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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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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8∼30절)


  아담 이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나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만 모두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한 어른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주변에 있는 유치원 어린이들이 여러 명이 잔뜩 탔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치원 어린이가 좌우의 친구를 보고 “야, 인생살이 참 피곤하다.” 그러니 그 어른이 그 말을 듣고 하도 신기해서 어린애가 인생사가 피곤하다니 어떻게 피곤한가? 그래서 “야 너 유치원 학생인데 너 인생이 그렇게 피곤하면 어떻게 되나?” 어린아이가 “부모는 몰라요. 유치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피아노 연습하라고 독려를 합니다. 피아노 치고 난 다음에는 좀 놀려고 하면 미술학원에 가라고 밀어 내칩니다. 미술학원에서 겨우 좀 시간을 내어서 집에 돌아오면 영어학원에 가라고 또 밀쳐 냅니다. 인생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른들은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육체의 피곤함 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가 대단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에 하난데 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가지 질병에 우리가 걸리게도 되는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신경성  병이라든지 시민성 질환이라고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모두다 마음에 뿌리를 둔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피곤할 뿐 아니라 만물이 피곤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근본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짐인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 세상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탐심을 아담과 하와가 가졌다가 심판을 받아서 그 속사람이 죽고 육체의 사람만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주받은 땅에 피곤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고통은 성경에 뚜렷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고 했습니다.


  아담은 그 아내의 꾐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는 준엄한 심판이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도록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안력과 갈등을 가져와서 심지어 죽이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격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래도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행실들을 하고 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잘못된 인생사를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 오면 주님이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주의 길인데 우리 인생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더 많은 공부를 해도, 수련을 해도 더 많이 종교를 만들어야 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 떠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살아야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평안도 기쁨도 행복도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중심에 서서 살려면 길 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공부를 많이 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도덕을 많이 닦아야 잘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의 중심에 선 곳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인데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길을 모시고 있고 그럼 내가 이 세상에 바라는 크고 작은 길은 큰 길 되신 예수님 안에서 다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올바른 길을 쫓아서 살기 때문에 낭패와 좌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올바르게 들어서서 가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지요. 사람이 길을 선택하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좌우에 강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같이 있는데,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한사람이 다른 강도보고 말하기를 ‘예수님보고 욕하지 마라. 너와 나는 젊을 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리 그 길에 대응하는 보복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길을 잘못 든 적이 없고 길을 잘못 들 때도 없다. 주님이시여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길을 잘못 들었으나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했단 말입니다.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하니까 다른 때 실수로 선택하지 못한 것은 다 용서되고 사라져 버리고 그는 낙원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일에 올바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간구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이 간 길을 밝혀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 18장 12절~14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길 잃은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길에 들어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대가로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미주에 이민을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남미를 택해서 갔습니다. 남미에는 금은보화가 많이 나기 때문에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서 남미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북미를 택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예수 잘 믿으려고 북미를 택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누가 길을 올바르게 택했느냐?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북미에 간 사람들은 예수도 잘 믿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성공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미로 간 사람들은 길을 잘못 택해서 예수도 못 믿고 생활도 길을 잘못 들어서 사업이 실패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 들어가서 길을 올바르게 택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험 속에 들어가면 이 땅에 사는 삶 자체를 주님께서 천국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실 때가 비일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주님께로 오면 길을 찾게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습니다.
  또 예수님은 진리 자체입니다. 다른 데는 거짓말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 종들이 나를 따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거짓의 구렁텅이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제일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정치인들인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거짓말 약속을 산더미처럼 해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당선되고 난 다음 “몰라요, 나 잊어버렸는데. 그런 말 내가 했던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들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으려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진리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과 대화를 하고 지내면 우리가 진리에 서서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귀는 통째로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인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할 때, 예수님은 올바른 길이니까 당신에게 오라고 하고, 예수님은 진리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속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에 범죄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백성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장 1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5장 21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생명인 예수님이 지옥 건너편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마귀가 절망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았어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생명을 모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양과 도덕을 닦고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냥 모셔드리면 생명을 모시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심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축복인 것입니다. 


