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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웨슬리 신학의 종교 개혁 신학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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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신학의 종교개혁신학적 특징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증경회장)

머리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교리 내용을 영국 성공회 전통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성공회 목사로서 믿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교리를 자신에게 다가온 성경의 빛과 개인적인 체험 속에서 재해석하였다. 그는 그것을 실제적인 기독교의 삶에 타당하게 만들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적인 정통신학의 내용에 신앙의 내적 체험을 통한 살과 피를 붙여서, 그것을 생동적인 신학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웨슬리 신학의 특성이란 성경적 기독교, 모든 사람에 대한 복음,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다.

 

웨슬리는 그의 생애의 여러 가지 국면에서 루터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미국 조지아 인디언 선교를 위하여 대서양을 횡단할 때에 폭풍 가운데 발견한 모라비안 교도의 의연한 모습에서 감동받는다. 그리고 그는 미국 조지아주에서 스팡겐베르그(Spangenberg)와 만난다. 그는 되돌아와 옥스포드에서 모라비안 교회 지도자 페터 뵐러(Peter B?ler)와의 만난다. 그리고 그는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드스게이트 거리 어느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낭독을 듣고 내적 확신의 결정적인 계기를 체험한다. 웨슬리는 독일어 찬송가를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감리교회의 경건에 루터교의 영향이 결정적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기독교계의 큰 빛“이라고 부른 루터교회의 학자 알브레히트 벵겔(Albrecht Bengel)의 저서인 [신약성경 색인](Gnomon Novi Testimenti)을 참고하여 [신약성경론](Notes on the New Testament)이라는 자기저서의 중요부분을 만들었다.

 

웨슬리가 루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할찌라도 그가 루터를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서 신앙의 내적 체험을 하였으나 그가 루터교인이나 모라비안 교도가 된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루터를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동시에 그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보편구원, 특히 예정의 교리에 있어서 당시 칼빈주의에 반대하였던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에 적대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웨슬리 신학이 갖고 있는 종교개혁 신학의 요소들을 들추어내면서 웨슬리 신학이 종교개혁 신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1. 웨슬리의 참회와 독일 루터교적 경건주의 영향

 

웨슬리의 회심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독일의 경건주의 일파인 모라비안 그룹(Moravians)이다. 첫째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대서양을 항해하던 도중 몰아닥친 폭풍 속에서 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 둘째는 조지아에서 만난 모리비안 선교사 스팡겐베르그(Spangenberg)의 확신에 찬 신앙의 증언 그리고 런던에 되돌아와서 만난 모라비안 런던 교구 지도자 페터 뵐러(Peter B?ler)의 신앙의 조언, 셋째, 그가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 모라비안 모임에서 예기치 않게 그에게 임했던 신앙의 확신 체험이었다.

 

첫째,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여행을 할 때 대서양의 폭풍 속에서도 모라비안 교도들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태도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 1736년 1월 25일 일기에 다음같이 적고 있다: “예배가 시작되면서 시편이 한창 낭송되고 있는데 파도가 덮쳐서 큰 돛대가 산산조각이 나고, 배를 뒤덮어 갑판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큰 마다 깊은 물이 우리를 다 삼켜 버릴 것 같았다. 영국 사람 사이에서는 귀를 찢을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조용히 계속하여 시편을 낭독하였다. 나는 후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을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아니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당신네의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아니오, 우리네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바다 가운데 몰아닥친 폭풍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적 태도에 스스로 내면적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조지아(Gorgia) 선교에서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모라비안 교도들을 찾아가서 그의 구원의 확신의 문제에 대결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조지아에 도착해서 독일 모라비안 선교사인 스팡겐베르그로부터 신앙적인 자문을 받는다. 1736년 2월 7일 일기에 웨슬리는 다음같이 적고 있다: “오글소오프씨가 독일인 교회목사 스팡겐베르그씨와 함께 사반나로부터 돌아왔다. 나는 곧 그의 심령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알고 내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그에게 충고를 부탁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내 형제여, 나는 먼저 당신에게 한 두가지 물어야겠습니다. 당신 자신 속에 증언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언합니까?’ 나는 놀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그것을 관찰하고 또 물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나는 잠시 멈추었다가 ‘나는 그분이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압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을 것으로 희망합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 자신을 압니까?’ 나는 ‘압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빈말 같아서 두려웠다.”

 

