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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3> 교회 선생님 통해 역사·철학·문학에 눈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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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어머니는 지방을 돌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형제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산동네의 작은 전세방이었다. 형제들이 다시 모였음에 감사드렸다. 전세방에는 천장으로 쥐들이 뛰어다녔다. 쥐들은 천장을 이빨로 갈아 우리가 잠자는 도중 종종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가난에 울고 가슴 저리던 시절, 찢어진 천장 사이로 쏟아지던 설움이고 한겨울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불어오는 새바람 맞으러 간다….’

당시 교회 문학의 밤을 위해 쓴 시다. 우리가 살던 곳에 대한 기억이다.

형은 내게 100권 넘는 세계문학전집을 선물했다. 헤르만 헤세, 레프 톨스토이, 에리히 프롬 등이 쓴 소설들은 배움을 선사했다.

중학교 시절 도시락을 나눠먹던 친구를 다시 찾았다. 그를 따라 성공회 교회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민주화운동과 산업 선교에 관심이 많던 교회 선생님은 공장에서 일하던 내게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성경공부 시간이면 성서 이야기만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79년 인천으로 다시 이사해 공단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만들었다. 유신 기간에는 새마을 조회라는 명목으로 30분 일찍 출근해야 했다. 한 달에 두 번은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겨울철은 샛별을 보며 출근했고 퇴근길은 밤별을 보며 집으로 왔다.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보다 견디기 힘든 건 언제까지 반복하며 살아야 할지 모를 일상이었다. 당시 내 삶을 지탱해 준 것은 퇴근길 집 앞 언덕길에서 밤별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공돌이’로 놀림 받던 시절,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고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가르침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이끌었다.

교회 선생님의 소개로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구속자를 위한 목요기도회에 매주 다니기 시작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없던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합법적으로 모일 공간은 예배 공간뿐이었다. 목요기도회는 내게 살아있는 대학이었다. 대학에서 해직된 양심적인 교수와 지식인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일하는 수많은 종교인과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의 강연과 간증은 내게 또 다른 세계관과 신앙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동일방직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당시 정권에서 자행한 똥물 사건을 연극으로 재연한 기도회는 잊을 수 없다. 함께하던 모든 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참석자들은 난간으로 나아가 유신 정권과 박정희정권 퇴진을 외쳤다.

경찰들이 강당 문을 강제로 열고 들이닥쳐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수녀님들까지 거칠고 야만스럽게 연행하기 시작했다. 난입하는 경찰을 피해 2층 난간에서 뛰어내려 선교사 숙소 정원 나무숲 아래에서 2시간을 숨죽여 기다렸다. 고문당했던 이들의 증언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불의한 세상을 바꾸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어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 할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살던 인천 동구 화평동의 산업선교센터는 동일방직 관련 싸움을 하던 노동자들의 활동 무대였다. 수많은 노동자가 여러 공장에서 파도처럼 대로를 메우며 퇴근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현실이라고 깨달았다. 그 부조리를 바꿔야 한다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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