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5> 가난한 사람들 위해 ‘나눔의 집’ 활동 시작


201802090001_23110923898763_1.jpg
1980년대 한국교회엔 민중교회 운동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정작 성공회 안에서 전개됐던 사회선교 활동은 중단되거나 정체 상태였다. 성공회 청년운동을 하는 동료들과 어떻게 교구 안에서 민중선교의 불씨를 다시 지펴낼 수 있을지 모색했다.

당시 성공회에서는 한국 산업선교 역사에 영향을 준 김요한(존 데일리) 주교의 활동도 맥이 끊겨 있었다. 산업선교를 위해 세워진 영등포교회, 대학생 선교를 위해 세워진 대학로교회와 신촌교회는 일반 교회로 전환됐다. 약수동교회에서 진행하던 야학도 새로운 사제가 부임하면서 문을 닫았다.

하나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은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었다. 당시 약수동교회에서 운영하던 야학을 위해 캐나다의 한 교회에서 지원금을 보내왔다. 이 지원금은 나눔의 집 운동을 시작할 씨앗자금이 됐다.

1986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나눔의 집이 문을 열었다. 성직자도 없이 신학생과 청년들에게 새로운 선교활동이 위임됐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성수 주교와 박경조 교무국장의 지지와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선교운동을 시작하는 우리를 믿고 흔쾌히 일을 맡겼다.

나눔의 집 운동은 오랫동안 봉사로 진행됐다. 초창기 전일 근무하던 탁아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최소한의 활동비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을 먹고 마실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눔의 집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걱정했지만 우리는 누구에게도 활동비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도시 빈민선교의 전통에 따라 처음 6개월은 아무런 선교를 하지 않았다. 주 1회 무료 진료로 주민을 만났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들의 필요를 알아가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우리에게는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온 구호 라면이 유일한 식량이었다. 하루는 너무 허기가 져 라면 6개에 물을 채우고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난다. 선배가 사 온 통닭을 먹고 남은 뼈로 이튿날 아침 곰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주민들을 만나며 맞벌이하는 부부들의 육아 고충, 아이들에게 새 동화책을 사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엄마들의 사연,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접할 수 있었다. 1987년 나눔의 집은 좀 더 넓은 공간을 얻으며 낮에는 탁아소로, 저녁에는 야학교실로 운영됐다. 밤에는 집이 지방인 야학교사와 월세를 아끼고 싶어 하는 야학생들과 함께 잠을 잤다.

한번은 나눔의 집 앞 구멍가게에서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려던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가게 주인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나눔의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재혼하며 계모와 함께 살다 적응이 어려워 여러 번 가출을 감행한 아이였다. 아버지를 찾아 아이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처지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며 나눔의 집에 아이를 두고 돌아갔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함께 살기 힘들어 가출한 여자 중학생을 비롯해 어려움에 부닥친 아이들이 하나둘 나눔의 집을 찾아왔다. 나눔의 집은 차츰 마땅히 보낼 곳 없는 아이들의 공간이 되어갔다. 집과 가정에 돌려보낼 수도 없고, 가정이 있어 시설로도 보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함께 살면서 도시락을 싸주는 일 외에는 없었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