둘째, 런던으로 되돌아와서 웨슬리는 내적인 구원의 확신문제 때문에 모라비안 선교사 페터 뵐러(Peter B?ler)에게 신앙적인 자문을 구한다. 그는 뵐러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믿음”이 결여 된 것을 자각하게 된다. 1938년 8월 4일 그의 일기에 다음같이 적고 있다: “옥스포드에 가서 동생을 만나보니 늑막염에서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피터 뵐러도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5일 일요일에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안에서 우리가 신앙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를 구원받게 해줄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즉시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설교를 그만 두어라. 너 자신이 믿음이 없으면서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 나는 뵐러에게 내가 설교를 그만 두어야할지 아닌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읍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시오.’ 따라서 6일 월요일부터 내 영혼이 비록 원점에서부터 시작을 하기는 하였어도 이 새로운 교리(믿음)에 관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 존 웨슬리는 내면적으로 갚은 신앙의 갈등을 갖고 방황하기에 이르고 심지어는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자 하여 뵐러의 조언을 구한다. 1738년 4월 2일 일기에 웨슬리는 다음같이 쓰고 있다: “나는 페터 뵐러에게 내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어야하지 않을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재주를 이 세상에서 감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는 것이었다. ..피터 뵐러는 나와 십여리를 함께 걸으면서 결코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하였다.” 웨슬리는 1738년 독일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중심지인 헤른훗(Herrnhut)을 방문하여 그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셋째, 이러한 신앙적 갈등과 고민을 통하여 웨슬리는 참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의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일기에 다음같이 이 신앙의 체험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녁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에 있는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 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후에 웨슬리는 그의 삶의 목표를 “내가 할 수 있는 한 생동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을 고양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낳고,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것”으로 정한다. 그리하여 세계가 그의 교구가 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구원확신의 체험은 단지 일반적인 불신자의 회심 체험이 아니었다. 웨슬리가 체험했던 것은 바로 200년전 종교 개혁자 루터의 구원확신의 체험이었다. 그것은 불신자가 갖는 회심의 체험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라는 종교개혁적 의인(justification)의 체험이었다. 곧 신앙의 확신 체험(experience of faith conviction)이었다. 루터도 수도사로서 수련하면서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자기애(concupiscentia)을 발견하면서 자기의 구원에 관하여 의심과 회의로 고민하였다. 루터는 다음같이 피력한다: "내가 수도사였을 때 나는 갈수록 아주 버림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육체의 정육을 생각할 때마다 즉 내가 어떤 악한 뜻과 육적인 욕심과 분노와 미움과 형제에 대한 원망을 품을 때 마다 경험한 것이었다. 나는 내 양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노력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자기애와 욕의 정욕이 언제나 되돌아 와서 내가 쉴 수 없었고, 계속적으로 이러한 생각이 나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뵐러에게 상담하여 위로와 도움을 받았듯이, 루터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장 대리였던 스타우핏츠(Staupitz)에게 상담하여 위로와 도움을 얻었다. “오 내 죄, 내 죄, 내 죄”라고 부르짖는 루터의 절규를 듣고 스타우핏츠는 다음같이 위로하였다: “당신는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진짜 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죄를 용서하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당신을 도와주신다면 독특한 죄목이 들어 있는 목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분노를 품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분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타우핏츠의 위로와 권면의 말을 루터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이러한 스타워핏츠이 말은 당시에는 루터를 신앙의 불행에서 구출해내지 못했으나 루터의 후기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스타우핏츠는 루터로 하여금 성경을 연구하도록 하여 강권하여 성경을 매장 매절에 이르기까지 알아 훌륭한 원전 비평학자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기에 이르고 로마서 1장 17절에 제시된 하나님의 의를 성찰하기에 이른다. 밤낮 주야로 루터는 이 구절을 탐독하고 상고하다가 드디어 사도바울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인용한 구약의 말씀을 읽었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원의 의미를 계시의 힘으로 알기에 이른다. 만일 의인이 사는 것이 믿음으로 된다면, 그것은 행함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복음의 의는 정죄의 의가 아니라 오직 죄인을 옳다고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다. 이 사실을 루터는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탑의 체험”(Turmerlebnis)이요 종교개혁적 발견이었다.

 

루터는 [탁상대담]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교황제도 아래 있으면서 오랫동안 과오를 범하고 있다가 드디어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 부딪쳤다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말씀이 나를 도왔다. 그 구절에 있는 의(義)라는 말을 바울이 어떠한 의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럴 때 나는 내 경우를 바로 깨닫고, 율법의 의를 복음의 의와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이 이신득의의 새로운 교리를 알게 된 후에 루터는 그 마음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온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는 것을 체험하였다. 성령은 루터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실재가 되었다. 루터는 이제 그가 새 사람이 되었고 낙원에 들어가는 넓은 길에 들어선 것을 느꼈다고 피력하였다.

 

2. 성경의 권위 강조

 

웨슬리는 신학의 기본원천과 권위는 성경이라고 보았다. 그는 존 뉴턴(Mr. John Newton)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같이 썼다: “1730년 나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기를 원했다. 다른 책 아닌 오로지 성경만을 연구하는 책의 사람이 되기를 시작했다.” 웨슬리와 감리교도들은 “모든 일에 성경적 기독교인(Bible Christian)이기를 결심하고,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들의 모든 힘으로 명백한 옛, 성경적 기독교(Bible Christianity)를 설교하기를 결심하였다.”

 

웨슬리 신학의 출발점은 성경과 경험이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는 성경의 평행구절을 찾아 숙고하고 명상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하나님의 일에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 상의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인간 이성, 교회전통 그리고 경험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같이 피력한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모든, 실재적 또는 상징적인 관계를 음미하는 초석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율법에 그리고 증언에 호소하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영을 시험한다.”

 

다른 곳에서 웨슬리는 자기에 대한 비판가에게 말한다: “내가 알았던 것 보다 더 좋은 방식에서 나를 지적하라. 성경의 명료한 증거에 의하여 그러하다고 나에게 보여주시오.” 웨슬리는 성경을 따르고자 하였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성경은 최고재판소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반지성주의자이거나 그가 다른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웨슬리는 초대교회 교부들로부터 그의 시대의 저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는 성경의 영감을 믿었고,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사실을 믿었다. 웨슬리는 구원의 수단인 성경의 충족성을 굳게 믿었다. 성경은 웨슬리의 설교를 위한 지속적인 원천이었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는 그의 신앙을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오 나에게 저 책을 주시오. 나에게 하나님의 책을 주시오... 나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게 하시오.”

3. 오로지 은혜에 의한 구원

 

웨슬리는 그의 전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헌신하였다. 그가 1838년 올더스게이트거리(Aldersgate Street)에서 내면적으로 뜨거워지는 체험(a heartwarming experience)을 한 후, 설교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설교의 주제는 성경적 구원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한 구원(salvation by the grace of God and through faith)이었다. 그래서 그는 죄의 회개(the repentance of sins)와 중생(regeneration)을 설교했다: "나는 죄인에게 말한다.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당신은 ‘아니오!’ 라고 말한다: ’그는 세례 받을 때 중생했다. 그래서 그는 중생할 수 없다“ 아. 이것은 얼마나 경박한가!. ... 그러므로 말 장난을 하지 마시오. 그는 마음의 전적인 변화를 통과해야 한다.” “내가 진실로 당신에게 말하노니,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당신이 세례 시에 거듭났다는 상한 갈대의 지팡이에 더 이상 의지하지 말라...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웨슬리는 루터와 함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 교리의 확고한 토대 위에 섰다. 1740년 웨슬리는 이 이신득의의 교리를 “믿음으로써만 구원 얻는 옛 길”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믿음과 행위로써 구원 얻는 새 길”을 반대하였다. 웨슬리보다 200년 앞서 종교 개혁자 루터는 “신앙의 새 항목을 거부하는 옛 신앙”을 옹호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선한 행위를 거부하는 옛 선한 행위의 옹호였다. 웨슬리는 표준 설교집(Standard Sermon)의 첫째 설교에서 이 교리를 설교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우리 교회가 기독교의 굳은 반석이요 토대라고 마땅히 불러야할 교리가 바로 이 교리였다. 로마 교황청을 기독교 왕국 밖으로 몰아내었고, 그리고 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교리이다.“

 

웨슬리와 똑같이 200년전 종교개혁자 루터도 탁상담화(Tischreden)에서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믿음과 의인의 교리,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의 교리는...모든 거짓된 신들과 우상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물러 나갈 때 교황청의 토대는 넘어지는데 그 토대는 바로 거짓 신과 우상숭배였다.”

