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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구원론 체계 속에서 본 신약 윤리 - 박형룡신학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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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체계 속에서 본 신약 윤리

 

이한수 교수(총신대 신대원, 신약신학)

 

 

 

 

 

박형룡 박사는 신학의 불모지와 같은 한국 교회에서 정통신학의 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교의신학자요 저술가로 공인된 학자이다. 그의 신학에 대한 호, 불호를 떠나서 사람들은 그를 “거대한 산과도 같은 존재”로 비유한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싸움에서 남긴 그의 변증신학의 업적에서 보나, 정통신학을 사랑하는 그의 열정에서 보나, 그가 남긴 교회사적 족적에서 보나 그를 그렇게 평가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는 특별히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을 보수 전달하려는데 평생을 바쳤다.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과 논쟁을 벌이던 시대적 정황에 처해있다 보니 자연히 그의 신학은 논쟁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따라서 그와 논쟁을 벌이던 측의 사람들로부터는 교조주의적 파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정통신학의 기초를 세운 보수교회의 대표적 학자라는 점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특징은 “성경영감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라는 두 기둥으로 하고 서 있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칼빈주의 신학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신학함의 원리로 삼으면서도 그의 신학은 사상적 균형성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거산(巨山)의 웅장함에 비견되면서도 섬세하며 성경적 메시지들에 기초한 신학적 균형성을 유지하려는 조화로움도 지닌다.

최근 박형룡 박사의 신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그의 신학을 파벌주의적 교조주의 신학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그의 신학에 동조하는 보수진영에서조차 벌코프(L. Berkohf)의 사변적 신학에 많이 의존하는 “조직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 짧은 논문에서 박형룡 박사의 방대한 작업을 공정하게 제대로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자는 구원론의 체계 속에서 바라본 그의 윤리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과연 그의 신학이 성경 교훈에 기초한 신학적 균형 감각을 지녔는가를 살피려 한다. 필자가 이렇게 박 박사의 윤리신학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 것은 한편으로 총체적인 도덕적 위기에 빠진 한국 사회의 개혁이라는 시대적 정황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박형룡주의 신학의 후예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대중적 신학 인식이 그 자신이 가졌던 신학적 균형성을 상실하고 한 쪽만의 강조점을 좇아 일방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경향성마자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가 빠져든 도덕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속화 징후들이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박형룡의 윤리신학을 재조명하여 현실 비평과 극복의 준거를 마련하려는 작업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I. 문제 제기

 

필자는 본 논문에서 박형룡 박사의 윤리신학의 정체성과 자리를 확인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만 부차적으로 한국교회의 대중적 신앙 가운데 자리잡은 신학 인식들의 편향성과 오류들을 비평할 수 있는 준거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비평적 준거를 마련하려면 어떤 신학적 오해들이 한국교회의 대중적 인식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의 평신도들과 일반 목회자들의 의식 세계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 구원론이 깊고도 강력한 영향을 남겼다. 유대주의자들과 논쟁을 주도한 바울의 이 전투적인 구원론은 그들의 대중적 인식 속에서 믿음의 유일 충족성만을 강조하고 행위 전반을 다 부정하는 교리처럼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이신칭의 구원론이 행위를 강하게 부정한다는 피상적인 인식 때문에 신자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조차 행위는 구원론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고 그것의 당위성 자체가 크게 약화되거나 무시되는 현상마저 낳고 말았다. 칭의 구원은 오직 믿음과만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롬 3:20,22). 하지만 이신칭의 구원론이 행위 전반을 다 부정하는 교리로 잘못 이해되다보니 믿음과 행위는 필연적으로 이원론적 대립에 빠져들게 되고 믿음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신앙제일주의’(fideism)를 낳게 만들었다. 이러한 ‘신앙제일주의’의 사고 체계 속에서 삶과 행위는 어쨌든 구원론과는 아무런 긍정적 관계를 맺지 못했고 자연히 축복론이나 상급론에 귀속되어버렸다. 여기서 기독교 윤리는 필연적으로 천국에서 상급을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 또는 축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성격의 윤리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편향된 인식 언저리에 이신칭의 구원론에 대한 대중적 오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손봉호 교수도 “우리 나라 기독교의 윤리적인 타락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소위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는 신학적 몰이해에 근거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대중적 인식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들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과 사회윤리”란 주제로 개최된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쎄미나가 대표적인 실례이다. 당시 개회예배 설교를 했던 한철하 박사는 자신이 오랜동안 구원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잘못된 방향에서 탐구를 했다고 고백하면서 “화란계의 ‘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형성과는 대조적으로 칼빈과 웨슬리는 윤리문제를 구원론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습니다”고 술회하였다. 동일한 쎄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했던 손봉호 교수 역시 전통적 시각을 교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참된 믿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관념적으로만 믿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또는 “도덕적 책임의 문제는 믿음에 의한 구원문제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도덕불감증 현상에 직면하여 이들의 우려와 비평이 맞는 면이 있다면, 우리는 과연 기독교 윤리를 구원론적 체계 속에서 어떻게 그 긍정적 자리 메김을 할 수 있을까? 박형룡 박사는 우리의 이런 질문에 어떤 신학적 답변을 주는가?