3. 행위냐 믿음이냐


  우리가 행위로써 사느냐, 믿음으로 사느냐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에덴에서 쫓겨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쫓겨 나오면서 패션 스토어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 죄를 지은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나올 때 무화가 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서 입고 나왔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앞치마를 만들어 놓으면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그냥 말라버립니다.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도 수치스러운 것을 막을 수 없이 풀잎사귀에 옷이 되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낼 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쫓겨나올 지라도 하나님이 나중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며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쏟고 그 예수님의 가죽을 벗겨서 이 세상에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벗은 몸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원한 추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단으로써는 죄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을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내보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인생들이 일생의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인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1절~22절)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하나님 희한하십니다. 우리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들을 계산에 다 넣어가지고서 인류의 지은 죄악을 예수님에게 떠맡긴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 안 믿는 우리들이 한평생 지은 죄의 대가가 열(10)이라고 가정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피의 대가는 영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서 영원한 의로움을 가지고 나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그런 자격을 가지고 가슴 펼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이처럼 공짜로 주는 것인데, 그 공짜로 주는 은혜에 의지해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죄가 청산되고, 성령꼐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 죄의 생활은 점점 사라지고, 의와 진리를 따라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4.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소에 멍에를 걸쳐서 논을 갈거나 밭을 가는데, 어미 한 마리만 있을 때는 모르는데 새끼가 있으면 목에 건 멍에가 보통보다 큽니다. 그 멍에를 어미 목에 걸어 놓고 새끼를 그 멍에 밑에 같이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멍에는 엄마 목에 걸려있는데 밖에서 보면 새끼가 멍에를 같이 걸머지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어미 소가 걸어갑니다. 그럼 그 밑에 새끼 소는 어미 따라서 걸어가면 아무 짐도 목에는 얹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미 소가 잔뜩 몸에 힘을 넣어서 땀을 흘리고 헉헉 거리면서 가는데, 새끼는 엄마 밑에서 멍에를 맨 척만 합니다. 밭을 가는 흉내만 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엄마는 자기가 수고하고 무거울 지라도 새끼를 자기 멍에 밑에 불러서 같이 밭을 갊으로 새끼에게 밭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끼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새끼 멍에 위에 얹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가 다 새끼의 멍에를 자기 목에 걸고 엄마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데 새끼는 재미있게 평안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나면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의 멍에에 우리 짐을 다 받아서 짊어지고 “나와 같이 가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와~짐을 다 짊어지고 가네?” 실상 그 짐은 자기 멍에에 얹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멍에에 얹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멍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나란히 같이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새끼를 옆에다 세워서 같이 가면 큰 짐을 옮기는 것같이 보이지만 새끼는 수고롭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 밑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행해야 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짐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만, 인생에 그 짐을 다 걸머지고 갈 사람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짐을 예수님의 멍에에다 얹어놓고 자기는 예수님 멍에 밑에 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다 맡아서 짊어지고, 우리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끼에게는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새끼의 그 무거운 짐을 엄마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머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걸머지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살아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가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로 2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분과 나의 짐을 짊어져주시고, 그 예수님 멍에 밑에 우리가 들어가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중복음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 질병의 멍에, 가난과 헐벗음의 멍에, 죽음의 부활의 멍에, 성령과 동행하는 멍에, 예수님은 그 모든 멍에를 걸머지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의 짐을 예수님이 다 걸머지고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여러분인데, 주님에게로 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여러분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여러분의 십자가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여러분 그냥 건성 얹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보이는데, 예수님이 여러분을 업고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요.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하지만 업혀있지 여러분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해주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를 전달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의로움 우리의 의로움, 예수님의 치료 우리의 치료, 예수님의 부귀 우리의 부귀,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외롭게 지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당신의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내게로 오라. 너희가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너라. 네 짐은 전부 다 내 멍에에 던져버려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있는 멍에의 지게에 내 짐 다 맡겨 버리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기도로써 맡기고 나가면, 주는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짐을 대신 걸머지고 일생을 평안하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범죄한 인간들에게 지워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청산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 피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주님이 베푸시는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누리며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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