구원에 관하여 웨슬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선포된 복음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이방인도 그 속에서 도덕 빛에 순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자연 빛에 의하여(by the natural light) 그들이 아는 바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도 루터의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40년 브리스톨에서 행한 [값없는 은총](Free Grace)이란 그의 설교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첫째, 그것(필자 주: 하나님의 은혜)은 그것이 주어지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다. 그것은 인간 속의 어떤 능력이나 공적에 의지하지 않는다. 아니다. 어느 정도나 전체나 부분도 아니다. 그것은 받는 자의 선행이나 의에 어떤 방식으로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가 행한 어떤 일이나 그가 어떤 사람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기질(temper)이나 좋은 의도나 좋은 목적이나 의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단지 흐름이지 원천이 아니다. 이것들은 값없는 은혜의 열매이지 뿌리가 아니다. 이것들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의 결과이다.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사람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저자요 행위자이다. 그래서 그의 은혜는 모든 것 속에서 값이 없다. 즉 인간 속에 있는 어떤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의 독생자를 값없이 주시고 그와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에게만 오로지 의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 안에서 값없다(But it is free for ALL, as well as IN AL)”

 

웨슬리가 여기서 설교한 값없이 주시는 신적 은총론은 개혁신학의 본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는 교부 어거스틴으로부터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행은총 개념을 수용한다. 이 선행은총(a prevenient grace) 개념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고 거절할 수 있는 의지의 능력을 말한다. 선행은총 개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이며 은총을 거부하는 자들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타락이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형상의 도덕적 측면(moral aspect of their imago dei)에서 인간들은 여전히 자유의지(a free will)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타락한 인간은 여전히 세계와 하나님과 관계하여 근본적으로 자유롭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원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원죄에 영향받은 개인의 실제적 죄(the actual sins), 타락한 이성 때문에 오는 판단의 착오 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죄를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조건(condition)이 아니라 행위(acts)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개인이 원하나 약하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하신다. 개인이 자유롭고 그가 성공적인 기독교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이 성공의 삶은 신자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적을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소문난 어려운 문제(a proverbial gordian knot)이다. 선행은총론과 관련하여 웨슬리가 우리의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로마 가톨릭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종교개혁자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론에 서 있는지 명료하지가 않다. 웨슬리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해서 선행을 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편으로 웨슬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종국에는 어느 정도 존중하실 어떤 선함(some goodness)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양심에 병행하는 선행은총을 주셨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은총은 전적으로 결핍하지 않다. 선행 은총은 모든 사람에 대한 자유의 범위를 회복하며, 그들의 의지가 악으로 기울게 될 때 악을 행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택하도록 한다. 선행 은총은 구원에 충분하지는 않으나 첫 번째 빛의 동틈(the dawning of the first light)이다. 선행 은총은 복음이 선포될 때 개인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람은 선행 은총을 받으며 은총의 영향에 복종하고 확신하는 은총(convincing grace)과 의롭게 하는 은총(justifying grace)에 준비되도록 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는 시초의 자유의지(the initial free will)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선행은총론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 보다도 칼빈주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4. 말씀 중심의 복음사역 - 말씀 선포가 복음 사역의 일차적인 수단이라고 보았다.

 

18세기 웨슬리 당시의 영국 사회는 부패 바로 그 자체였다.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은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상업은 타락하여 1770년까지 무려 30만명의 흑인노예를 미국으로 매매하였다. 음주의 향락이 심하여 거리의 집들 중 1/4정도가 술집일 이었고 창녀가 우굴거렸다. 감옥은 만원이요, 폭행이 만연했다. 교회도 부패하여 성직이 매매되었다.

 

웨슬리 일기에 대한 평가를 쓴 비렐(Augustine Birrel)은 다음같이 그 시대를 묘사한다: “영국 교회의 성직자들은 웨슬리가 그들의 교구에 간섭하는 것을 시기하였다. 그러나 웨슬 리가 여러 교구에 개입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웨슬리도 비국교도(nonconformist)가 아니라 같은 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거칠게 성직자의 비행(非行)을 예를 들어 기록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물론 어느 술취한 교구 목사에 관하여 실제로 말한 일은 있고 또 한번은 어느 더운 날 낮에 한적한 맥주점에 앉아 어느 목사가 큰 족끼로 맥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말한 경우도 있다.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웨슬리는 거친 광부들이 사는 거의 무법천지가 된 난폭한 지역에 들어갔다.....이들은 거칠고 맹수같이 사납고 야만적이었다.“

 

17세기의 영국교회는 39개조의 종교신조와 기도문과 설교집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은 종교개혁적 입장을 지니고 칼빈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영국교회는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에 있어서 종교개혁적 변증법적 긴장을 버리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영국교회는 사람이 의롭다 인정받는데 인간의 책임이 우선되는 조건이라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영국교회의 감독 조지 불(George Bull)은 의인(justification)을 이미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불(Bull)의 의인교리는 종교개혁 의인교리를 다시 중세 가톨릭의 행위의 의(the righteousness of works), 즉 공로사상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국 성공회는 성례전(sacrament)에 강조점을 두면서 성례전을 의인(justification)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되는 선행(good works)의 하나로 보기에 이르렀다. 세례(baptism)는 중생케 하는 은혜의 수단이요, 성찬(Lord's supper) 역시 신자의 생활을 지켜나가는 힘을 주어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구원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믿음은 하나의 선행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인본주의 성향의 알미니안주의 신학이 당시의 영국사회를 지배하였다.

