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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2> 등록금 못내 중학교 중퇴 후 공장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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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집을 나간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다시 살림을 차렸다. 서울 성북구 미아리고개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이사하면서 형제들은 어머니를 떠나 계모와 함께 지내게 됐다. 여전히 끼니를 걱정했고, 집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방학이면 철야기도를 하는 어른들 틈에 끼어 교회 예배당 한쪽 귀퉁이에서 잠자며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졸업사진을 찍는 친구들을 쓸쓸히 바라봐야 했다. 일하다 뒤늦게 찾아온 큰형은 짜장면을 사줬다. 큰형은 늘 동생들을 위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풍 간다는 사실을 알고 형이 부엌에서 급하게 김밥을 싸줬던 기억도 난다.

중학교 1학년이 되자 경기도 가평군 한얼산기도원에서 여름 수련회를 보냈다. 한 평 남짓한 방에서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 갑자기 까닭 모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외로움과 슬픔을 자비롭고 연민 어린 마음으로 헤아려 주는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앞에서 감추어 두었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차비가 없어 미아리고개에서 혜화동에 있는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 아침은 거르고 도시락도 싸갈 수 없어 친구들 도시락을 쇼핑하듯 한 젓가락씩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어느 날 반장의 도시락에 손을 댄 순간, 반장은 나를 향해 ‘너 거지냐’고 몰아세웠다. 난생처음 반장과 몸싸움을 한 후, 한 친구가 매일 나와 함께 학교식당으로 가서 라면을 시켜 자기 도시락과 함께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는 한 시간 가까운 등하굣길에 어린 중학생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인생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그 친구 손에 이끌려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성공회 교회에 가게 됐다. 시험 기간 독서실을 제공했기에 찾아간 성공회 교회에서 이후 내가 성직자가 될 줄은 새까맣게 몰랐다.

밀린 학교 등록금 때문에 1학년 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휴학을 권고받았다. 학교에 미련이 없던 나는 휴학 대신 중퇴를 결정했다. 빨간 줄이 사선으로 그어진 퇴학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어머니가 보내준 등록금으로 아버지는 술을 드셨다.

생계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큰형은 공사장으로 갔고, 작은형은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동생은 고모 댁으로 보내져 네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게 됐다. 학업을 중단한 나는 어머니를 따라 한동안 지방을 돌며 생활했다.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판단에 강릉 이모 댁으로 보내졌고 자동차 정비공장 판금부에서 일하게 됐다.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자동차 머플러 산소용접이었다.

“초저녁 저 하늘 별 하나, 호숫가에 반짝일 때에, 그리워 그리워라….”

공장 생활을 하며 가끔 혼자서 흥얼거리던 김홍철 작사 ‘초저녁별’이라는 노래다. 지금도 노랫말이 추억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마음 깊은 곳엔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강릉 시내에 있는 교회를 몇 곳 찾아갔다. 교회에선 긴 머리에 공장에 다니던 나를 학생회에도, 청년회에도 보내기 어려워 당황스러워했다. 그 시절 교회는 내가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일을 마치고 매일 강릉 시내에서 경포대까지, 그리고 안목해변을 지나 다시 강릉 집으로 귀가하는 자전거 퇴근길은 나에게 짧은 순례이며 기도의 시간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나의 어려움을 작게 만들어 주고 위로해 주었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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