 

 

II. 구원론 체계 속에서 논의되는 윤리신학

 

기독교 윤리신학에 대한 박형룡의 핵심적 주장들은 그의 교의신학 저술들 가운데 [구원론]과 [내세론]에 담겨 있다. 윤리신학을 독립된 분과로 다루지 않고 그것을 구원론 체계 속에서 다루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오랜 전통이다. 행위가 구원을 가능케 하는 근거 내지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인식이 아마도 그런 전통을 확립해 놓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의신학에 개진된 모든 주장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칼빈주의적 신학원리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박형룡 신학의 또 다른 전형적 특징이다. 따라서 윤리신학을 구원론에서 분리시켜 이해한다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서 고립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의 신학 중심에서 이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윤리신학에 관한 그의 핵심 주장들은 구원론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심판의 준칙, 근거, 과정”을 논하는 내세론 섹션에서 등장한다. 여기에 실린 주장들은 그가 구원론 체계 속에서 윤리의 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엿보게 만들어 주는 핵심 주장인 것이 분명하다. 이 주장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차례대로 살피려고 한다: 1) 신앙과 행위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2) 행위심판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어떤 연관을 갖는가; 3) 선행이 상급과 미래 구원에 어떤 관련을 맺는가 등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4) 이신칭의 구원론이 윤리에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 6)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신자의 책임의 실재에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등의 질문 등도 살펴볼 것이다.

1. 믿음과 행위, 반립적 관계인가?

 

박형룡은 처음부터 행위를 구원의 원인 내지 근거로 보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부한다. 처음 구원 경험을 논하는 맥락에서, 그리고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적 상황에서 칭의 구원론 자체가 애초부터 행위와 믿음의 반립적 관계를 전제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박형룡은 바울의 그러한 의도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는 일단 유대교를 행위구원의 종교로 인식하는 오랜 전통에 서있었기 때문에 이신칭의 구원론이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내세우려는 유대주의적 신학을 거부하려는 논쟁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칭의 구원론은 자연히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유대교에 대항하고 믿음의 충족성을 내세울 훌륭한 논쟁의 무기로 인식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적 상황과 결부된 칭의 구원론은 행위를 부정하고 믿음만을 내세웠기 때문에 ‘행위(行爲)’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은연중에 대중적 인식 속에 파고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박 박사는 행위를 칭의 구원론의 조건으로 보려는 시도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하면서도 행위가 칭의 구원론의 열매나 결과로 보는 것마저 거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바울이 칭의 구원론에서 행위와 믿음을 대립적 구도에서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신자의 삶과 생활의 영역에서조차 행위 전반을 다 부정하는 교리적 준거로 오해되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한 거부 입장을 밝힌다. 처음 구원 경험에서 믿음을 배제한 행위가 끼어 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박 박사는 구원받은 신자의 생활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살전 1:3; 갈 5:6). 행위가 구원의 열매나 결과로서 인식하려는 입장은 박 박사의 다음 진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보편적으로 시인되기를 선행이 우리의 칭의에 필요하지 않음은 전자는 후자의간접적 과실(間接的果實)이므로 그것의 근거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의지하는 행동이요, 선행을 포함하거나 선행의 뿌리인 때문에 (선행이) 칭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구원론, 370).

상기 인용 진술에서 뿐만 아니라 박형룡의 다른 진술들을 살펴볼 때 그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다음 몇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첫째로, 선행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칭의를 가능케 하고 신자의 믿음만이 칭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믿음을 전제하지 않은 어떤 인본주의적 행위도 칭의와 구원 경험에 끼어들 수 없다. 둘째로, 일단 구원의 테두리 속에서 신자의 선행은 긍정적으로 표현된다. 1) 상기 인용 진술에서 믿음은 “선행을 포함하거나 선행의 뿌리”이다. 성경 저자들은 믿음을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복음에 대한 전인적이며 전폭적인 헌신의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믿음’과 ‘순종’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된다 (cf. 롬 1:5; 11:20,31). 이렇게 전폭적인 헌신과 순종 행위로서의 믿음이 ‘행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포함한다거나 그것의 뿌리라고 파악한 박형룡의 관찰은 정확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의 선행을 ‘믿음의 행위 또는 일’(살전 1:3)로 묘사하며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갈 5:6)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2) 신자의 선행은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과실’(내세론, 338) 또는 ‘산 신앙의 표현과 결과’(구원론, 310)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신자의 선행이란 믿음이 전제된 행위, 믿음이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일하여 나타난 열매, 결과, 표현이라는 뜻이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 저자들에게 있어서 불신자들이 행하는 ‘어둠의 일’, ‘육신의 일’ 등과는 대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결과로 나타난 이러한 행위와 삶에 대해 매우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3) 박형룡은 또한 신자의 행위에 대해서 “행위가 신앙에게 형상(form)을 준다”거나 “신앙의 ‘살아낸 실재’(lived out)”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구원론, 312). 신앙은 내면적인 산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의 생명력은 결국 행위라는 것으로 ‘형상화’될 수밖에 없고 이런 의미에서 전자를 후자의 ‘살아낸 실재’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아무튼 선행이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간접적 과실”이며 또한 선행을 “신앙의 과실(果實)”로 파악한 박형룡의 평가는 정당한 것이다. 신앙이 그러면 어떻게 행위를 산출할 수 있는가?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칭의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명령하신 선(善)을 행함으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의 속에 새 창조를 행하신 성령은 또한 산 신앙의 표현과 결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동력(動力)에 의해 행한 그의 선행은 장래 심판에 고찰을 받을 것이다 (고전 3:15) (구원론, 310).

