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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4> 군종병 되려 했으나 군목이 반대… 교파벽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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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교회 선생님이 내게 검정고시 공부를 제안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셨다. 구두닦이, 노점상 등을 하며 세상 밑바닥을 살아가는 친구들을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났다. 그 시절 교회를 통해 한국사회 변화를 위한 희망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성직에 몸담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1982년 연세대 신학과 합격자 발표를 하던 날, 내 이름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기도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부르심이라 생각했다. 공장 생활로부터의 도피나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가 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한 과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기도를 떠올린다. 그 기도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는 것을 확인할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 부끄러움과 참회의 기도 소리가 들려온다.

대학에 들어가면 양심적 지성인과 구도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몇몇 동아리를 전전하다 결국 가입을 포기했다. 오랫동안 공장생활을 했던 내게 동아리 활동은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홀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사학과, 행정학과 등을 돌며 좋아하는 교수님들의 강의를 찾아다녔다.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를 찾아온 보안대 사람들은 신병들에게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 이름을 한 명씩 말하라고 했다. 금서목록을 읽어 내려가며 읽은 책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책 목록에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대중적인 소설도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 이기자부대에 입소한 첫날 밤, 내 물건과 남겨뒀던 용돈을 누군가 전부 훔쳐가고 말았다. 개인의 올바른 생활과 공동체의 연대 책임을 묻는 훈련과정이 현장에서는 전혀 작동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 경험은 내가 부전공을 교육학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나와는 다른 신학적 배경에서 교육을 받은 부대 내 목사님은 나의 군종병 선임을 반대했다. 배타적인 교파들 사이의 벽을 처음 실감한 경험이었다. 목사님은 “신학이 다르면 구원도 받을 수 없는가”라고 물었던 나에게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복음의 포용적 진리가 어쩌다 서로를 배타하는 도그마로 변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부대 내 교회 목사님이 다른 부대로 발령받아 떠나며 내가 후임 군종병으로 선임됐다. 새 목사가 부임하지 않아 신학과 1학년도 마치지 못한 내가 졸지에 교회를 맡은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는 신학대학원까지 마치고 온 장교도 있었다. 애송이 신학생이었던 내가 제대할 때까지 설교와 심방 등 목회활동을 했다.

제대 후 1985년 복학했다. 장학금을 받으며 교회 일과 아르바이트로 학교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과거 경력을 알던 친구가 학회 활동을 도와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후배들과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주말과 주일에는 교회를, 평일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지낸 데다 학회 세미나와 수시로 계획되는 시위 때문에 정상적으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구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알고 있던 교회 청년운동에도 참여했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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