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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전신갑주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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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 (에베소서 6장 14-17절)


1. 진리의 허리띠

 귀신은 강하고 끈질긴 존재지만 결코 성도를 이길 수 없다. 성도의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미 귀신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귀신은 종이 호랑이이고 늙은 사기꾼에 불과하다. 종이호랑이를 보고 놀라지 않고 늙은 사기꾼에게 속지만 않으면 귀신은 예수님의 진리로 굳게 무장한 성도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사실상 예수님의 능력은 성도보다 귀신이 더 잘 안다.

 예전에 한 성도의 말에 의하면 그가 살았던 시골 마을에는 ‘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죽기 전에는 거의 다 교회에 나왔다. “왜 평생 경을 읽었으면서 교회를 나오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귀신들은 어떤 사람이 죽어서 그로부터 나오면 다시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대상이 ‘나온 그 죽은 사람의 자녀’입니다. 제가 평생 경을 읽었지만 제 자녀에게만은 귀신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기에 귀신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려고 죽을 때가 되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신 내림을 받은 무속인이 귀신을 쫓아준다고 하고 점을 쳐준다지만 그것이 행복하지 않은 삶임을 그들 자신도 알고 또한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 하는 것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굳게 붙잡으면 귀신은 들어올 수도 없고 그 영향력도 차단되고 이미 들어왔던 귀신도 맥을 못 추고 나간다.

2. 의의 호심경

 성도에게는 두 가지 호심경이 있다. 하나는 ‘의로움’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라. 독함, 불순종, 교만, 불신 등을 그냥 두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은 없다. 완벽하게 살지 못해도 늘 의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 말은 “절대 분노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분노를 다스리라.”는 말이다.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은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고 순간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은 ‘행위의 완전함’이 아니라 ‘동기와 의지의 완전함’을 뜻한다. 즉 말씀에 순종하려는 삶을 뜻한다. 때로 분노도 할 수 있지만 그때 즉시 자신을 낮추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 분노를 다스리려는 것이 성경적인 완전함이다. 바로 그때 귀신의 공격에서 영혼을 지킬 수 있다.

 또 하나의 의의 호심경은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다. 귀신은 대개 교회의 성물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교회의 성물도 귀신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힘이 있다면 하물며 교회는 얼마나 큰 힘이 있겠는가? 물론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이다.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격려해주고 나누는 삶을 살라. 혼자 있으면 귀신에 당하기 쉽지만 같이 있으면 귀신이 틈타지 못하기에 모이기를 힘쓰고 더 나아가 참여하고 참여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 적극 협력하고 적극 협력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하면 귀신은 꼼짝 못한다.

3. 평안의 복음의 신

 귀신이 가장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왔다 갔다 하는 변덕스런 마음이다. 변덕스럽고 바다물결 같이 계속 흔들리면 귀신이 틈타기 쉽기에 생각을 잘 지키라. 기독교를 대적하는 가장 견고한 진 중의 하나는 공산주의나 인본주의나 이슬람교가 아니라. ‘생각의 진’이다(고후 10:4-5). 귀신은 생각 속에 찾아와 “키가 작다. 못났다. 더럽다. 지금 배우자와 계속 살면 행복할 수 없다.”고 속삭여 열등감과 죄책감을 주고 행복을 포기하게 만들 때 그런 소리에 넘어가지 말라.

 미국의 한 남자가 아내가 너무 싫어 이혼한 후 결혼상담소에 가서 자기 이상형을 찾아달라고 했다. 그때 결혼상담소에서 컴퓨터에 입력된 3만 명의 여성 중 한 여성을 골라주었는데 사진을 보니까 얼마 전에 이혼한 자기 부인이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바꾸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하게 살려면 배우자를 바꾸기 전에 자기를 바꾸라. 자기를 바꾸지 않으면 배우자를 여러 사람 바꾸어도 소용이 없다.

 지금 만나는 사람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신날 것 같지만 함께 지내면 얼마 지내지 못할 때도 많다. “지금 상태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어떤 사람은 말한다. “목사님은 제 남편을 몰라서 그래요.” 물론 잘 모르지만 그 상황에서도 행복을 찾는 길은 있다. 행복한 가정이란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니라 문제를 극복하는 가정이다. “지금 상태로 너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라. 이 세상에 전혀 행복할 수 없는 성도는 한 사람도 없다.