 

믿음이 선행을 산출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칭의 구원에 감사하여 응답하는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명령을 따라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선행을 할 의무만 부과하시지 않고 그것을 행할 능력을 부여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어 칭의를 받은 자를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으며, 넷째로, “산 신앙의 표현과 결과”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살아있는 신앙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전폭적인 헌신과 순종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역동적으로 선행을 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기 인용문에 함축된 이 같은 이유들은 성경의 메시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위에 열거한 항목에 대해 상세하게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논증할 필요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 방면에 이미 글을 쓴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박형룡은 이 점에서 구원론의 범주 속에서 신자의 선행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칼빈(Calvin)과 개혁주의자들의 신학 노선을 따라가는 것이 분명하다.

구원 경험의 테두리 속에서 믿음과 행위의 적극적 관계에 대한 박형룡의 평가는 야고보서의 관련 구절들을 논할 때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이신칭의 구원론이 신자의 삶과 행위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오해되는 경향성이 대중적인 인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그릇된 편향성은 야고보서를 다룰 때도 첨예하게 나타난다. 전통적인 루터파 신학에 따르면, 이신칭의 원리를 바울 신학, 아니 신구약 전체의 신학을 이끌어 가는 중심 원리로 간주되었다.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복음의 중심 원리로 삼다보니 신약 성경에서 행위를 조금만이라도 강조하는 부분이 발견되면 그것을 평가절하시키거나 무시하려는 반격의 태세를 취하곤 한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평가한 루터(M. Luther)의 부정적 입장도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바울과 야고보의 내면적 조화를 말하기도 전에 이신칭의 복음의 규범적 해석 원리를 내세워 후자를 평가 절하하려는 루터파적 경향성이 소위 전통적인 보수 장로교회 성도들 안에서도 발견된다. 마치 신앙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이 개혁주의의 근본 정신인양 야고보서를 평가 절하하는데 노심초사이다. 바울서신을 중심적 정경으로 삼고 야고보서를 정경에서 제외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야고보서를 이런 식으로 평가절하시키려는 몰이해에 대해서 박형룡 박사는 반박한다:

 

야고보서가 다른 누구를 겨누었든지 간에 바울에 대항한 것이 아니다. 대개 바울이 만일 신앙과 신앙의 의를 행위에 대항하여 배치하였다면 (롬 3:28)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 대항한 것이요, 신앙에서의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행위에 대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여기에 추가하기를 참된 신앙과 선행 사이에 분열이 있지 않다고 하였다 (구원론, 295).

 

바울은 과연 신앙의 의를 행위의 의에 대조하여 말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행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원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의와 밀접한 친연(親緣)을 가진 것이며 그것에 포함된 것이었다.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에 향해 주목하였다 (살전 1:3). 신앙과 율법의 행위 사이에는 이원론(二元論)이 있으나, 신앙과 행위 사이에는 그렇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을 권장하였다(갈 5:22,23)...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정확히 형용하기 곤난하나 우리는 행위가 신앙에게 형상(form)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빨트는 행위를 신앙의 “살아 낸 실재(實在)(lived out reality)”라고 칭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하면 나무는 그것의 열매에 의해 알려지고 (마 12:33), 신앙은 그것의 행위에 의해 알려진다(구원론, 312).

 

바울에게는 칭의를 경험케 하는 수단이 믿음과만 연계되어 있고 야고보에게는 믿음과 행위 모두에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얼핏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형룡은 이런 식의 대립은 허용하지 않는다. 바울의 칭의 구원론은 신앙과 율법의 행위를 대립시켰을 뿐이지 신앙을 행위 자체에 대립시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 구원 경험을 논할 때 행위가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끼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 일단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도리어 행위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살전 1:3). 신자의 삶과 행위는 은혜로 값없이 얻은 구원의 결과적 징표이며 산 신앙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삶의 변화와 성화 생활은 선택과 창조, 구원의 근본 목적이기도 하다.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한 박 박사의 주장은 이 점에서 아주 정당하다.

 

2. 칭의 구원, 어떻게 성화의 삶을 가능케 하는가?

 

필자는 선행이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간접적 과실이라는 박형룡의 진술에 주목한 바가 있다. 넓게 보면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논하는 문제이다. 칭의 구원론이 처음에는 행위를 부정하다가 나중에 신자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근거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어떻게 윤리적 성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가? 칭의 경험을 한 자가 어떻게 선행을 할 능력을 받게 되었는가?

칭의 구원론과 신자의 선행간의 관계에 대해 박 박사는 앞선 인용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칭의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명령하신 선(善)을 행함으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이 진술은 칭의는 오직 믿음만으로 되어지고, 선행은 은혜로 칭의 경험을 한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실행할 의무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신자는 그 응답으로 선행을 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은 정당한 관찰이다.

하지만 행위를 부정하고 믿음만을 치켜세운 이신칭의 구원론이 어떻게 선행을 산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답변되어지지 않고 있다. 위에서 제기한 우리의 질문이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박형룡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칭의(稱義)’를 일차적으로 존재론적 변화로서가 아니라 법률적인 신분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의롭다 하다”는 동사가 본래 구약에서 법률적 배경을 지닌 술어로서 어떤 사람을 죄 없다고 선언하는 재판자의 무죄 선언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자주 쓰였고 신약에서조차 이런 법률적 배경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다: 죄의 통치 아래 종노릇하는 인간의 절망적 딜렘마 속에서 그를 마치 죄인이 아닌 것처럼(as if) 무죄 선언하여 법률적 신분만 바꾸어 놓는 칭의 구원론이 신자가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는가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난점 때문에 슈바이쳐(A. Schweitzer) 같은 학자들은 칭의 구원론이야말로 결함있는 교리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입장까지 피력한 상태이다: 이 법률적인 칭의 교리는,

 

전에 내면적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던 사람이 어떻게 칭의 행위를 통하여 그런 열매를 맺을 능력을 받게 되었는지 보여 줄 수 없다.

