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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성경의 전체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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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전체 흐름

이근호

[ 머리말 ]

 

어느 책이든 이야기 흐름이 있습니다. 흐름을 무시하고 책을 읽으면 엉뚱한 데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특히 천국과 지옥을 겨냥해서 적어 놓은 성경책을 흐름을 놓치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흐름을 고려하지 아니하면 일방적인 주장을 진리처럼 사용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다 파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 글은, 성경 전체의 속내용을 한 눈에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목적을 두고 써 보았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사건 위주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책이라면 시중에 성경 handbook(지침서)로서 많이 나와 있습니다. 본 글은, 하나님이 일관되게 역사 끝날 까지 밀어붙이는 원 뜻이 있습니다. 이 핵심 되는 원 뜻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본론에 앞서서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잘못된 일입니다.

 

(1) 인간 구원 위주로 성경을 대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성경을 보면 옳지 않는 해석이 됩니다. 자신의 구원보다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2) 인간 세상 위주로 성경을 대하지 마세요.

인간 사회에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이나 국가적으로 복잡한 난제들이 있게 마련합니다. 이런 인간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경이 있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3) 개인적인 행복과 심리적인 안정을 위하여 성경이 있다고 여기지 마세요.

사람은 불안과 근심에 싸여 살아갑니다. 교회에 나가서 마음이 안정을 찾고 보다 행복한 정서적인 생활을 요구합니다. 또 생존 경쟁에서 오는 처세술도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취직을 한다든지, 멋진 결혼을 얻기 위해 행운과 요령을 안겨 주기 위한 선행 쌓는데 도움 주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하십니다.(골로새서 3:2)

(4)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 그리고 선교나 전도를 위하여 성경책이 있다고 여기지 마세요.

사람은 자기 일을 갖게 되면 그 사업체나 조직체를 거의 우상화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자기 조직체를 번영과 발전에 몰두하게 되면 그 집단과 교회가 곧 우상이 됩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정신없이 이웃 업체와 무서운 경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교회라는 이름의 이런 신종 바벨탑의 번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성장을 노리고 벌리는 구제 사업이나 사회 봉사 사업이나 이웃 사랑이나 교회 내의 권위 잡기, 혹은 서로 섬기기 운동 같은 것도 성경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5) 자신의 건강을 위해 성경이 있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안에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신비의 건강법이 들어 있다고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을 죄라고 간주하십니다.

(6) 신비로운 종교 체험을 터득하고 획득하기 위한 비법이 성경 안에 들어 있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뭔가 자꾸만 소유해서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특히 기도나 금식이나 교회 봉사에 열성인 사람은 이런 신비로운 체험들을 지니고 남들 보다 신앙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깁니다. 더욱 더 가증스러운 것은, 이런 종교 테크닉으로 돈 되는 사업에 나서려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남들 보다 찬양 인도를 더욱 뜨겁게 유도한다든지, 감동 어린 기도회 인도를 주특기로 갖고 있다든지, 아니면 전도 기술이 뛰어나다든지 아니면, 특이한 간증거리가 있다든지, 아니면 깊은 신학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다든지 하는 유혹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간추려서 말씀드린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도 아니요 복음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

 

2. 성경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봐야 한다.

 

(1)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 우주와 인간을 향하여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신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평신도 깨우기 훈련, 제자 훈련, 전도 일꾼 같은 것을 훈련시켜 교회를 키우기에 급급해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서 공부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대하는 의도까지 다 파악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참고적으로 말씀 드려서, 교회는 '훈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복음은, 더 키우고 포장하고, 질을 개선하고, 상품화 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 어떠한 존재이냐를 판정해 주는 심판의 기준으로만 작용될 뿐입니다.

(2) 천국과 지옥이라는 마지막 심판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간 모든 세계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에 우주의 끝에 서 있다고 여기고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세상적인 탐욕에 비위맞추는 그런 성경 해석이 안 나올 것입니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 끝(종말)이란 역사를 끝을 두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두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세상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죄악된 것임이 만천하에 다 드러난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끝이란 단지, 십자가 사건의 적용이요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간추려서 말씀 드리자면, 늘 종말이기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 본 론 ]

 

1. 신학의 결론은 이미 십자가로 확정되어 있음

 

예수님은 이런 인간 세계에 대해서 단순하게 말씀하신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 다 버리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33/요한복음 12:25)

이 본문들에서는, 자기 부인과 그리고 '십자가'라는 내용이 같이 덮어 온다. 과연 신학을 한다는 자들이 자기의 신학 작업마저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질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십자가는 사건은 죄인을 사라지는 곳이지 통과하게 하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를 보지 못하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는 신앙인처럼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속지 않으신다.

그저 세상 끝까지 자아만을 최종 신봉하는 사이비한 종교 연극인에 불과하다. 오로지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만을 증거하지 않는 그런 신학 작업도 복음인가? 아니다. 주님은 그런 복음을 남긴 적이 없다. 그저 인류가 옛적부터 끊임없이 벌려 왔던 유신론적 종교의 축제를 위한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인간의 죄를 밝히는 예수님이 아니면 참 예수님이 아니며, 인간의 죄를 밝히는 하나님이 아니면 참 하나님 아니며, 인간의 죄를 밝히시는 성령이 아니면 참 성령님이 아니시다.