4. 믿음의 방패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다(16절). 귀신은 끊임없이 불화살을 쏜다. 특히 귀에 많이 쏘면서 이상한 말, 거짓말, 부정적인 말을 만들어 듣는 사람을 실망시킨다. 그런 소리에 미혹되지 말라. 듣는 것을 잘 가려서 듣고 특별히 하나님 말씀을 힘써 들으라. 성령 충만하면 말씀의 귀가 열리지만 귀신은 어떻게 하든지 말씀에 귀가 닫히게 만들려고 하기에 말씀이 자기 약점과 부딪치면 성령님은 반성하게 만들지만 마귀는 반발하게 만든다.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저 말씀은 나 들으라고 한 것이다.”하고 반발한다. 내게 주신 말씀이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저것은 돈 내라는 얘기 같다.”고 반발한다. 인색한 태도다.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대적은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다. 신앙성숙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물질에 대한 집착이기에 때로는 물질적 헌신에 대한 말씀도 필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의 3분의 1이 물질과 관련된 말씀이다.

 또한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옛날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변했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옛날과 똑같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변화가 좋을 수도 있고 때로는 변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경우도 많다. 본질적인 면은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면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무조건 “변했다.”고 하며 말씀을 외면하면 안 된다. 말씀에 귀가 닫히게 하려는 귀신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라.

5. 구원의 투구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귀신은 그 구원을 의심하게 만든다. 죄와 허물을 확대시켜 “너는 위선자야. 너 같은 인간이 무슨 하나님이 자녀야.”라고 정죄할 때 그 귀신의 노략질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영혼은 아수라장이 된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받아주신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사람의 문제는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다. 구원은 나라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것이고 돈과 문화도 초월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종교도 초월하는 것이다.

 구원은 어떤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죄와 허물도 용해시킬 수 있다. 죄와 허물이 있어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고 늘 진실하시다. 귀신은 내 죄와 허물을 걸고넘어지지만 하나님은 내 죄와 허물을 걸고넘어지지 않고 안타까워하신다.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구원의 믿음까지 잃지는 말라. 하나님은 원래부터 내 행위 때문에 구원을 베푸시지 않고 은혜로 구원을 베푸셨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삶이 금방 우뚝 선 존재가 되고 구원 이후의 삶을 등한시해도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이 과거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까지 나타나도록 하라. 구원은 중생의 원천이면서도 변화의 원천이다. 구원은 조각난 세상을 기워주고 조각난 사람의 마음도 기워준다. 구원의 주님이 세상을 변화시켰듯이 구원의 믿음은 내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구원의 믿음은 과거의 사건으로만 끝나지 말고 현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

6.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전신갑주 6가지 중 5가지는 방어용 무기인데 유일한 공격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은 군인이 무기가 없는 것과 같다. 그 사실을 귀신도 잘 알기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말씀과 멀어지게 하려고 한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은 말씀과 성령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암시다. 성령충만을 신비한 은사를 나타내거나 부흥강사 앞에서 넘어지는 것 등으로만 여기지 말라. 성령충만의 최대 표시는 말씀충만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낼 때 말씀으로 쫓아내셨고 광야의 시험도 신명기 말씀을 인용해 물리치셨다. 그런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는다면서 무속인처럼 귀에 대고 “귀신아 나가! 나가!”하고 소리친다. 손을 대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가슴팍을 내려치거나 밀어제치기도 한다. 귀신이 눈에 들어 있다고 눈을 후비고 몸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가슴, 배, 팔, 다리를 때려 시퍼렇게 멍투성이를 만들기도 한다. 심하면 귀신이 발작한다고 손발을 묶어 놓고 복숭아 나뭇가지로 사정없이 때려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귀신을 쫓지 않았다.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셨고 귀신은 심하게 꾸짖었어도 귀신들린 사람은 불쌍히 여기셨다. 귀신은 증오하되 귀신의 피해자인 사람은 최대한 존중하고 사랑하라. 남편이 미운 짓을 한다고 남편 앞에서 “마귀야 물러가라!”고 소리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서 남편을 내편으로 만들라. 함부로 말하면 남편이 진짜 ‘남 편’이 된다. 최대의 승리와 능력은 적을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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