 

이러한 영국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웨슬리는 종교개혁적인 죄의 회개와 칭의의 복음을 외쳤다. 웨슬리 자신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이 낭독되는 것을 들으면서 그 마음의 뜨거움을 경험함으로써 종교개혁적 의인의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바로 설교를 통해서 이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복음사역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당시의 능력적인 칼빈주의 복음설교자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와 함께 18세기의 영국사회에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당시 도덕적으로 해이한 영국사회에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영국사회를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도덕성과 사회적 기강을 기독교적으로 잡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친구요 동역자인 휫트필드와 같이 설교(preaching)가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는 우선적인 수단(the primary means)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죄, 회개(repentance), 구원, 구속(the atonement), 성령의 사역, 신앙과 거룩(holiness)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교리(the fundamental doctrines)들을 선포하는 종교개혁적 복음주의 기독교를 역동화 시켰다. 개혁교회의 목회와 부흥사경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경회 중심이라면, 웨슬리의 감리교회의 목회와 부흥사경회도 말씀선포를 복음전파의 일차적인 수단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의 복음사역은 개혁교회의 말씀사역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복음사역은 오순절교회가 하고 있는 은사사역이나 치유사역하고는 다르다.

 

5.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강조

 

웨슬리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free grace)을 설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명료한 연결(a clear association between God's sovereignty and man's responsibility)이 있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으며,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믿음으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의 이신득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 맥락에서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가장자리”(the very edge of Calvinism)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의 은총을 어떻게 행사하시느냐에 있어서 “간발(間髮)의 차이로”(within a hair's breath) 칼빈주의와 달랐다. 웨슬리는 타락한 인간의 전적 부패성을 인정하였고 이에 대한 아담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이 은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이 이미 은총의 상태에 있다는 것, 즉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의 작용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 사랑의 은총”을 믿었고 이 은총으로부터 구원은 모두에게 모두를 위하여 값없이 주어진다(the grace of love of God, whence our salvation is free in all and free for all)“고 설교하였다.

 

이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웨슬리의 입장은 온건한 칼빈주의자와의 차이점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제한하는 과격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s)와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선행하는 은총에 의하여 원죄의 죄과가 취소되었다”(by preventing grace the guilt of original sin is cancelled)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회복된 자유의지의 분량이 있다“(there is a measure of free will supernaturally restored to every man)고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이 교리가 복음전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에 대한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강조하였고, 인간의 책임과 교회선교의 책임을 동등하게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칼빈주의(Calvinism)의 예정론에 반대하였다. 예정론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에 그는 옥스포드 대학 시절의 신성구락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이자 복음의 동역자인 당시에 위대한 설교자요 복음전도자였던 조지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와 나중에 단절하기에 이른다. 조지아에서 돌아온 휫트필드는 중생의 복음, 특히 세례받은 자도 중생해야 한다는 교리를 설교함으로써 영국 성공회 지도자들로부터 열광주의자(enthusiast) 내지 광신자(fanatic)로 의심을 받았다. 이 점에서 그는 웨슬리와 같은 노선에 섰다. 그러나 휫트필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인간의 부패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웨슬리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두사람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휫트필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전적 주권과 예정이라는 정통개혁주의적 입장에 서는 데 반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선행의지에 입각한 자유스러운 결단과 책임을 강조하는 알미니안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웨슬리와 휫트필드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1741년 결렬하기에 이른다. 웨슬리는 과격 칼빈주의자들(John Skepp, John Brine, John Gill 등)이 주장한 제한된 구원론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만인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1741년 3월 26일 일기에는 웨슬리는 휫트필드와의 논쟁에 관하여 다음같이 쓰고 있다: “조지아에서 귀국한 후의 휫트필드 목사의 행동이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를 스스로 알기 위하여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 나는 그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두가지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디서 설교를 하든지 나와 내 동생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설교하기로 작정하였을 뿐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협력한다든가 친교의 악수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휫트필드와 웨슬리의 갈등과 결별은 단순한 설교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의 차이였다. 휫트필드는 복음주의 운동을 청교도주의(Puritanism)에 연결시킨 것에 반해서, 웨슬리는 알미니안 운동의 창시자인 로드(Laud)에 연결시켰다. 그것은 칼빈주의적 복음주의와 알미니안주의적 복음주의의 차이였다. 웨슬리는 그의 동생 찰스와 함께 당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보편속죄(universal redemption)를 주장하면서, 제한속죄를 받아들인 정통 개혁주의의 예정론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웨슬리가 1784년 5월 내적 구원의 확신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 성공회에 자리잡고 있던 자유의지론과 보편속죄의 교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휫트필드는 미국의 텐넌트(Tennents)와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정통적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휫트필드는 개혁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성부의 선택하시는 사랑(the Father's electing love),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Christ's substitutionary death on behalf of those whom the Father had given Him),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이루는데 성령의 오류없는 사역(the Spirit's infallible work in bringing to salvation those for whom it was appointed)을 믿었다. 값없는 은총의 교리(The doctrine of "free grace")는 휫트필드의 목회와 1737년 그의 설교 아래 시작된 운동의 신학이었다. 웨슬리도 1738년 회심을 체험한 후 둘은 같이 복음운동을 사역하였다. 그런데 휫트필드는 3개월이 지난 후 둘의 복음이 같은 방향이 아닌 것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웨슬리는 죄, 신앙과 중생에 대해서는 휫트필드의 개혁주의적 견해에 동의했으나 예정과 구속의 범위에 관하여서는 당시의 알미니안주의자의 입장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1741년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휫트필드는 정통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교리인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사랑(God's electing love)과 제한 속죄(limited redemption), 최후의 견인(final perseverance)의 교리를 거부하는 웨슬리의 입장이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으로 보고 웨슬리에 대한 그의 반대의 입장을 출판하기에 이르고 이 둘은 결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웨슬리 신학에 관하여 다음같이 평가한다: “웨슬리는 그의 가족의 청교도적 관습에 걸맞지 않게 자신의 신학을 알미니안주의라고 잘못 명칭을 붙였는데 그의 신학은 모순된 칼빈주의로 분류되는 것이 더 옳다.”