성경 해석법 자체를 공격하는 신학이 아니면 참 복음적 신학이 아니며 교회의 역사를 낱낱이 정죄하지 않는 교회사는 참 교회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 형식이나 칼빈과 루터를 높여 주는 교회사나 한국의 초대 부흥사를 부축이고 그것을 긍정하는 역사관은 주님을 모독하기에 충분한 역사관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네들의 종교 솜씨와 의를 치하하기 위하여 주신 것인 줄 알았다. 즉 도구적 이성과 반성하는 이성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그들은 모세교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세교에 대해서 누가 하나님께 고소하겠는가? 모세 자신이 정죄하고 고소한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한복음 5:45)

왜 그들은 모세교에 집착했는가? 그것은 그들 손에 율법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언어를 해독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자질과 혜안과 경건함이 충만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신의 언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스스로 큰 가능성을 거품처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준 것은 그들을 의인 취급해서 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왜 우리 인간들이 원초적으로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안 되는 존재이며 왜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더 나아가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왜 더욱 더 증가해서 더욱 더 교만케 되는지 그 실상을 보이기 위해서 주어졌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죄와 의는 자신들의 행동하기 나름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전적으로 악마에 매여 있어 선은 하나도 없고 오직 악 덩어리인 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때로는 반성도 하고 겸손해 하고 회개도 하고 자복하며 금식까지 할 줄 아는 그런 인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 죄의 또 다른 양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18-19) 더구나 자신들을 악마의 자식이라는 정죄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격노했다.(요한복음 8:44)

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석하고 살아간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와 동기를 전혀 몰랐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성적으로 풀이하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 잘 믿기 위한 숱한 방법론들을 창안하는데 열중했다. 인간들 행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신 모독 행위와 실수를 사전에 이미 방비하기 위한 철저한 대비책도 구상했다. 한결같이 하나님 잘 섬기고 영광 돌리기 위한 의 축적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말씀을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 인간들의 죄를 전부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의 언어적 속성을 통해서 침범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였던 것이다.

구약 성경은, 인간의 죄가 어디까지 뻗쳐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왜 종교적 이성을 지니고 종교적 감정이 있고 종교적 열의가 가득찬 인간들을 하나님이 죽여야지만 되는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한 기본 자료철이 바로 구약 성경이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6)

영이, 문자 해석을 고수하는 인간에 대해서 철저하게 구석구석 비집고 들어가 시비 걸고 정죄한다. 왜냐하면 영은 오직 십자가 사건만을 재현하시는 영이요 오직 이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능력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7-10)

인간은 하나님의 언어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자격자 못되었던 것이다.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그런 죄인일 뿐이었다. 언약의 말씀은 오직 하늘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들 사이에만 성취가 가능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외롭게 죽어야만 제대로 해석이 드러나는 그런 말씀이었다. 구약의 말씀 하나 하나가 오직 십자가에 부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바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들 두 분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십자가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해석이 요구될 뿐이다. 인자의 살과 피가 왜 인간들의 살과 피를 제쳐두고 유일하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신체인가를 알려야 될 책무만이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져 있다.

이 십자가의 복음 전파라는 범주 안에서만 신학이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서만이 인간이 전적으로 부정당하기 때문이요 하나님 약속의 성취성만 남기 때문이다. 구약 때의 율법이나 신약 때의 십자가나 모두 다 인간을 철저히 정죄하기 위한 언어이다. 예수님과 우리들을 비교하기 위한 말씀이었다. 이로서 성경 해석의 결론은 나 버린 상태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도 오직 이 결론 이외에 다른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신약 성경을 기록케 하셨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 복음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해서 모든 말씀의 결론이 오직 십자가로 쏠리는 것뿐인가를 증언하고 소개하는 일만 남았다. 형식적인 논리의 틀과 구조는 십자가라는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없음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전달되어져야 한다.

 

2.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 구약 성경

 

