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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승율 <3> 경북고 야구부 주장 맡아 삶의 원칙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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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이 되니 ‘그래도 경북고는 가야지’ 싶었다. 당시 경북고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였다. 정신 바짝 차리고 1년 공부한 끝에 당당히 합격했다.

경북고 입학 후 새날동지회에 들어갔다. 새날동지회는 이승만정권의 독재정치가 배태한 시대적 산물이다. 1960년 4·19혁명 직전인 2월 28일 대구고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3학년 학생들은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 개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2·28 대구학생의거’ 사건이다. 이들은 대학 진학 후 새날동지회를 결성했다. 경북대 대구대 계명대 학생을 주축으로 대학팀,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대구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을 모아 고교팀을 각각 구성했다. 나는 2기 회원이 됐다.

중학교 입시 좌절로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새날동지회를 통해 분출됐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사회사상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였고 가장 존경했던 위인은 원효대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영혼을 팔아서까지 진리를 얻고자 했던 파우스트, 현실 참여를 통해 대중을 구원코자 했던 원효대사, 개혁주의적 민족운동가 안창호 선생을 동경했다.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과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보들레르의 ‘악의 꽃’,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심취했다. 대구의 유명한 ‘돌체’라는 막걸릿집이 아지트였다.

1학년 때엔 등산부장을 맡아 팔공산 가야산 주왕산 속리산 등 태백산맥을 따라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쏘다녔다. 이를 통해 신라 화랑의 후예로서 호연지기를 배웠고 경북지방 지도자들과도 안면을 익혔다.

2학년 때 야구부 창단 멤버로 들어가면서 나의 반항적 기질은 조금 다듬어졌다. 창단팀 주장을 맡으면서 팀워크의 중요성, 전략의 필요성, 권위에 대한 승복 등 귀중한 삶의 원칙을 배웠다.

이처럼 고교시절 가졌던 화려한 꿈과 실험정신은 충실하지 못했던 학업으로 인해 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연이어 서울대 입시에 실패하고 삼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절망의 와중에 지금도 잊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됐다. 경북고에 수석 입학한 중학교 동창이 자살한 것이다. 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성적이 뛰어나고 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업을 팽개친 나와는 대조적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친하게 지냈다. 나의 외향적 성격과 그 친구의 내성적 성격이 묘한 콤비를 이루었다고나 할까. 고3이 되자 그 친구 누나의 권유로 그와 함께 6개월간 하숙했다. 그 친구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나는 매일 밤늦게 술 마시고 들어와 개똥철학과 궤변을 늘어놓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서울대에 낙방하고 재수해 연세대 인문계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 길로 우리 사이는 멀어졌다. 소문으로는 사귀던 여학생과 헤어지면서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가에 들렀을 때 친구 누나는 나를 보자 멱살을 잡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내 동생 니 때문에 죽었다. 니가 죽였어.” 그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삼수할 생각도 싹 사라졌다. 나는 그의 자살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자책감으로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그래서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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