 

6. 지상에서의 상대적 성결론

 

웨슬리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과 교회에의 기여는 그의 성결론이다. 이 성결론은 독일 모라비안 경건주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성화보다는 이신득의를 강조하였고 더욱이 루터는 율법폐기주의(antinomianism)의 경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화를 강조함으로써 현대의 복음주의에 지고한 영향을 끼쳤으며 개혁신학의 취약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웨슬리는 신자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전적으로 성결할 수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죄가 중생한 신자 속에도 있다고 인정했다. 웨슬리에 의하면 신자는 중생이라는 일차적 성화(initial sanctification)에 의하여 내적 죄로부터 부분적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 그리고 신자는 전적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의하여 내적 죄(inward sin)로부터 온전히 씻음을 받는다. 마침내 신자는 영화(glorification)에 의하여 연약성(infirmities)에서 구원받는다. 웨슬리는 몸이 영화롭게 될 때, 즉 육신이 죽을 때, 절대적 의미에서 신자들이 성화된다는 데 있어서 칼빈주의에 동의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지상에서 육신 가운데 있을 때에라도 상대적인 의미에서 전적으로 성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신자들은 신앙 성장의 과정에서 전적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구원이 인간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자에 대하여 원하시는 성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낙관주의 견해 때문에 웨슬리는 개인의 성결(personal holiness)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신자는 죽음 전에라도 성화될 수 있다고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신자가 어떻게 전적 성화에 이르는가? 웨슬리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이른다고 보았다. 웨슬리에 있어서는 전적 성화는 신비적 체험(a mystic experience)이나 인간의 공적(human merit)에 의하여 도달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웨슬리는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며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회개는 믿음을 위하여 필요하다. 신자의 회개는 허물과 정죄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신자의 회개는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우리 마음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중생한 신자들 속 일지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육신의 마음에 대한 자각(conviction)이다."

 

전적 성화의 효과에 관하여 웨슬리는 두가지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부정적인 방식으로는 신자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해졌다. 긍정적인 방식으로는 신자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전적으로(holistically) 신자는 순결을 위하여 씻음을 받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 안에서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부정적으로 그것은 죄를 배제하는 사랑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가슴을 채우는 사랑이며 영혼의 모든 능력을 고양시키는 사랑”이다. 웨슬리는 성결의 복음이 감리교도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저축(a great depositum)이라고 믿었다. 그는 감리교도들이 “단순한 신앙으로 받아지는 전적 구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연약성의 죄 때문에 전적 성화 후에라도 회개와 믿음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웨슬리는 전적으로 성화된 자라도 할찌라도 연약성과 실수와 빠뜨림의 죄(sins of omission)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완전자라고 하드라도 부지중에 죄를 범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이러한 죄를 “유한성(mortality)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무지와 실수에서 자연적으로 결과된 것”으로 본다.

웨슬리는 “비의도적인 실수를 배제하는 그러한 완전이란 이 생에서는 없다”(there is no such perfection in this life as excludes these involuntary transgressions)고 말한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자들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들은 그들의 실제적 잘못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 스스로,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라고 말하는 결론이 나온다.” 웨슬리는 피력한다: “그들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말한다... ‘매순간 주여 나는 당신의 죽음의 공로를 원합니다.’ 그들은 전에는 그들이 지금 가지는 모든 직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필요에 대한 결코 그렇게 깊고 말할 수 없는 자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설교자들은 지속적으로, 강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신자들에게 완전에 대한 설교의 요점을 말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이 하나의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에 지속적으로 고민(agonize)해야 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 교리’(the doctrine of 'simul justus et peccator')를 가진 종교개혁자 루터처럼 비관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숫하나 다르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신자들이 전적으로 성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의도적으로 죄를 범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 공로에 종속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한편으로는 신자는 부지중에 죄를 짓는다. 그래서 그는 회개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웨슬리의 견해는 루터와 비숫하다. 다른 편으로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성령의 정화하는 사역 아래 있다. 웨슬리는 이런 면에서는 낙관주의적이다. 성화를 낙관적으로 보는 점에서 그는 성화를 비관적으로 보는 루터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이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자력이 아니라 기독론적으로 보는 점에서는 루터와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성화 강조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성화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간 순간의 신뢰를 통해서 유지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같이 말할 수 있다. 루터가 의인의 삶 안에서 은혜의 낙관주의를 주장한데 반해서 웨슬리는 성화의 삶 안에서 은혜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를 주장하였다.

 

2005년 봄 서울에서 열린 환대평양 웨슬리안의 모임에서 환태평양 성결운동가들은 분명한 중생의 체험이 참된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중생의 체험 이후 내면에 남아있는 죄성을 발견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을 구한다.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것이 성결의 체험이다. 환태평양 성결운동은 이러한 교리적인 공통점 위에 형성되었다.

 

7. 중도적인 체험적 성령론: 개혁주의 성령론의 역동화

 

웨슬리는 복음 사역자로서 중도적인 체험적 성령론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신학의 성령론을 역동화 시켰다. 웨슬리의 전도사역에는 신자 속에서 성령의 내적 증언 (the inner witness of the Holy Spirit)으로서 체험적으로 임재하는 성령의 능력적인 역사가 있었다. 초창기에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회의(懷疑)를 가지고 방황을 하다가 1738년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모임에서 마음을 뜨겁게 하는 성령 체험(the heart warming experience of the Spirit)을 하였다. 이 체험을 통해서 웨슬리는 그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그의 체험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는 앞의 인도자가 “그리스도 안에의 믿음을 통해서 마음 속에서 행하시는 변화를 기술하는 동안” 그것을 들으면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른다. 이 체험은 이전에는 회의에 찬 웨슬리로 하여금 확신에 찬 복음의 설교자로 만들었고 성공회의 교리의 담을 넘어서 세계를 자신의 교구로 만들었고 영국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내면적 역동성을 가져다 주었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언하는 사역에 기초된 확신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웨슬리에 따르면, 자신의 영의 증언에 선행하는 성령의 직접적 증언은 신자의 삶에 평화, 소망과 동력을 준다. 성령의 직접 증언(the direct witness of the Spirit)은 성령의 간접 증언(the indirect witness of the Spirit)인 우리 영의 증언(witness of our spirit), 즉 선한 양심의 증언(witness of a good conscience)에 선행(prevenient)한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언에 의하여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 교리가 하나님이 감리교 신자들에게 인류에게 제시하도록 주신 증언의 큰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웨슬리의 공헌 가운데 하나다. 웨슬리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assurance)이란 그것이 구원 받는 신앙의 본질적 요소는 아닐찌라도 신자들이 지녀야할 크나큰 특권이다. 웨슬리는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너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작은 아이의 신앙에서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는 교부들의 신앙으로 자라나야할 것을 권면한다.