우선 신약에 비로소 나타난 복음의 내용이 어떤 구조로 내어 있는 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복음 26:26-28) 여기서 예수님의 피와 살만이 언약의 피로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언약의 피'는 어디서 나온 사상인가? 요한복음 1:29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지칭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여기서 '어린 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구약에서 피 흘리신 어린양의 정신에서 나왔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희생양의 입지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이상한 나라이다.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지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애초부터 구상했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타 국가와 비교하기를 원하셨다. 다른 국가에 없는 게 이스라엘 나라에는 있다.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진 동기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에 있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에 갇혀 있었을 때에, 모세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따로 빼내어 가겠다고 알려 온다.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신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심을 준수하시기 위해서이다(출애굽기 3:15-17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런데 애굽나라가 호락호락 히브리인을 내 보낼 의사가 없다. 바로왕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출애굽기 5:2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세상나라의 특징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무시한다. 물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축복 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법칙도 무시한다. 이 무시의 대가는 오직 저주밖에 없다. 반대로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통해 알려진 조상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 그들은 어린양을 잡아 피를 낸다. 그리고 그들은 심판의 순간에 피가 발린 집안에서 양고기를 나누어 먹게 된다. 어린양의 희생의 가치를 음미한다. 무서운 죽음의 사자로 건너 뛰어 가게 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린양의 희생이 주 내용이 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들을 살리는 근거는 그 어린양의 희생에 있었다. 그 어린양은 흠이 없는 어린양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결코 히브리인들이 잘나서 구원한 게 아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흠이 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이 구원의 약속으로 제시한 대리 희생물을 의존했다. 히브리인들이 단순히 혈육으로 아브라함 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하면 구태여 어린양의 피를 집 앞에 바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히브리인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잡족들도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내려 주신 약속 안에 기거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저주받을 민족들을 치겠다고 하셨다. 이제 이 전쟁에 누가 동원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림을 받아 탄생한 이 이스라엘 국가가 동원된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없는 게 들어 있다. 그들은 끝까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안에 있어야한다. 그래야 지만 계속해서 하나님 소유가 되고(출애굽기 13:1) 또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왕의 나라가 된다. 이로서 아브라함 약속은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제사, 그것은 이스라엘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길에는 전쟁, 전쟁의 연속이다. 그들의 적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는 국가들이다. 그들은 약속 대신 자체적인 힘을 의지하고있다. 즉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면서 정치하는 국가들이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공로를 기초로 한다. 이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물로 주어진 것이 증거궤, 즉 법궤이다. 증거궤는 증거판이 들어 있다(출애굽기 25:16). 무엇을 증명하는 판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십계명이 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판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약속이 깨어졌지만 그 증거판을 담고 있는 법궤의 뚜껑에 발라지는 희생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약속의 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제사장의 최종의 목표는 바로 증거궤 뚜껑에 피를 발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진영에는 도달되지 않도록 방지하는데 있다. 마치 유월절이 지나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서 계속 반복되고 이어지는 것과 같다. 그래야지만 애굽나라와 같은 적들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구원되고 적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궤멸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쟁 방식이 창세기 3:15를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 취지도 여기에 있었다. 어떤 때, 모압나라의 왕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발람이라는 예언자는 고용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저주를 다음과 같은 축복 선언으로 전환시키고 만다(민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여호와께서 허물과 죄를 용서했기에 다른 민족과 함께 심판의 대상이 안 되는 방식으로 그들만을 구원하시고 남기신다. 따라서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군대이다(출애굽기 12:41). 그들의 무기는 법궤이다. 즉 제사를 통한 죄용서함의 은총뿐이다. 민수기 10:35-36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이제 이 법궤를 앞세우고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의 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이다. 결국 국가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들어 계시다는 말은, 전에 조상에게 약속한 그 핵심이 "흠 없는 의인의 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 건설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상의 모세 언약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모세 언약

심판하는 근거 : 율법 어김(의가 없음)

은총 베푼 증거물 : 법궤에 발린 피(의가 있음)

은총 받은 자: 국가 이스라엘

거부자 : 이방 나라

거부 정신: 선택된 국가의 유일무일성을 거부

심판하는 방법: 땅에서 정복당함

 

이것을 새 언약과 비교해 보자

 

심판하는 근거 : 율법 어김(의가 없음)

은혜 베푼 증거: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은총 받은 자: 유대인 중 남은 자와 빈자리에 보충해서 들어가게 된 이방인들

거부자 : 자기의 종교적 의와 성과를 축적하는 자

거부 정신 : 인간에게도 선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

심판하는 방법 : 심판주가 강림하여 땅이 소멸됨

 

그렇다면 이 유사점에 근거해서 앞 뒤 가운데 있는 모든 언약들에 대해서 똑같은 틀을 사용하여

정리해 볼 수 있다.

 

노아 언약

 

심판하는 근거 : 땅의 은혜성 확보(무지개 언약)

은총 베푼 증거물: 정결한 짐승의 희생

은총 받은 자 : 노아 식구

거부자 : 함과 가나안

거부 정신 : 덮어 줌의 원리에 무지했음

심판하는 방법 : 종이 됨

 

아브라함 언약

 

심판하는 근거 : 복의 민족 출현(의의 민족 출현)

은총 베푼 증거물 : 할례 받은 자식(이삭)의 희생

은총 받은 자 : 아브라함과 그 자손

거부자 : 에서

거부 정신 : 선택 행위 무시하고 혈통적 우선권 주장

심판하는 방법 : 노예가 되고 땅에서 유리하게 됨

 

다윗언약

 

심판하는 근거 : 선택된 왕이 따로 존재함(의를 제공하는 왕이 따로 있음)

은혜 베푼 증거물 : 왕과 성전

은총 받은 자 : 유대 나라

거부자 : 정치적 왕들

거부 정신 : 힘으로 유지되는 국가와 종교를 수립하고자 함

심판하는 방법 : 왕이 사라지고 성전이 사라짐

 

