 지식이 주격적 지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주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이치적으로 깨닫고 보니 내 속의 타락적인 지식이 점점 빠져나가고 주님의 진리지식이 내 지식으로 바꾸어져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신의적 믿음입니다. 이 신의적인 믿음이라야 이 분을 신앙적으로 바로 믿을 수 있는 신앙적 믿음이 됩니다.

 

이 신의적 믿음 속에는 신념적 신뢰적인 믿음도 신앙으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질들은 전부는 하늘로부터 온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믿음을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타락된 인간으로부터 나온 신념적인 믿음, 신뢰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자기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 출처를 분간을 잘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부분 보면 타락적 주관적인 지식에서 나온 그 믿음을 가지고 떼만 쓰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무조건 떼쓴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진리이치를 알아야, 깨달아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사는 하나님과 단일입니다. 성령님과도 단일입니다. 100%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없는 것이 아니고 그 선언이 예정된 법칙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의 척도인 예수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대로 지혜 지식성으로 도덕성으로 능력성으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힘쓰고 애쓰느니 만큼 그렇게 되도록 법칙이 예정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척도가 아니면 안 만들어지는 것으로 예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적 기사나 예언이나, 선지자 사도들의 이적 기사나 예언들을 보면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받아 한 것도 있지만 어떤 때 보면 선지자나 사도들이 자기 인간 감정으로 한 것 같은데 그대로 일이 응해 버리는 것도 있습니다.(어린아이들이 선지자를 놀리다가 불에 타 죽은 것 등)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적중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의사가 자기에게 동시에 바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화 감동이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인간 자기의 타락적 감정으로 보복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적 저주성은 자기가 그 저주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의사 단일성을 이룬 그 믿음의 차원이 얼마나 고차원적으로 인격적으로 높겠느냐 그 말입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 일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사 단일적 질적 고차원적인 믿음도 아닌데 무조건 믿사오니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저주를 해 보아라, 그러면 나무가 말라 죽는다그런 뜻이 아니라 주님의 저주는 우리에게 100%의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 열매를 찾아도 없는 이스라엘, 성령의 열매 없는 기독교, 교회, 교인. 겉보기로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 부흥 같으나 영적인 면에서는 신앙생명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것을 저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부흥된 그 장면도 결국은 저주이니, 저주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교회를 영적 강도의 집단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외식주의 교회는 성령의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받았는데도, 비 진리적 세상적인 신앙노선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없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넓은 길을 갈 때에는 이미 신앙생명은 죽었고, 그리고 그 찬란한 활동 업적 건설마저도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에 사라질 것은 예정된 사실이기 때문에 저주를 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를 안 하시는 건데 인간 내가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된 것을 알아듣게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되는 영적 이치를 모르고 인간 자기가 함부로 공갈 협박적인 저주를 한다는 그 자체가 자기는 하나님께 저주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의심 자체는 믿음이 아닙니다. 의심은 하나님의 저주를 믿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의심 있는 신앙은 확고부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의사 일치성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말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신앙의 노선이 아니면 성령의 열매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짐이 없습니다. 진리의 교훈이 없으면 진리의 후손도 없습니다. 진리의 후손이 없는 교회, 이것은 저주받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불간섭이라는 말입니다. 참말로 무섭고 떨리는 말입니다.

 

공갈협박이 무서워서 꼼짝을 못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그 교인의 신앙이 참 불쌍하고 처절한 믿음입니다. 공갈협박을 잘 하는 인도자가 축복을 빌어준다고 해도 그 믿음은 이미 저주된 축복이고, 역사 속의 심판으로 사라질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무화과에서 된 이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산을 만드신 창조자만 할 수 있는 명령인데 사도들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백두산아 동해로 빠져라, 금강산아 남해로 빠져라!’ 산보고 하는 말이냐? 나무를 보고도 저주하고, 산을 보고도 명령하면 되니 한 번 해 보라는 말이냐?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진다는 그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성령이 역사가 되는 권위적인 특권이 들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도 시행되는 말입니다.

 

사도의 말은 주 하나님과 주와 성령님의 대언입니다. 주님의 사도들의 말은 하나의 인간 속에서 자기의 자유의지로 나오는 타락적인 말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의 사도 베드로의 말을 우습게 들은 거지. 자기 차원과 같은 줄 알고 속이려다가 부부가 그 자리에서 차례대로 송장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에서 구브로 섬 바보에서 그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도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데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요 박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을 예수를 믿지 못하게 방해를 하니까, 바른 길을 자꾸 굽어지게 말을 하니까 소경으로 저주를 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꼭 사도바울의 사사로운 개인 감정 같으나 감정이 아닌 것입니다. 옳은 진리이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양심으로는 옳다고 느껴지는데도 자기 것을 주장했던 모양입니다.

 

옳은 진리이치는 타락된 인간 지식에서나 인간의 어떤 사사로운 감정에서는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옳은 진리이치면 반박을 하면 안 됩니다. 전하는 자의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박하는 자는 자기에게 앙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교훈은 진리이치이기 때문에

두들겨 부수고,

고치고 다스리고,

판단하고 분별하고,

살리고 저주하고 하는 그런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람을 신격화 우상화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높이면 말씀의 역사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말 한 마디에 산이 바다에 빠진다는 말은 만화 같은 말이지! 누가 그것을 곧이들을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주님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냐? 장난하는 말이냐? 주님은 참말만 하는 분이십니다. 무슨 뜻인지 인간이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산은 이스라엘의 교만입니다. 죄입니다. 산이 바다에 빠지면 평지가 됩니다. 교만이 빠지면 겸손이 됩니다. 말씀으로 교만한 죄를 빠져나가게 하고, 겸손한 자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시들어버릴 것은 사들어지게 만들고, 교만이 있어서는 안될 곳에 교만이 있으면 빠져나가 버리게 만드는 것은 큰 믿음이요, 능력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진리역사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했으니 무엇을 구하겠느냐? 이 성경구절 가지고 어디다 썼느냐?

 

큰 믿음을 소유한다면 무엇을 구하겠느냐?

세계에서 제일 큰 예배당 짓는 것?

무슨 은사를 달라는 것?

 

큰 믿음은 최고의 것을 구하는 것이고, 또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께서 최고의 좋은 것을 다 주고자 하십니다. 저질적인 것을 구하는 것은 저질적인 믿음입니다.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라는 명령은 보통 믿음이 아닌 자타의 구원에 관계된 최고의 위력을 가진 믿음입니다. (계속)

 

*************************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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