 

웨슬리는 그의 후년에 다음같이 피력한다: “나는 사람들이 감리교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감리교도들이 죽은 종파로 존재하지 않는다 할찌라도 능력없는 종교의 형식을 갖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그들이 교리, 성령, 그들이 처음 만든 제자들을 가지지 않으면 의심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언을 강조하는 점에서 웨슬리는 칼빈의 내적 증언의 교리를 수용하고 있다. 웨슬리의 집회에서 진동이나 입신 같은 신비적인 은사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영의 분별에 있어서 웨슬리는 성령과 나의 영의 공동증언(common witness)을 주장한다. 성령의 증언과 인간의 환상이나 마귀의 현혹(delusion)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선한 양심의 증거 사이의 일치이다. 성령의 직접적 증언은 나의 영의 증언, 즉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선한 양심의 증거를 동반해야 한다. 나의 인격 속에서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동반되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지니고 있어야만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신앙의 확신은 건전하게 성령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증언의 연결에 기초 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열광주의나 열정주의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성령에 대한 바른 교리를 지켰다. 웨슬리의 확신 교리는 제도적 신앙과 열광적 신앙의 균형을 잡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이 구원의 확신을 성례전에 연결시키고 과격 개혁교회가 예정교리에 집착함으로써 신앙의 확신을 추상화 시키고 활력을 상실한 것에 반대하였다. 다른 편으로는 열광주의자들이 영혼 속의 내적 빛에 연결시킴으로써 신비주의화 시킨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중도적으로 객관화(성령의 열매)와 주관화(내적 확신)의 균형으로 잡았다.

웨슬리는 성숙기에 이르러 초기에 그가 매달렸던 확신의 감정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구원은 이 확신이 없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768년 3월 28일 개혁신학자인 루터포드(Samueln Rutherford)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확신, 곧 하나님에게 용납되었다는 의식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Justifying Faith)의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한 확신이 함께 따르지 않아도 거기에 믿음이 있을 수 있읍니다.” 이 편지로 보아 웨슬리는 자신이 초창기 페터 뵐러의 조언을 받으면서 신앙 확신을 추구했던 자신을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당시에 자신이 설교자로서 믿음이 없다고 했던 자신을 판단했던 일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신뢰의 미성숙의 일로 보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8. 네가지 권위(The Quadrilateral)

 

종교개혁적인 ‘오로지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는 웨슬리의 4가지 권위(quadrilateral)와 모순되지 않고 보완한다. 오로지 성경은 그의 4가지 원리 - 성경, 전통, 이성과 경험- 가운데 첫 번째 원리이다. 성경, 전통, 이성, 그리고 경험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서로 상호작용(dynamic interplay)을 한다. 그래서 “4가지 권위”라고 부른다.

 

웨슬리는 이 네가지 권위를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 아래서 이해하였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네가지 종교적 권위는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로부터 파생한다. 성경일찌라도 단지 파생되고 이차적인 종교적 권위를 대표할 뿐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종교적 권위의 원천으로서 하나님만을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자주 성경에 호소하였고 전통, 이성 그리고 경험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적 신앙의 일에 대한 접근을 위한 네가지 토대를 놓았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권위있는, 신뢰할만한 계시이다. 그는 18세기 성경해석학의 이해에 상관해서 성경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성경은 이 네가지 권위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권위다. 그러나 웨슬리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이성과 경험 그리고 교회전통으로부터 통찰을 적용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개신교가 역사와 전통을 평가절하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전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교회의 전통과 옛 전통이 종교적 이해와 목회에 우선권을 보완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이성이 우선적으로 성경과 관계되는 문제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도구라고 보았다. 그는 이성과 논리와 비판적 사고는 바른 종교적 신념과 실천에 보완이 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전통, 이성과 경험이라는 “세가지 해석학의 두 요소보다는 더 이성에 호소했다. 그는 자주 사람들이 믿는 모든 합리적인 것을 반복하는 경향(prone)이 있었다.”

 

웨슬리는 경험이란 기독교적 신념과 관련하여, 특히 기독교적 실천과 관계하여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목회적으로 공공적으로 무시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확실히 경험과 경험에의 호소의 잠재적 오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경험은 부인할 수 없이 기독교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반성의 경험적 측면을 인정하고 그것을 단순하게가 아니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이 경험이란 현대적인 견해와 비교해서 잘 발전된 이해는 아니었으나 개인적 경험을 넘어선 과학적이고, 행동적 과학적인 경험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웨슬리의 네가지 원리는 종교개혁적 원리와 모순적이거나 상충되지 않고 보완한다. 그는 네 가지 권위가 유래하는 궁극적인 권위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보았고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전통과 이성과 경험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가르침 아래서 사용될 때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웨슬리와 웨슬리 전통의 거대한 변호자인 윌리엄 아브라함(William Abraham)은 네가지 원리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네가지 종교적 권위들에 대한 비 웨슬리적 사용(the non-Wesley usage)을 반대하였다. 더욱 그는 웨슬리 전통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원리인 성경적 권위의 최소화(the minimization of scriptural authority)에 대하여 비통해 하였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다음같이 네가지 권위의 혼돈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피력한다: “요소들의 각기에 상대적인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네가지 요소들을 변증법적으로 다루고자는 노력이 행해졌다. 반응에 있어서는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가 혼란을 야기시킴으로 네가지 권위(the quadrilateral)를 해소하는 것에 대한 요구가 제시되었다. 네가지 권위가 네가지 요소들의 상극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네가지 권위는 종교개혁적 원리인 “오로지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원리를 도우는 보완요소로서만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웨슬리의 본래의도이다. 네가지 권위를 종교적 권위의 네가지 측면으로 본다든지 또는 네가지를 서로 대등한 독립적인 요소로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웨슬리의 의도가 아니다. 종교개혁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성경이라는 원리가 가장 핵심적이고 으뜸가는 원리이고 다른 요소들은 성경의 원리를 보완하는 성경 원리를 도와주는 보완원리로서만 기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네가지 권위를 평행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의 후예들이 경험과 이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문을 열어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웨슬리 사고의 취약점이다.