이상을 정리해 보면 알 수 있는 사항은,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그 모든 행위가 전부 하나님으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의 윤리며 양심이며 경건함과 거룩함과 성의 같으면 하나님께서도 가상히 여겨 받아 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까지 다 죄에서부터 나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 구약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의근 본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언약들의 요약에서도 나왔듯이 어쨌던 "내가 구원되어야겠다"는 구원의지에 있다. 즉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어서라도 기어이 내가 구원받고야 말겠다는 맹목적 자기 집착 속에는 악마가 들어가 있다. 곧 죄 있는 것도 영원한 축복의 대상이 되어 보겠다는 노림수이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이 에덴 동산에 추방된 것은 단지 선악과를 따먹어 선악을 아는지 식인이 되었다는데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서는 영원한 생명이 누릴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 생각이다. 그런데 악마는 이것을 거부하고 죄인, 즉 선악을 아는 지식도 함께 안 상태에서 영원한 생명에도 참여해 보겠다는 집념을 보인다. 이러한 악마의 소원과 같이 하는 것이 죄인들의 타고난 마음이다. 하나님께 죄 용서받아서 기어이 자신이 영원히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로서 하나님이 주신 법들을 고이고이 간직한 것이 구약 성경의 내막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전쟁을 벌려 온 것이 여호와 전쟁이다. 거룩으로 비거룩을 영원토록 저주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영원히 안 되는 일을 해 보겠다는 인간들은 온갖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몸부림을 시도해 본다. 그러나 나올 수 있는 의는 없고, 믿음이라는 것도 흉내만 내고 모방만 했지 인간 내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모방(미메시스: 시대마다 다른 각도에서 재현)이요, 상한 심령도 모방이요, 이웃 사랑도 모방이요, 찬양도 모방이요, 거룩한 제사도 형식적이고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무엇도 인간 쪽에서는 아무 것도 생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계속적으로 선악을 아는 죄인으로 간주하여 끝까지 배척하시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의 그 원리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시다. 선을 행해서 구원받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처사이다.

하나님의 의는 결코 선악 체제 안에서도 주어지지 않는 법인데 문제는 인간이 그 선악 체제 속에 태어날 때부터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구원은 생명 나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출발 지점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불행이다. 생명 나무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서 계시다. 따라서 그분이 긍휼을 입혀 주서야 지상의 인간에게도 긍휼이 주어지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애굽기 33:19)

이 본문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겠다'는 대목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이어 은혜와 긍휼이 나온다. 즉 '여호와의 이름' 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와 긍휼이 다 들어가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은혜와 긍휼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자의로 선택하신 결과에 준할 뿐이다. 즉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와 원인이 여기에 있다. 참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권리도 자신에게도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구약이 해석되어야지 만약 그렇지 않고 인간들의 자체적인 구원 방법론에 의미를 주면 또 다시 유대교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구원은 순전히 '여호와 이름'의 자의권에 달린 것이다. 그래야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정신이 유지될 수 있다.

 

3. 십자가를 말해주는 새 언약 성경 (신약 성경)

 

십자가 지라는 이야기는, 죄인으로서 갈 바를 가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형상이다. 이사야 53:6에 보면,"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켜셨도다"라고 되어 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모습으로 아버지의 심판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제자들도 같이 자신의 죄인 됨의 모습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만 한다. 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제시한 율법에 의해서 다 드러났다. 모든 인간들이 사탄의 꾐에 빠져 온전한 율법 완성으로서의 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진정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는데 있음을 안다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곧 이 세상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고 또한 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만나서 영생을 얻고자 했던 한 젊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영생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 찐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태복음 19:16-22).

재물을 포기하지 못한 청년은 대신 예수님을 포기하게 된다. 예수님과 세상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묘책은 있을 수 없다. 청년은 온전하게 계명을 지켰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계명의 완성을 거부했다. 재물 때문에 근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계명의 진수인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계명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 청년이 참으로 온전을 원한다면 예수님을 따라야 했다. 이처럼 십자가 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죄라 여기고 버려 버리고 예수님의 운명의 길로 나서는 것을 말한다. 누가복음 14:25-27, 그리고 33에 다음과 말씀이 나온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 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제자란, 스승의 뜻에 동조하여 삶을 같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는 자는 제자도 될 수 없을 뿐더러 구원에도 도달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옛 생활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사탄과 한 패가 되고 예수님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처신이 용납 안된다. 세상은 두 패로 나뉘어져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한편에는 소속이 되어 스승과 함께 수난 받아야 한다. 세상의 사탄의 고수하려는 경제적 욕망, 정치적 욕망, 종교적 욕망과 싸워야 한다. 사탄이 제시한 이 유혹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제안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탄을 거부하는 동시에 이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거부의 몸짓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다. 그저 이 땅에 살면서 수난을 당하고 욕을 먹고 고생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수난에도 이유가 정당해야 한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과 정치적 야심과 이 세상에 대한 희망에 집착을 하다보니 주어지는 고생을 오히려 사탄적이며 사탄의 나라에서 영웅으로 칭송 받는 순교자가 될 뿐이다. 주여, 주여 소리치면서 순교의 길로 갔건만 그 모든 것이 이 세상 나라의 영광과 발전에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주의 제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제자이다.

예수님의 제자란,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보내준 제자가 될 수 없다. 요한복음 5:53-54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떠나고 만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한복음 6:60,66).

예수님께서는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한복음 6:65). 그리고 나서 12제자에게 묻는다. "너희도 가려느냐"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은 제자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시기를 "내가 너희 12를 택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자격은 바로 예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마태복음 11:25-27에도 같은 취지가 나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계시 받을 자를 자신의 소원에 근거해서 정해졌다는 것은, 모든 권세가 사탄으로부터 자기에게 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현재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항상 사탄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굴욕의 신세에 놓여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대로 구원받을 자를 제자로 뽑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실세가 이미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12제자의 선택은, 기존의 사탄의 세력을 무안하게 만들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발을 뜻한다. 옛날 국가 이스라엘의 시작은 바로 애굽나라의 종되었던 히브리인들이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이 해방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 그들이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선택에 중심부를 차지한다. 오직 약속의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들의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 그 약속의 국가를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세워진 국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변의 우상 국가를 멸절시키려고 한 것처럼 이제 새로이 발생되는 주님의 나라를 통해 이 세상 나라 전부를 짐승의 나라로 간주해서 멸망시켜 버리고 그 자리의 인자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결코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한복음 15:16).