 

슈바이쳐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칭의의 법률적 성격만을 고집할 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실천적 문제를 대두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일차적으로 칭의 개념의 법률적 이해라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라 설명한다:

 

칭의는 죄인에게 관계를 가지나 그의 내면 생활을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의 신분에 변화를 일으키는 점에서 구원의 서정의 다른 모든 중요한 부분들과 다르다... 칭의의 결정(act)은 신자의 도덕적 상태를 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의 법적 신분을 변하는 법정적 행위라는 것은 경이 반복 주장하는 바이다 (구원론, 276).

 

칭의 선언은 이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에게 무죄 선언하고 의인처럼 여겨주시는 법률적 선언 행위로 간주된다. 여기서 자연히 추론되어 나오는 논리적 귀결은 칭의 선언은 직접적으로 “죄책의 제거”에게만 관련을 맺고 “죄의 오염”은 성화에서 처리된다는 것이다:

 

칭의는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라, 그의 신분에 변경을 가져오는 처리(處理)이다. 칭의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사하시어 죄책을 제거하시고 그를 그의 자녀로 삼아 영원한 기업을 부여하시는 일이다. 다른 편에 성화는 죄인의 내면적 갱신의 한 부분으로서 죄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죄인을 변화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게 한다 (구원론, 279).

 

박형룡의 주장대로 칭의가 죄인을 마치 의인인 것처럼 여겨주는 하나님의 법률적인 선언 행위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런 법률적인 행위가 성화 또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근거로 작용하는가? 그는 칭의가 죄인의 내면적 변화라든가 상태의 변화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단지 “죄의 형벌적 결과들”만을 제거하는 법률적 무죄 선언 행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값없는 칭의는 방종에 인도하므로 윤리적으로 파괴적이라고 말하는” 반론적 비판에 대해서 강하게 반박하면서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적 관계에 대해서 피력하기도 한다:

 

값없는 칭의는 방종에 인도하므로 윤리적으로 파괴적이라고 말하는 때 많다. 이것은 유대인이 바울의 믿음으로 칭의한다는 전도에 대항하여 일으킨 이의였다. 그들은 이것이 도덕적 구속(道德的拘束)을 해이하게 만든다고 말하였다...그러나 칭의 교리를 정해하면 이것이 방종에 인도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신자들의 생활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명확이 보여준다. 바울은 로마서 6:2-7에서 이 이의에 반답하였다. 우리의 칭의에서 그리스도와의 생적 영적 연합(生的靈的聯合)의 확고한 기초가 조성되는 바 그 연합은 우리의 성화를 확실케 한다...칭의는 우리가 원칙상 참으로 거룩하여질 수 있는 유일한 상태로 인도한다....칭의된 사람은 성화의 영을 받으니 그야말로 선행으로 풍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구원론, 314-15).

 

칭의가 “원칙상 참으로 거룩하여질 수 있는 유일한 상태로 인도한다”는 진술은 칭의와 성화의 어떤 관계를 지시하는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논증하기 위해 박형룡은 로마서 6:2-7을 논증 근거로 제시한다: “우리의 칭의에서 그리스도와의 생적 영적 연합의 확고한 기초가 조성되는 바 그 연합은 우리의 성화를 확실케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구원론, 315). 바울의 구원론적 술어들은 다양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술어들이 칭의 구원론과 연합의 구원론이다. 박 박사가 “생적 영적 연합의 구원론”으로 지칭한 것은 죄의 종노릇하던 옛 사람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연합하여 부활의 새 생명으로 함께 산다는 로마서 6장의 구원론을 지칭한다. 로마서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신칭의 구원론을 진술하다가 6장에 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dying and rising with Christ)는 소위 신비적 연합의 구원론을 피력한다. 바울이 자신의 윤리 신학을 칭의 구원론에 잘 연결시키지 않고 신비적 연합의 구원론에 연결시킨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4). 밑줄을 친 목적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연합의 구원 사건이 지향하는 윤리적 삶의 목적 내지 방향성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논증하기 위해 박형룡 박사가 근거로 내세운 로마서 6:2-7은 칭의와 신비적 연합의 구원론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7절의 표현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경험을 한 신자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얻었다”(dedikaiotai apo tes hamartias). 바울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법률적 칭의 술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그의 신학 세계 속에서 칭의 구원론과 신비적 연합의 구원론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은 옛 사람의 죽음과 부활의 새 생명을 경험한 신자의 근본적 변화를 함축하는데, 이러한 근본적 변화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의 칭의 경험에서 일어난다. 이로써 바울은 신비적 연합이라는 구원 경험을 칭의 술어를 가지고 묘사한 셈이다. 개념 세계에서는 이런 술어들이 구분되겠지만 바울의 통전적 신학 세계 속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 구원 경험이란 하나의 실재(實在)이며, 바울의 다양한 구원론적 술어들은 신자의 구원 경험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을 부각시킬 뿐이다. 그가 다양한 구원론적 술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구원 경험이 여러 단계로 구획되어진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사람은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 경험을 단순히 법률적 무죄 선언 행위로만 보지 않고 “죄의 통치에서 벗어나는”(apo tes hamartias) 해방의 경험으로 (cf. 롬 8:1-2),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에 대해 죽고 그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을 얻는 생명적 연합의 경험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박형룡 박사가 지적한대로 “칭의에서 그리스도와의 생적 영적 연합(生的靈的聯合)의 확고한 기초가 조성되는 바 그 연합은 우리의 성화를 확실케 한다”는 지적은 아주 정당하다. 박 박사는 물론 칭의가 법률적 신분의 변화만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6장의 주석에서 칭의 구원론과 신비적 연합의 구원론을 연결지음으로써 전자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게 된 새 피조물 된 변화를 내포한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칭의 경험을 새 창조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의 다음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칭의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명령하신 선(善)을 행함으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의 속에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의 속에) 새 창조를 행하신 성령은 또한 산 신앙의 표현과 결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동력(動力)에 의해 행한 그의 선행은 장래 심판에 고찰을 받을 것이다 (고전 3:15) (구원론, 310).