 

9.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긍정 - 예정론 부정

 

이러한 웨슬리 신학의 취약점은 그의 예정론 부정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웨슬리는 예정을 “하나님 말씀의 모순”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예정론이란 위험한 실천적 결과를 초래하며 “도덕적 면허” 내지 “복음화와 선교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1740년 브리스틀에서 설교한 [값없는 은총](Free Grace)에서 다음같이 예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첫째, 예정론에 따르면 “설교의 목적이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무효가 되고 소용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저들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설교를 듣든지 아니듣든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예정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화 한다: “예정론이 신론이 아니라는 명료한 증거는 예정론이 하나님의 계명(ordinance)을 무효화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에 대하여 분리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영원으로부터 택함을 받았거나 유기되었고, 어떤 자는 불가피하게 구원을 받고 어떤 자는 불가피하게 저주받았다는 교리자체는 성결 일반을 파괴하는 명료한 경향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결(holiness)을 추구하는 첫 동기를 빼앗아 가며, 자주 성경에 제시되는 것 처럼 미래의 보상과 심판의 두려움 그리고 천국의 소망과 지옥의 두려움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셋째, 예정교리는 “종교의 위로(comfort), 기독교의 행복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것은 스스로 유기되었다고 믿는 자들 또는 그것을 단지 두려워하거나 의심하는 자들 모두에게 명백하다. 모든 위대하고 값진 약속들은 그들에게는 상실된다. 이것들은 그들에게 위로의 빛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예정교리는 ”직접적으로 선행을 향한 우리의 열심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다. 먼저 그것은 인류의 거대한 부분, 즉 악한 자와 감사치 않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려는 경향 때문에 그렇다... 다음, 이 교리는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는 등, 저들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희망 등 육신적 자비의 모든 행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동기들의 하나를 끊어버리는 경향 때문에 그렇다.”

 

다섯째, 예정 교리는 “기독교의 성화, 행복, 선한 일을 파괴할 뿐 아니라 전 기독교 계시를 전복하는 직접적이고 명백한 경향을 갖는다.”

 

여섯째, 이 교리는 “계시가 스스로 모순되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모든 텍스트 그리고 성경의 전 범위(scope)와 취지(tenor)에 명백히 모순되도록 하는 텍스트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대, 예정교리의 주장자들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성경 텍스트를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에서와 모든 유기된 자들을 영원부터 미워하였다고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제 이것은 성경 전체 지평과 어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하는 특별한 텍스트에 얼마나 모순이 되는가. 다시: 이들은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롬4;15)는 텍스트에서 하나님은 어떤 자, 선택한 자에게만 사랑이며, 선택된 자에게만 긍휼을 베푼다고 추론한다: 이것은 명백히 성경의 전 범위와 취지에만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며, 그는 모든 그의 행사에서 자비하시다’(시11:9)는 선언에 모순된다. 다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는 텍스트로부터 ‘하나님은 영원부터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석한다. 아니. 이제 누가 하나님에 대항하는가? 이들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행10:34), ‘그는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롬2:11)를 선언하는 하나님의 전 계명에 모순된다. 다시: 아이가 아직도 나지도 아니하였고 선악 어느 것도 행하지 아니하였을 때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은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레베카에게 이르기를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텍스트로부터 우리의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추론한다. 이것은 명백히 모든 성경귀절에 위배되며 특히 ’하나님의 예지에 따른 선택‘(벧전1:2),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를 예정하셨다’(롬8:29)는 구절에 모순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이 교리는 “하나님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일곱째, 예정교리는 “신성모독으로 가득 찬 교리”(a doctrine full of blasphemy)이다. 내가 언급하기를 두려워 하는 신성모독이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예와 그의 진리의 이유가 나로 조용하게 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유에 있어서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진지한 관심으로부터 나는 이 무서운 교리에 내포된 무서운 신성모독을 언급하고자 한다“

 

복음전도자로서 웨슬리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행복의 메시지를 주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일반사람들과 초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교리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이 이미 획득된 신앙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끝임없이 신앙의 경주를 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로마서 8장 16-17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는 웨슬리의 애호하는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신자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확신을 위하여 내면을 보도록 권면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에 있어서 예정론의 부정은 선행은총(prevenient grace)론, 자유의지론과 더불어 보편구원론과 짝을 이룬다. 선행은총론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또는 거부할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멸망당하는 자들에 의해서는 거부될 수도 있다. 신자는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1765년 존 뉴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웨슬리는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나의 동생과 내가 30년전 논구했던 것 처럼 우리는 우리의 전 힘을 다하여 예정을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위험스러운 실수로 반대하기를 생각했다. 예정은 기독교 체험의 기초를 해체하는 것(subversive)으로 나타나는 사실로 모든 슬픈 범죄(the most grievous offences)에 기회(occasion)를 제공하는 위험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존 웨슬리 일기의 서문을 쓴 휴 프라이스 휴즈(The Rev. Hugh Price Hughes)는 웨슬리가 아다나시우스나 어거스틴 처럼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라 한 설교가로서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름에 영원히 붙어다닐 제한된 구원에 관한 파괴적인 교리에 치명타를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고 평가하고 있다.

 

10. 웨슬리의 예정론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예정이해에 있어서는 그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체험했던 하나님 은총에 대한 신앙의 확신에 근거하기 보다는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인본주의적 사고에 너무 기울린 느낌을 주고 있다. 예정교리에 대한 비판에서 웨슬리는 값없는 은총과 칭의의 믿음을 설교하는 그의 신본적인 모습은 없고 단지 인본주의적으로 인간의 관점을 더 내세우는 회의주의적인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웨슬리가 예정론 이해에 대하여 가지는 근본적인 오류는 예정이란 인간이 착안점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료히 알지 못한 데 있는 것 같다. 필자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다음같이 예정론을 긍정적으로 변호하고자 한다.

 

1) 예정교리는 전도와 설교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예정은 복음전도자의 설교와 청취자인 인간의 결단을 통하여 그 분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시거나 파지 않은데서 거두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는 인간의 복음전파에 대한 노력과 신자의 도덕적 책임과 결단까지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속이 텅빈 인간의 노력과 도덕적 책임을 무력화 시키는 동양적인 내지 헬라적인 운명론이나 숙명론과는 다르다.

 

2) 예정은 성결추구의 동기를 빼앗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은 성결추구의 동기와 노력까지 개개 신자들에게 자유스러운 의지의 결단으로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기와 노력까지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렬한 성결의 동기와 노력을 했다고 하드라도 우리의 공로로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 할 일을 하였을 뿐이니이다고 고백할 뿐이다.