따라서 적어도 제자라고 한다면 주님의 선택의 은혜가 온 삶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생존과 영생의 근거이다. 따라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의 선택의 요소 외의 것을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미 생명의 근거는 확실해졌으니 따로 스스로 살고자 애쓰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만약 스스로 사는 길을 모색하고 그 길로 가고자 한다면 가롯유다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마귀를 하나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선택의 의도와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자라면 비록 잠시 제자가 되어 권능을 행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고 복음을 전했다 할지라도 항시 탈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택의 사랑이 담겨 있는 자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누가복음 4:25-2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은 옛날 출애굽 시절의 여호와의 선택 행위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역도 선택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병자를 다 고치자는 게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자는 게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간다. 하나님은 선택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은혜성을 극도로 높이신다. 따로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사랑 받을 자격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랑은커녕 오히려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랑이 주어진 것은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게 하려 함이다.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인간세계를 선악 체제로 물들려 놓고 인간들과 합세해서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 행위에 반기를 들게 한다.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무효화 해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의 선택 행위가 불합리하고 공평치 못한 처사라고 항변하게 한다. 그리고 선악에 대해서 인간에게도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 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들어있는 신적인 요소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일축하신다(이사야 2:22). 모든 육체는 풀에 지니지 않고 인간의 모든 영광은 잠시 피었다가 사그라지는 꽃에 비유된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즉 말씀뿐이다(베드로전서 1:24-25).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 행위를 가능케 하기 위한 말씀이다. 즉 누가 선택된 제자인가 아닌가를 판정하기 위해 복음은 전달된다. 그래서 만약 복음을 제대로 전달되지 아니하면 선택되지도 않은 자가 가롯 유다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간주되는 수도 생길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저지하고 방해하기 위해 거짓 복음 전달자들을 이용해서 복음의 영광성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망하는 자에게만 실효를 거두겠지만.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린도후서 4:3-4).

사탄은 인간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과 경쟁에 나서게 만든다. 누가 더 솜씨를 부려서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확보하느냐에 대한 경쟁이다. 예수님의 복음전파를 방해하려 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 쪽으로 쏟아지는 것을 우려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살해하기를 결정한다. 예수님 정도는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는 주장했다. 그러나 바로 예수님이 죽는 것이 인간세계의 본체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남긴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마가복음 12:1-9).

예수님이 살해되는 십자가의 사태는, 사탄으로 봐서는 자신의 권세가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이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요한복음 19:30). 즉 예수님이 마귀에게 패배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이 예수님을 놓쳐버린 순간이다.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실체로서의 사탄의 본질이 만천하에 다 들통난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에게 경배하고 찬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배후에 사탄의 조종을 받는 사탄의 제단임이 드러났다.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로도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대신할 수 없다. 위장하거나 흉내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선택된 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탄에 붙잡혀 있어 사탄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주님의 일방적인 사죄의 은총과 선택 행위만을 고수하고 나머지 인간들의 자기 공로를 스스로 깎아버리지 않는 단체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 단체는 나름대로의 존재의 가치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활동을 대신하려 덤벼들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단체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앞을 가로막은 사탄의 군병들로 작용한다. 여기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지상을 향해 사역을 할 필요성이 있다. 성령을 보내지 아니하면 그들은 선택행위에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된 것에 대해서 전혀 보탬을 준 경력이 없는 자들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하여도 고작 지나간 과거 인물로서의 스승을 소개하는 형식에 머물고 만다. 중단 없는 선택 행위의 대상으로서 제자가 되고 또 그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고 한다면 전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했던 선택 행위가 현재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성령 안에서 성취할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그런 입장에서만 아버지의 지속적인 뜻을 지상에 펼쳐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 안에 제자들을 합류하려 하신다. 요한복음 14:9-12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제자들을 참여시켜 제자들을 통해서 아버지와 주님 자신의 일을 계속 실시하기 위해서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 아버지와 예수님 만의 세계에 제자들이 끼여든다. 이렇게 끼여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처소가 필요하다. 왜 따로 인간들을 위한 처소가 새로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케 한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진행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일 때문에 보내심을 받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주된 임무는, 주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기존 세상의 죄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멸망되는 이유를 선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주님의 의한 새 창조 작업의 개시를 알리는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7-11).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죄가 드러나고 그 죄의 기준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다. 그리고 회개가 촉구되면서 주님의 선택에 의한 새창조 사역도 계속된다. 성령의 단체가 사탄과 벌리는 싸움은,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무엇이 진정한 죄인가를 따지는데 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사도행전 2:36-38).

성령의 선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회개하는 자에게만 성령이 계신다는 말은, 성령이 임한 자의 모델적 인간형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해준다.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은 인간들의 죄악으로 유발된 일이라서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의로운 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원인이유대인들이 성전 종교에 집착한 결과라고 공박하고 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사도행전 7:48-53).

스데반 집사의 이와 같은 발언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온 이야기이다(사도행전 7:54). 이럴 보건대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억울하게 달려 죽게 한 그 모든 요소에 대해서 양보 없는 공격과 회개를 촉구하는 특색이 있음이 드러난다. 즉 유대인들은 자신의 공로와 노력과 수고에 의해 건설된 대 유대종교를 수호하는 것에 열중한 반면에 성령이 임한 자들은, 유대인의 그런 신을 향한 열심이 오히려 자기 의를 축적하고자 하는 부질없는 죄악이라고 보고 오직 의인 그리스도가 제공한 의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2-4).

