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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27> 北 전쟁박물관 소재지에 ‘화해의 예배당’ 건립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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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은 미국 공화당 부시 정권이 클린턴 당시 민주당 후보에게 정권을 내주면서 미국의 세계 정책이 진보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해였다. 한반도에서는 61년부터 30년을 이어온 장성 출신 대통령들의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던 해였다.

그해 9월 나는 미국 윌리엄캐리대 부총장 데일 키츠맨 박사, 미국-북한바로알기센터 사무총장 찰스 위크맨 박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초청자는 김일성종합대 박관오 총장이었다. 당시 북한 지역을 방문했는데 나는 그들이 제시한 장소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대학 측은 묘향산 국제친선관을 제안했으나 나는 황해도 신천 전쟁박물관을 제시했다. 또 평양의 혁명박물관 대신 개성과 휴전선 지역의 콘크리트 장벽과 판문점에 가자고 말했다. 그들은 내 제안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나는 두 미국인 학자와 함께 6·25 최대 격전지 황해도 신천과 휴전선 일대를 이틀간 답사할 수 있었다.

황해도 최고 기독교 도시인 신천은 6·25전쟁 당시 500여명을 함께 묻었다는 수십 개의 거대 분묘와 이 분묘들 복판에 전쟁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은 이 참담한 전쟁의 현장에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화해의 예배당’을 세워야겠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개성으로 향했다. 콘크리트 장벽을 둘러보고 판문점에 왔을 때 부총장 키츠맨 박사는 이곳에 ‘평화의 예배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한시해 전 북한 유엔대사가 소감을 물었다. 키츠맨 박사와 나는 황해도 신천에 화해의 예배당을, 판문점과 개성 사이에는 평화의 예배당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위크맨 박사는 그 이유를 소상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지금도 이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원한이 맺힌 죽음의 골짜기에 화해의 예배당이 세워지는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휴전선이 그어져 있는 세계의 흉물, 판문점에 평화의 예배당이 서야 한다는 기원은 그날 이후 나의 기도에서 빼놓은 적이 없다.

그즈음 아내 나신복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92년 10월 8일 미국 LA 선한사마리아인병원 수술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90년 직장암 수술을 받고 어려운 방사선 치료까지도 이겨냈던 아내였다. 91년 10월에는 금강산 만물상을 따라 비로봉 정상에 오를 만큼 건강을 유지하는 듯싶었다.

하나님은 아내와의 평화롭고 복된 동반 생활이 50주년 금혼식까지 계속되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 아내는 그날까지 민족과 함께 풍운을 헤쳐 가는 한 불우한 독립운동가의 며느리로 살아왔다. 그리고 교회 울타리 속의 안전하고 고요한 목회의 길보다 거친 세파 속에서 광야의 목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아내로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장례예배와 하관예배는 경기도 화성 바울의 집에서 거행됐다. 평소 아내를 아껴주던 많은 벗들이 찾아줬다. 후암교회 장로님들도 한 분도 빠짐없이 그 먼 길을 찾아주셨다. 아내를 사랑하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슬피 울며 애도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아침마다 아내의 무덤을 가꾸며 그 묘비를 쓰다듬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남긴 모란봉 언덕에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앞에서 손을 흔들고 집무실로 나가곤 한다. “에스라처럼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오늘도 당신과 함께….”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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