 

3) 예정은 종교의 위로와 구원의 행복을 파괴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예정을 고백하는 자들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오히려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정사상은 오히려 신자들의 박해와 고통과 어려움과 역경 가운데서 이겨내게 하는 놀라운 힘을 제공한다. 경건한 신자들에게는 자기의 구원이 자신의 노력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더욱더 구원의 확신과 감사를 느끼고 신앙의 행복을 느끼게 한다.

 

4) 예정은 선행을 향한 우리의 열심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고 악한 자와 감사치 않는 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파괴하지 않는다. 예정교리는 신(神)단일사역설(divine monergism)이나 신(神) 결정론(divine determinism)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익하나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할 뿐이이다. 그리고 우리는 택정함을 받았기 때문에 성결에 열심해야 하는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예정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탕감을 받은 자로서 신자들 중 악한 자들과 감사치 않는 자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저들의 회심을 위해 전도와 중보기도를 하도록 한다.

 

5) 예정교리는 기독교의 성화, 행복, 선한 일을 파괴하지 않고 세우며 전(全) 기독교 계시를 무너뜨리지 않고 세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의 출발은 인간의 노력과 믿음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예정이야말로 기독교 계시를 파괴하지 않고 세운다. 예정 교리는 우리가 가진 신앙을 인간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속에 성령으로 이루신 신비로서 세운다.

 

6) 예정교리는 성경계시의 모순이 아니라 성경계시를 하나님의 신비와 그분의 주권적 작정에 기인하도록 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는 그의 주권적 섭리 교리로서 성경의 전 범위와 취지에 명백하게 반영된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다름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 등의 하나님의 특정적인 선택을 시사하는 구절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의 구절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며, 그는 모든 그의 행사에서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예지에 따른 선택‘,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를 예정하셨다” 등에 모순되지 않는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특별은혜와 보편은혜의 구분의 의미를 잘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해당하는 말씀이며,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특별은총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양자는 계시의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두가지 측면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도 그의 주권적인 예정과 예지에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은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세상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의 불신앙과 복음의 거절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이 저들을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저들을 유기하도록 하신 것 뿐이다. 그것은 불신앙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성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진정한 성경적으로 균형잡힌 메시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예지에 근거한다. 그의 예지는 우리의 지식와는 다르다. 인간의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실증적으로 검증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지는 그의 예정 안에 이미 정립되어 있다. 여기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신비로운 조화가 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신학적 차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정교리야 말로 성경이 로마서와 예배소서 등에서 명료히 언급되는 신비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시인 것이다.

 

7) 예정교리는 “신성모독으로 가득찬 교리”가 아니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아는 데서 결정적으로 빗나가고 있다. 웨슬리는 18세기의 영국사회의 각성운동을 주도하고 감리교를 창설하기까지 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러나 이 예정교리를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한 데서 그는 실수하는 무지한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예정교리야 말로 신성모독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나타내는 여러바퀴(인간의 전적 타락, 무조건적 은혜,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견인 등)를 이루는 하나의 화살인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웨슬리가 우려하는 바 “도덕적 면허 내지 복음화와 선교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의 복음화 노력과 신자의 도덕적 성결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류의 구원에 전도자의 복음전파와 개별 신자의 구원결단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서로 모순되거나 이율배반을 보아 예정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철학적 세속적 피상적 오해일 뿐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미국 미시간(Michigan)주의 과격 칼빈주의자 회커마(Herman Hoeksema)주장처럼 일반은총을 배제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행위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는 자가당착이나 신학적으로 신비이며 인간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조화이다.

 

예정이란 인간이 가지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요, 인간이 미리 예지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지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이 처음부터 가지는 출발점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일의 결과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아하!”라는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경륜을 깨닫는 최종적 지식이다. 웨슬리는 아마도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예정론은 신앙의 출발점이 아니라 신앙의 도달점, 신앙고백이다. 예정은 복음전파의 전제가 아니라 복음전파의 결실로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정은 인간의 소유물이나 종교적인 전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분의 선하신 작정에 속하신 신비스러운 주권적 작정이시다. 예정하시는 하나님은 결단코 변덕스럽거나 폭군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외아들을 주신 온 인류가 구원을 얻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웨슬리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예정론 부정은 정통적 예정론이 지니는 숙명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 고립을 초래하고 죄와 실수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를 초래할 수 있는 예정론이 지니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웨슬리가 하나님의 예정론을 비판한 것은 과격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s)이 빠질 수 있는 반율법주의 내지 율법폐기론에 대한 전쟁(war against antinomianism)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혁신학의 핵심은 예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론이다. 예정론은 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예정론에서 출발한 것이 만인구원론을 주장하기에 이른 바르트신학의 오류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예정론을 신론에서 다루지 않고 교회론에서 다룬 것은 웨슬리가 비판하는 것 처럼 예정론이 야기할 수 있는 신자들이 빠질 수 있는 숙명론이나 도덕(율법)폐기론의 위험성을 인지하였기 때문이다.

맺음말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경을 신학의 최종원리라고 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인(義認)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러한 전적 은총의 교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았고, 말씀의 전파인 설교를 복음전파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런 면에서 그는 루터와 칼빈의 후예이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신학의 전통에 서있다. 그래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제한하여 특정한 자들에게만 적용한다거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제한적으로 선택받은 자들에게 적용하는 과격칼빈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을 위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종교개혁신학자들도 만인구원론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개혁신학의 전통과 저촉되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종교개혁신학의 전통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인류를 위한 것이지마는 대속의 효력은 믿는 자에게만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정통 칼빈주의가 지니고 있는 예정과 제한적 속죄, 최후의 견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인본주의적 길을 열고 있다. 그는 특히 성경이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그 부정적인 면만을 들어서 “혐오스러운 교리” 내지 신성모독의 교리“라고 지적함으로써 인간 이성의 차원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을 인간적인 자유의지와 책임으로써 제한하려고 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에 참여하는 인간의 행위와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전파에 결신의 효과를 거두고 숙명주의적 경향에서 신자들의 신앙적 역동성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주권 보다는 선행하는 은총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책임에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인본주의의 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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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leyan Theological Society and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May, 2005,Bucho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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