죄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신 일을 무효화시키고 추가적으로 인간들의 의가 더 필요한 것처럼 해석해서 흠집을 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자기 행함=자기 구원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은, 그의 모든 편지에서 예수님을 죽게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대분노를 초래한 죄에 대해 반드시 언급하고 있다.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갈라디아서 1:12)

그 내용은, 인간 나라에는 그 어떠한 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로마서 3:10).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막론하고 이 세상에는 의가 없고 죄밖에 없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은, 메시야 되시는 분의 죽음이 단순히 인간의 실수 차원이 아니라 인간 배후에 악마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 자체를 이들이 공격하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줄기차게 약속한 율법의 완성의 흔적이 이 지상에서 치워버리고 가려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히 희생적 죽음을 근거로 해서 의의 영역과 죄의 영역이 구분 지게 될 것이다. 성, 속의 갈라짐이다. 또한 거기에 상응한 종말의 심판이 이 인간세계에 떨어진다. 종말은 눈앞에 다가왔다. 성령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은 이미 종말에 돌입되어 있음을 말한다. 성령의 오심 자체가 종말에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요엘 2:28-32).

사도 바울은 이미 종말에 접어든 이 인간 나라에서 주님이 어떤 활동을 하시는가에 주목을 한다. 이 주님의 활동의 핵심을 성령의 오심으로 보고 있다. 그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거기에만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7). '성령 안에서'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은 이미 정죄를 당하고 있다. 결코 인간 나라 공장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

성령은 결코 종교단체에서 못 만들어낸다. 성령은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제조할 수 없는 분이다. 성령은 오직 십자가를 알려주는 영으로 오신다.(고린도전서 2:1-16) 보혈의 피를 근거로만 주어진다. 주님께서는, 인간 나라에서 감히 제조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지상에 개입하셨다. 성령 안에서만 의가 있고 거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더럽고 속되고 저주거리이다. 하나님의 진노만 축적케 하는 세월을 무심하게 보낼 뿐이다(로마서 2:5).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죄의 권세를 탈피하지 못한다. 아무리 거창한 성전과 예배당을 건립하고, 또 선교와 순교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도 소용없다. 백날 해봐야 인간 속성의 또 다른 변신이다. 해결책은 오직 주님의 손안에 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린도후서 3:6).

주님께서 성령을 선물을 주지 않는 한 희망 없다. 성령은 바람과 같다.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다. 인간의 열망과 요구가 성령에 오심에 영향을 못 준다. 이것이 완전히 주님의 자기 소관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믿음은, 믿음에서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로마서 1:17) 그 중간에 인간의 입김이나 애씀이나 노력이나 반성 같은 것이 낄 여지가 없다. 인간이 의인되는 것은 완전히 행함과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진 결과를 가지고 사도 바울은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7-28).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4-5). 이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복음이라고 했다(로마서 1:17).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 사탄은 어떤 속성으로 다가오는가? 바로 이 복음을 가리는 것이 사탄이라고 본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 후서 4:4-5).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 육체를 계속 의존하여 의를 축적하려는 시도가 바로 복음을 가리는 적이며 사탄의 짓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나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1-3).

여기서 육체를 가지고 율법 행위의 주체로 보고 있고 성령을 가지고 믿음의 주체로 보고 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성령에서 나오지 율법의 행위에서 나오게 아니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육체로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까지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라디아서 4:29). 복음을 헛되이 하는 육체의 짓에 대해서 사도는 그 항목을 일부 열거까지 하고 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서 4:10-11).

특정 날과 특정 종교의식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복음 전함을 헛수고하게 하는 사탄의 활동이다. 성령으로 제대로 탄생된 의인 같으면 절대로 이런 율법적 행위에 눈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일군들부터 모진 고초를 당할게 뻔한 일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싸움은 복음을 가운데 두고 해석 문제로 일어난다. 하나님의 의가 하늘에서 거저 주는 것이냐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뭔가 수고하고 봉사해야지만 주어지는 것이냐의 싸움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한 분명히 정답을 밝혀 놓았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7-9). 또한 로마서 11:6에 다음도 같이 말씀하고 있다.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가 은혜답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으신다.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오늘날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계시하셨다. 예수님의 그 풍성한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랑을 못하게 입을 막기 위해서이다(고린도전서 1:29). 이제 성도에게 남은 일은,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코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증거인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이유가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함에 있지 새삼스럽게 행해서 의를 축적하라는데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성령 받아 예수 전한다고 주장해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곧이 곧대로 봐주어서는 안 된다. 오직 사도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복음 내용과 일치 될 경우에만 참된 성령을 받은 자요 참 예수님의 증인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행함을 통해 얻을 의는 없다. 바로 이점을 사탄은 싫어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노림수는, 예수님의 선물에서 의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의 종교적 열심 속에서 의를 꺼집어 내어서 주님이 주신 의를 훼손시키고 그 가치를 약화시키려 하는데 목적이 있다. 사탄은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의도를 언제까지나 감출 수만 없었다. 그는 지금도 계속적으로 선악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

인간들의 선한 양심과 감정과 의지의 산물로서 하나님의 복을 따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엉터리 복음을 전 세계에 전도하고 선교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로 판정 나 버린 기존 세계를 그대로 고수하고 유지하고 번영시켜 살만한 세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모든 몸부림이 사탄의 활동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예수님의 의해서 조성된 '아들의 나라'를(골로새서 1:13) 무효화하고 그 가치를 퇴색시키려 들것이다. 고린도전서 끝에서 사도 바울은 저주를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고린도전서 16:22).