 

가까운 근접 문맥에서 일련의 술어들을 혼용하기 때문에 논리적 연관 관계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박 박사는 칭의 경험을 한 신자가 성령을 통해 새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 동일시한다 (cf. 고후 5:17 with 21). 따라서 “은혜의 동력(動力)”에 의해 힘을 입은 신앙은 선행을 산출할 수 있게 된다. 겉보기에 행위를 부정하고 믿음만 치켜세우는 이신칭의 구원론이 윤리적 방임과 해이를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칭의 구원론에 대한 이런 식의 오해를 강력하게 비평한다: 칭의는 선행을 할 수 있는 가능 근거이며(롬 6:4-7)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는”(딛 2:14) 분명한 윤리적 목적성을 갖는다. 칭의 구원론이 이렇게 분명한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다면 오늘날 그것이 도덕적 불감증과 헤이를 부채질하는 방식으로 오해되는 현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마땅하다. 손봉호 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윤리적 타락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소위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는 신학적 몰이해에 근거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의 비판은 물론 이신칭의 구원론 자체가 도덕적 헤이를 야기시킨다는 말이 아니라 그에 대한 신학적 몰이해가 그렇다는 말일 것이다.

구원 경험은 하나의 사건이다. 바울은 다양한 구원론 술어들을 가지고 서로 다른 전망에서 단일한 구원 경험이 지닌 풍부한 의미들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 세분화시켜 여러 단계로 구분 짓는 것은 성경의 참 교훈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칭의는 본래 법률적인 신분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법정적 술어이기 때문에, 칭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삶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새 피조물이 되었가를 잘 설명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개념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문제이지 바울 자신의 통전적(通典的) 신학 세계 내에서는 하나의 통합된 사건으로 이해될 뿐이다. 칭의가 새 피조물이 되는 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이 정당하다면,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는 이제 새로운 순종, 새로운 삶이 가능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박형룡 박사는 기독교 윤리를 구원론에 정초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윤리는 구원론에 뿌리를 두고 자라 나온 열매이며, 또한 구원론 자체가 지향하는 목적성 내지 방향성이다. 이러한 윤리적 방향성을 상실한 구원론은 결국 공허한 구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롬 6:4-23; 딛 2:14)

 

3. 그리스도의 속죄와 행위 심판, 어떤 관계를 갖는가?

 

신자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힙입은 은총의 선물이라면,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은총의 선물인데, 왜 마지막 심판에 가서 신자는 행위로 심판을 받는가? 신자의 선행이 칭의 구원론의 간접적 과실로 생겨난 것임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왜 그것이 행위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성도들의 선행(善行)이 어떤 의미에서 신적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3) 구원 목적의 실현 확인

박형룡은 하나님의 구원 작정이 신자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이 역사적인 신자들의 삶 속에서 실효적으로 실현되었는지를 심판을 통해 확인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평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원리가 있으면 그것의 실행에 따라 성공이 반드시 있고 비밀한 선사(善事)가 이룬 후에는 그것의 공인(公認)이 없을 수 없고 신앙의 결과로 선행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의 원리의 발동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비밀한 처사(處事)며 신앙을 주중(主重)하여 행하는 칭의가 있은 후에 그 성공의 변명이며 비사(秘事)의 공인이며 선행의 고찰인 대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구원론, 310).

 

이 진술의 핵심은 ‘공인’, ‘원리의 발동’, ‘성공의 변명’ 등과 같은 술어들 속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새 피조물로 만드시겠다는 구원 작정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성공했는지를 심판을 통해 공인하고 확인하기 위해 성도들의 선행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신, 구약 저자들에게 있어서 선택, 창조, 구원의 목적은 흔히 윤리적 삶과 행위와 관련하여 진술될 때가 많다. 선택과 구원의 근본적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신 7:6-8; 롬 8:33 -38; 엡 1:3-4)과 ‘은혜’(엡 2:8-10)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원 행위들을 통해 형성하려는 하나님의 백성은 선한 행위와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를 지향한다. 이것은 성경의 다음 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택의 목적:

내가 그로 (아브라함)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9)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요 15:16)

 

창조의 목적: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구원의 목적: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4)

 

선택, 창조, 구원의 목적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열매를 맺는 삶’, ‘선한 일을 행함’에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이와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 또는 결정이 실효적으로 실현되었다면, 참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알고 열매를 맺으며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 박사가 주장한대로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 작정이 실효적으로 실현되었는가를 확인하고 공인하며 변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선택과 창조, 구원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역사적인 신자들의 삶 속에서 실현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변화된 삶과 행위를 통해 전자의 실현 여부를 확인하고 공인하시려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지향하는 이러한 윤리적 방향성을 공허하게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도와 관련된 일이라 할 수 있다.

