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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0> 결혼 앞두고 김구 선생 서거… 예식도 미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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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짜릿한 사랑의 추억이 있다. 서울 남산에 신학교가 설립되던 그 첫날부터 같은 날 학교 입학등록을 하러 왔던 한 여자 신학생을 좋아하게 됐다. 아내 나신복이다. 나는 그를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눈이 크고 아름다웠다. 조선신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자퇴하고 나온 12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를 ‘조 선생’으로 불렀다. 나는 학생회 총무로, 그는 서기로 활동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관심이 커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나 선생’은 평북 신의주 제2교회 한경직 목사 밑에서 자랐다. 한 목사의 외딸, 외아들과 한마당에서 함께 자랐다고 한다. 그의 고모 나창석 권사 밑에서 딸처럼 자랐다. 내 어머니는 의산성경학교에서 나 권사에게 구약을 배웠다고 했다. 나 권사는 평양숭의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신의주에서 한 목사와 동역했다.

우리의 약혼식은 1949년 4월 26일 열렸다. 영락교회에서 운영하는 영락보린원이라는 고아원 마루방에서였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다이아몬드 반지나 진주 목걸이가 아니었다. ‘존 밀턴 전집’ 한 권이었다. 가죽 장정으로 옥스퍼드 1900년도 판이었다. 밀턴의 ‘실낙원’과 ‘복낙원’ 그리고 몇 편의 시를 담은 이 책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서에 속했다. 아내는 18금으로 된 네모난 시계를 선물로 준비했다. 내 사랑의 언약은 이렇게 밀턴에서 시작됐다.

우리의 결혼식은 7월 1일로 잡았다. 졸업식 3일 후였다. 그런데 약혼식 두 달 후 국가적 참변이 발생했다. 국군 장교 정복을 입은 이 나라 군인이 서대문 경교장에 들어가 백범 김구 선생 앞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을 향해 연거푸 세 발을 쏘았다. 백범은 그를 향해 “네 이노옴∼”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범인은 육군 포병대위 안두희라고 했다. 이날 흉사로 온 겨레가 놀랐다. 49년 6월 26일이었다.

졸업식은 6월 28일이었다. 가장 슬프고 우울한 졸업식이었다. 온 나라가 길거리에서 통곡하는데 우리는 남산 위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나는 결혼식을 뒤로 미뤄 7월 5일로 청첩장을 고치고 교회에서도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김구 선생의 국민장이 7월 5일로 발표됐다.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이틀 더 연기해 7월 7일로 바꿨다. 슬펐다. 이 세상에 누가 결혼식 날짜를 연거푸 바꾸고 싶었을까. 교수형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 계시는데 무심한 아들은 그래도 결혼식을 올려야만 했다. 졸업식 다음 날 아내 될 나신복과 형무소를 찾았다. 아버지는 소리 없이 우셨다. 내 슬픈 결혼식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라 김구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었다.

서대문형무소 형목(刑牧) 박창건 목사는 내가 결혼식 날 신을 구두를 구해줬다. 형무소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검은 모닝코트 예복을 결혼식 들러리가 입으라고 빌려 주었다. 김양선 목사는 자기가 아끼는 예복을 나에게 입혀줬다. 나는 온몸에 남의 것을 걸치고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영락교회였다. 당시엔 천막교회였다. 주례는 한경직 목사가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박형룡 박사가 내 어머니 곁에 앉으셨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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