도대체 어떤 모습이 주를 사랑하는 것에 해당되는가? 로마서 14:7-8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다. 또 빌립보서 1:20에서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되어 있다.

고린도후서 5:14-15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 되어 있다. 성경에서의 사랑이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생존과 명예를 위해 생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사랑은 은사로 주어지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결국 주님의 행위를 궁극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은사는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워 이긴 전리품으로 주어진 것이다. 에베소서 4: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비로소 주어질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이미 성도가 가졌다는 것은, 성도도 이미 죄로부터, 저주로부터, 지옥으로부터, 율법의 요구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승리했다는 증거이다.

성령을 선물로 얻어 받은 자는 이미 승리한 입장에 있다. 이 승리의 능력이 성도 각 개인마다 사방으로 퍼지게 되어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빨리 죽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립보서 1:22-2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고린도후서 5:8).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을 살아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능력을 전달하기 위해 주님께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린도후서 1:2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고린도후서 4:14). 어째서 이런 능력이 가능할까?

그 이유는 다음 귀절에 나타나 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려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 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린도후서 4:10-13). 성도 안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증거가 뭔가 하면 성도가 더 이상 자신의 목숨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증거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미 영생을 가졌다는 것은 항상 성도 안에서 예수님이 승리자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승리를 가졌기에 살고자 하는 유혹도 이길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다(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다(갈라디아서 2:20).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 이러하다.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워 사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로새서 3:1-3).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로새서 2:12). 위와 비슷한 내용이 히브리서 2:14-15에 나와 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사람과 같은 육체로 오신 이유가, 더 이상 죽음으로 압박을 가해오는 사탄의 공갈에 겁먹지 않는 승리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성도에게는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되어 있다. 따라서 그때부터 성도 안에 있는 옛사람과 옛성품과의 싸움이 항상 벌어진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18).

성령의 소욕은 이런 육체의 소욕을 계속 공격하게 된다.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 엄연한 현실에 대해서(갈라디아서 5:24) 옛성품과 육체의 소욕은 사탄의 유혹에 자극 받아 의심하면서 자기 식대로 살려는 의지를 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서 기어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로마서 8:26-30).

성도 안에 있는 믿음은, 늘 옛성품에 대해서 이미 자신이 죽었다는 현실을 인식케 만든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2-4). 또 로마서 6:11에 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아무리 사탄이 우는 자가 같이 믿는 자라도 유혹하려 하지만 이미 선물로 주신 성령께서는 주님의 자비성을 요지부동으로 유지케 하신다.성도는 이런 믿음이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확증하라고 한다(고린도후서 13:5). 그리고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데살로니가후서 3:2).

그런데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런 믿음이 없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로마서 14:23). 이들은 보여줄 이런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없기에 믿음 대용으로 경건해 보이는 종교적 행함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에게는 적들이 주위에 많았다. 사도 바울이 전하지 않는 짓 예수, 거짓 복음, 거짓 영을 교회 안에서 전하는 자들이 있었다(고린도후서 11:4). 이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광명한 천사를 위장해서 잠입한 사탄의 일군들이라고 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4-15).

그들은 생각하기를, 뭔가 열심히 행하지 아니하면 얻을게 없을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엄격한 자기네만의 종교적인 모든 테크닉과 제도와 조직을 동원하고 거짓 종들은 그 위에 군림한다. 이 모습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 11:20). 사도 바울은 이런 거짓 전도자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이미 승리한 상태이기에 자신을 날마다 죽이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싸움을 우주적 전쟁의 한 일부라고 보고 있다. 성도라면 어느 성도 할 것 없이 싸워나가야 되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베소서 6:10-13).

성도가 싸우는 싸움은 궁극적으로 권세 대 권세의 우주적 전쟁이다. 그런데 이 권세 싸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권세의 원형으로 제시하므로 모든 권세를 통합하고 남음이 있다고 보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로새서 1:16). 원래의 질서 순대로 돌아갔다고 보고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10). 바로 이러한 권세의 원형이 성도들과 함께 있으니 이 우주적 전쟁에서 기죽을 일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권세면에서 상대한 그 원형적 적대세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우주적 전쟁의 막바지에서 드러난다. 소위 적그리스도이다.

그 불법의 사람의 특징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다. 이미 참된 기적과 능력과 기사가 이미 드러난 마당에서 그들은 유사 능력과 기적으로 끝까지 세상의 권세자로 남아 있고 싶어한다. 이들의 거짓 기적은 결코 인간들에게 영생과 의로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 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3-10).

그러면 이러한 자를 성도는 무슨 능력으로 대처하는가? 그것은 죽어도 괜찮다는 복음과 진리의 능력이다. 에베소서 6:13-17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라고 되어 있다.바른 복음을 위해 고난의 길로 나서는 것이다. 이 진리만이 그들을 이길 수 있지 어설프게 비슷한 능력 발휘로 대항하려고 했다가는 항상 지게 되어있다.