 

4) 용서받은 죄의 선언과 공포

신자들이 비록 구속의 은혜를 입어 변화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은 아직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며 아직도 죄의 세력의 영향권 속에 놓여 있다. 죄의 세력은 때때로 구원을 경험한 신자들의 삶 속에 뚫고 들어오고 심각한 죄에 빠뜨리게 할 수도 있다 (갈 5:14-19; 고전 5:1-5; 6:8-9 등). 신자들이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행위들이 여전히 최종적인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롬 14:10-12; 고후 5:10) 그 심판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경험한 그리스도의 긍휼의 속죄와 어떤 관련을 맺는가? 박형룡의 입장은 이 점에서 아주 분명하다:

 

이 최종적인 선포에는 “무슨 무익한 말”(마 12:36)이든지 다 포함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선행(善行)과 또 거기 따라오는 상(賞)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신앙으로 칭의되고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나, 형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가리워졌고 그의 의는 우리를 칭의한다 (구원론, 299).

 

신자와 불신자가 겪게될 심판은 서로 엄연한 차이가 있다. 신자는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는 반면에, 불신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신앙으로 칭의”되었기 때문에 “형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가리워진” 반면에, 불신자는 그가 행한 행위대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박형룡이 말한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도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정죄의 형벌이 없는 ‘행위 심판’(judgement by works), 다시 말해서 신자의 책임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의 받을 상벌을 결정하는 심판이 될 것이다. 사실 신자들이 나타낸 선행이란 것도 엄격하게 말해서 성령의 능력 아래서 행해진 하나님 자신의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은혜성’(gift)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빈은 “선행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고 말한다. 이렇게 은총의 선물로 나타난 성도들의 선행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관대하게도 그것에 대해 상까지 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 (갈 6:9; 살후 3:13 참조)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기독교강요 中, 329).

신자들은 이렇게 불신자들과 달리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가리워졌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을 때 그의 의가 그들을 칭의하고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 때문에 최후 심판은 이 사실을 최종적으로 선포하는 자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

 

복음 신자들의 죄들은 용서받은 죄이므로 심판 때에 (용서 받은 죄의) 공포되지 않으리라고 변론되나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이 공포될 것(물론 용서 받은 죄로)을 기대하게 된다 (구원론, 328f).

 

이 진술에서 신자의 행위에 대한 심판은 “용서 받은 죄의 공포”라는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 사역으로 신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이미 다 용서를 받았다. 따라서 신자의 행위에 대한 신적 심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를 공포함으로 심판대 앞에서 수치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죄의 통회로부터 가장 유쾌한 형(型)의 영적 기쁨을 초래할”(구원론, 329)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자리가 신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죄의 선포라는 점에서 형벌이기는 하나 도리어 유쾌한 형벌, 기쁨과 영적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형벌 면제의 선포의 장이 될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5) 신자들의 책임을 고무하는 근거

앞서 진술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의도의 실현에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신자의 책임을 고무하는 심판의 측면을 살필 차례이다. 이미 지적한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힙입어 긍휼을 전제한 심판을 받는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박형룡 박사는 심판의 자리가 그의 죄악된 말과 행실을 고발하여 책망과 노여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리도 될 것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힘입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악행에 대해 고발당하고 책망 당하는 범위와 정도에 대해서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 최후 심판은 신자들의 삶의 책임을 고무하는 근거가 되는가? 다음 진술을 주목해 보자:

 

최종 대심판의 신념은 모든 신자들의 생활에 엄숙성을 초래한다. 이 신념에 입각하여 보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사소하고 중요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고전 3:13; 고후 5:10). 무심히 부주의하여 발한 무익한 말들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다 (마 12:36)” (구원론, 311).

 

이 진술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신자라도 선악(善惡) 간에 생각하고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행위의 정당성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시해 준다. 박형룡 박사는 바로 이러한 심판의 엄숙성이 회개를 야기시키는 동인이 된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최후 심판이 신자의 책임의 실재를 추궁하는 자리가 된다면 책임 추궁의 정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범죄에 빠진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성경은 수많은 경고성 진술들을 발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고 구절들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박형룡은 범죄에 빠진 역사적 기독교인들의 삶을 꾸짖는 문맥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성경 저자들의 구절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경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튀빙겐의 루터파 신학자 코벨레(A. Koberle)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자의 악행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책망과 노여움을 공포하는 자리도 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악행을 지속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누구든지 지상 교회에서 악을 섬기기를 계속하는 자는 그 나라를 사승(嗣承)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 날 끝에 심판은 현실적으로 죄인과 의인의 사역(事役)들 위에 행하여질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을 노엽케할까 하는 공포는 신자의 생활에라도 거룩한 공포와 시험의 극복에 조력(助力)으로 반드시 수반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생활, 자갈 물리지 않은 혀나 몸, 불결한 정욕들, 성령을 소유한 신앙이 능히 억제하거나 치워 놓았을 수 있는 앙심 깊은 적개(敵愾)는 우리와 함께 가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발할 것이다(A. Kerberle, The Quest for Holiness, pp.165,166) (구원론, 330).