이 점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사탄을 대적했던 방법과 동일하고 광야에서 마귀를 물리친 경우와 같다. 거짓 사도에 대항하여 사도 바울이 무엇을 내세웠는가 보라.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고린도후서 11:23-28).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을 위한 고난이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바로 이 고난이야말로 참된 성도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십자가 지고 오라고 본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란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21). 결코 성도들은, 예수님 십자가 고난 덕분에 자기들이 평안한 여생을 보낼 거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 경우가 진리이다.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되고 좁은 길 인생이 펼쳐진다.

성령은 성도들을 고난의 길로나 서게 한다."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베드로전서 4:14). 이 고난 속에서 성도는 제대로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느끼게 된다. 진정한 자기 포기는, 예수님의 자기 포기와 겹쳐진 경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성령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 있어 진리란, 복음의 성립과 그 적용과 그 결산까지 오로지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지 결코 그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하늘은 이미 십자가로 도배가 되어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그 어린양께서 그 모습으로 보좌에 앉아 계신다(5:5-14). 승리의 찬미가 온 하늘에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사 하늘에 가 계시고 사탄은 땅으로 쫓겨나 있다(12:7-9). 그들이 땅에 발악해 봤자 얼마 안 가서 무서운 유황불 구더기에서 심판 받게 된다. 문제는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다. 사탄과 그 하수인들이 발악적으로 분에 못 이겨 그들을 학대하기 때문이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12:13-17)

성도들이 이 땅에서 고난받도록 주님께서 방치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어린양의 증인들이 되어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죽임을 당케 한 것은 단순한 인간들의 몰상식이 아니라 배후의 있던 세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은 인류 전 역사를 계속해서 지배해 온 세력이다. 바로 이점을 확인하기 위해 주님의 종들은 역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지상에 등장되어야 하고 고난받아야 한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12:10-12).

배후 세력은 그 동안 정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언제 정체를 드러내는가 하면은 주님의 증인들에게 계속적인 핍박이 주어지면서 역사 위에 작용되고 있는 모든 권세,즉 국가 와 종교 전체가 예수님의 적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들이 참된 성도를 죽였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3:1-15).

요한계시록에 와서 비로소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다 완성됨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종을 대적하기 위해 사탄은 역사 배후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고 나서는 그 정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참된 성도를 핍박하는 세력은 누군가? 그것은 이 지상에 널려있는 종교와 국가이다. 국가의 권세를 영원무궁토록 이어보겠다는 그런 희망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에게 아부해서 그 사탄의 권세 밑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는 종교계, 바로 이런 자들이 가짜 어린 양으로 행세하는 자들이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그리스도의 적으로 등장되는 것은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잘 정리해 주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4절). 사망이 아담 계통 안에 있는 모든 역사에 다 적용된 것은 요한계시록에 의할 것 같으면 사탄의 권세가 배후에서 완벽하게 장악을 하고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2:11에 있는 말씀처럼, 이런 시대에서 승리란, 다름 아닌 그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11:8에 나와있는 것처럼 복음의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 곳도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곳이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11:7-10).

죽는 것이 승리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짐으로 승리한 것에 근거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후 3일 후에 부활을 맛보게 되신 것처럼 성도도 예수님 이름으로 죽게 되면 부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20:4-6).

요한복음에 보면,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미워하면 얻게 된다는 말씀이 나온다(12:25). 이것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애착이 오히려 사탄에게 패배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생의 나라를 선호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 진정한 승리요 성공이다.이런 승리가 없는 교회를 주님께서는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신다(요한계시록 2장-3장).

 

[ 결 론 ]

 

무엇이 현실일까? 성경에게서 이야기하는 게 현실일까, 아니면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함없이 순환하는 이 안정성 있는 자연계가 현실일까? 우리 인간은 이 대자연 속에 한평생을 지내오면서 이 세상에 너무나도 친숙해져 있다. 자연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포근하게 감싸주었고 살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사랑스러운 세상을 꼭 포기해야만 하는가? 과연 성경 속에 있는 말씀과 이 친한 친구처럼 지내온 세상과 맞바꾸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모든 것은 다 의심할 수 있어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감지되는 체험과 경험을 의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비정한 성경 말씀보다 따뜻한 교인들의 정에 더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죄벌을 받아야 될 이유이다. 교회를 친교 단체로 전락시킨 원인이 여기 있다.

참 성도는 이스라엘에게만 계시한 그 하나님의 계시를 현실을 받아드리게 된다. 베드로후서 3:3-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 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무엇이 현실인가? 세상 사람은 여기서 갈등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말씀의 창조력을 무시하고 싶어 질 것이다. 그 대신 대자연의 위력 앞에는 고개 숙인다. 높은 산 정상을 정복하고 난 뒤에는 "자연이여 영원 하라!"고 고함치고 싶을 것이다. 이 대자연과 죽어도 함께 죽고 망해도 함께 망하고 싶고 지옥 가고 같이 싶어한다. 이런 인간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정없이 공격한다. 이런 심판이야말로 가장 하나님다운 거룩의 자세가 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6:5-7).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한 점 누락 없이 완성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사탄적 세계 안에서 성도의 인내와 믿음은 빛난다(요한계시록 13:10).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세기 6:8).

 

성경의 중심 내용은, 십자가 피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택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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