 

물론 역사적인 기독교인들의 악행을 문제 삼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이런 진술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참 신자도 올바로 살지 못하면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믿는 박형룡 박사가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기 진술을 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이런 진술들은 (고전 6:8-10; 갈 5:21f; 엡 5:4-5)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변화된 순종의 삶, 성화의 삶으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나타내라는 경고성의 진술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참 백성을 버리시는 일이 없으며 (롬 11:1-2)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실 것이다 (요 6:35-40). 문제는 어떤 사람이 알곡인지 쭉정이인가를 인식하는 것에 걸려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는 것만큼 절대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더욱이 범죄에 빠진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목양하는 상황에서 목회자들은 알곡과 가라지를 그들의 신앙 고백과 삶의 열매를 통해 추론하는 길밖에 없다 (요일 3:10,23). 왜냐하면 선택의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한 믿음과 견인의 삶을 통해서만 자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징표들이 나타나지 않고 고의적인 악의 행습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박형룡 박사는 성경 저자들처럼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중생한 참 하나님 백성이 아닐 수 있다는 함축을 지닌 경고인 셈이다. 칼빈(Calvin)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미 바울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 (딤후 2:19).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이 없던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든든히 서 있는 듯하던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러므로(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께서는 누가 그의 자녀로 간주될 것인지를 아는 것이 다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점에 있어서는 주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적응시켜 주셨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그 대신 사랑의 판단으로 대치하셨으며, 그것으로 우리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의 목적은 성화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자들과 맺은 언약은 거룩함을 나타내야 할 의무를 내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신자들도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도 않는데도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다고 상상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일에 서슴치 않는다. 왜냐하면 택함을 받은 참 하나님의 자녀는 부주의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리고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일에 매진하는 자들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박형룡도 칼빈과 마찬가지로 “고의적으로 죄의 행습을 계속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구원론, 371)고 경고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고는 선택자도 잘못 살면 타락할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한 경고가 아니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부도덕한 생활이 신자들이 경험한 “은혜의 상태와 조응하지 않기” 때문에 한 경고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인 기독교인들의 습관적인 악행을 문제삼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경의 구절들은 선택의 사실을 ‘인식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편의 절대적인 지식과 사람 편의 추론적인 지식 사이에 모종의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변화된 거룩한 삶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4. 성도들의 선행,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

 

대중화된 신학적 사고에 따르면, 이신칭의 구원론이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적 싸움에서 행위를 부정하고 믿음만 치켜세우다 보니 마치 그것이 행위 전반을 다 부정하는 것처럼 몰이해되어졌고 따라서 윤리적 삶과 행위는 구원론에서 떨어져 나와 상급론이나 축복론에만 귀속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대중적 인식에서 윤리는 구원론에 어떤 적극적 관련성도 맺기 어렵다. 행위를 구원론과 연계시켜 그것의 보다 적극적 의미를 찾을라치면 사람들마다 의아해하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행위가 구원론에 아무런 긍정적 연관성을 맺지 못하다 보니 그것은 기껏해야 상급을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 또는 축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맥락에서 아주 소극적인 의미 밖에 얻지를 못했다.

박형룡은 신자들의 선행을 최후 심판에서 있을 상벌의 결정에 연결시킨 바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살핀 바와 같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과연 그가 신자들의 선행을 마지막에 완성될 영생과 천국의 소유에 연결시키는가 하는 질문에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신앙의 열매로서 뿐만 아니라 칭의의 과실로서 나타난 성도들의 선행이 상급에만 연결되는가, 아니면 보다 폭넓게 미래 구원 자체와도 연결되는가? 박형룡은 “심판의 준칙, 근거, 과정”을 논하는 내세론 부분에서 후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논하는 한 중요한 진술을 남겨 놓았다:

 

마태 25장에서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수난하는 자녀들에게 자선과 인애를 행하지 않음으로 정죄되고 의인들은 그것들을 행함으로 영생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간단히 고찰해야 될 것은 죄인들은 엄밀히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정죄되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며 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선행은 그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과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를 받아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 ....심판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을 받은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만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여 보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한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투시하기 불능한 즉 판결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고 신앙의 상당한 시취물(試取物)인 어떤 외면적 가견적 행위(外面的可見的行爲)에의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각종 선행이 거론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종류가 시취물로 선발(選拔)되었으니 즉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사랑의 사역들이다 (내세론, 338).

 

마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그는 불신자들이든지 신자들이든지 간에 자선과 인애를 “행하는” 문제가 그들의 정죄 또는 영생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 자체가 그렇게 진술했기 때문에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마태복음 25장에서 언급된 ‘행위’의 성격에 대해 근접 문맥을 통해 먼저 분명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박형룡이 말하는 “자선과 인애”의 행위들은 우선 1) 일반 불신자들의 행위가 아니라 ‘성도들의 선행’이며, 2)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과실” 또는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를 받아” 나타난 선행을 가리킨다. 또한 3)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수많은 행위들 가운데 한 종류의 대표적 시취물로서 “자선과 인애”, 즉 사랑이 선발되어 언급되었다. 박형룡은 성도들의 대표적 선행으로서 “자선과 인애”, 즉 사랑의 행위가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고 말한다.

사실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예수의 제자들의 삶과 행위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나 영생을 소유하는 일에 직, 간접으로 연결짓는 구절들이 많이 눈에 띤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6-17//막 10:17-19)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5-2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6,19-21/고전 6:8-9; 엡 5:4-5 등)

 

마지막에 인용한 갈 5:21의 경고는 박형룡의 내세론과 (330쪽) 구원론에서 (371) 인용한 바 있는 표현들이다. 역사적인 기독교인들의 삶과 행위를 미래 구원과 연결시켜 언급하는 성경 저자들의 진술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를 띤다. 하나는 악한 행습에 젖어있는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거나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갈 5:19 -21; 고전 6:8-11; 엡 5:4-5; 롬 8:12-13; 갈 6:8 등)고 경고하는 부정적 경고 진술들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들의 삶의 의미를 영생이나 하나님 나라에 적극적으로 연관시켜 해설하는 긍정적 진술들의 형태이다 (마 7:21; 19:17//눅 10:25-28; 마 21:43; 25:1-46; 롬 6:15- 23; 8:12-13; 갈 6:8; 요일 3:14-15 등). 신자들은 행위와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절들은 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의 삶을 미래 천국이나 영생에 연결시켜 교훈하는가? 박형룡 박사가 말한대로 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통신학에서 성도의 선행이 “상급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많이 들어온 표현이어서 놀라운 일이 아니며, 필자도 이에 대해 상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의 선행(善行)이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는 박 박사의 진술은 전통신학의 전망에서 볼 때 파격적인 진술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설명이 필요하다. 상당히 논리적인 박 박사이기 때문에 이런 진술을 아무 생각이 없이 표현했을 리는 없다. 그는 ‘근거(根據)’라는 말을 두 다른 문맥 속에서 사용한다. 하나는 선행이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는 진술에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는 긍정적 진술에서 사용한다. 다음 두 진술들을 비교해 보라:

 

보편적으로 시인되기를 선행이 우리의 칭의에 필요하지 않음은 전자는 후자의 간접적 과실(間接的果實)이므로 그것의 근거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론, 370)

성도들의 선행은 그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과실(果實)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를 받아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 (내세론, 338)

 

쉽게 설명하면 선행(good works)은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칭의의 결과로 나타날 뿐인 반면에, ‘성도들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과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의 구속을 받아 나타난 칭의의 “간접적 과실”이다. 박형룡 박사는 바로 이렇게 과실로서 나타난 성도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고 피력한다. ‘-로 된다’는 빈사 표현은 선행이 칭의의 근거가 되지는 못하지만 신자들이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에 구속의 은총의 간접적 과실로서 나타난 선행은 이제 그들의 구원의 근거로 작용한다는 뉴앙스를 풍긴다. 박 박사가 이런 파격적 진술을 사용한 데는 몇 가지 논리적 발전 단계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신의 형상을 회복하고 새 피조물이 되고 변화된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 창조, 구원의 본래 목적에 속한다; 2)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다; 3)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을 때만 1)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4) 은혜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불순종의 자녀에서 순종의 자녀로 근본적 변화를 겪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자녀는 선택, 창조, 구원의 목적을 실현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열매를 맺으며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다; 5) 구속의 은혜로 나타난 성도들의 선행은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 마지막 5)번의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거룩한 삶의 질을 나타내는 자들만이 참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자들만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다는 의미에서 주장된 진술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에 힘쓰는 친백성”(딛 2:14)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구원 목적이 실현되어 새 사람 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구원받은 징표로서 바로 이러한 삶의 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마 21:43; cf. 롬 6:23). 바로 이러한 논리적 추론이 박형룡의 의도를 반영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할 수 있다:

첫째로, 이미 앞서 밝힌 대로 성도들의 선행은 산 믿음의 열매이며 구원의 은혜를 입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간주된다. 박 박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보편적으로 시인되기를 선행이 우리의 칭의에 필요하지 않음은 전자는 후자의 간접적 과실(間接的果實)이므로 그것의 근거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의지하는 행동이요, 선행을 포함하거나 선행의 뿌리인 때문에 칭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시인되기를 산 신앙 곧 사랑으로 역사하며 마음을 깨끗게 하는 신앙만이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고 우리의 하나님과 화목을 확보한다. 부도덕한 생활은 은혜의 상태와 조응하지 않는다 (구원론, 370).

 

성도들의 선행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전제 조건이나 근거일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가능해졌고 (요 3:16; 롬 5:10; 엡 2:8-10) 또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경험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의 선행은 오히려 칭의의 “간접적 과실”이며 구원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삶을 위해 성도들을 택하시고 (요 15:16; 창 18:19) 창조하시고 (엡 2:10) 구원하셨기 때문에 (딛 2:14),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의도와 목적이 실효적으로 실현되었다면 구원을 얻은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고 (요일 1:9; 3:6,9) 선한 일을 힘쓰는 삶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 (요일 2:29; 3:10,14). 그렇다면 신자라는 사람이 부도덕하고 악한 일을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것은 박 박사가 진술한대로 “은혜의 상태와 조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악행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이런 이유 때문에 중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볼 수도 없다.

둘째로, 성도들의 선행은 따라서 박형룡에게 있어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 참 하나님의 자녀와 거짓 하나님의 자녀, 또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정체성의 표지로 간주된다:

 

우리는 신앙으로 칭의되고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나, 형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가리워졌고 그의 의는 우리를 칭의한다. 그 때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으므로 거짓 교회에서 참 교회를, 유형 교회에서 무형 교회를, 가라지에서 알곡을 정확히 구별하여 판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마 13:24-30) (구원론, 299).

 

상기 인용된 논리를 역으로 추론하면 성도들의 선행은 구원을 얻은 징표로 간주되는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참 교회, 참 하나님의 백성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순종하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참 교회와 참 하나님의 백성을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적 대조 속에서 정의하는 데서도 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신앙으로 칭의된 사람은 모든 죄의 형벌에서 면제를 받은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창조, 구원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롬 8:29)가 되는 일을 지향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불순종의 자녀에서 순종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 (롬 6:16-22; 엡 2:1-11), 어둠의 일과 육신의 일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마 7:20; 21:43; 갈 5:22-23; 요 15:16)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자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막 3:35; 롬 8:13-14). 구원은 온전한 새 사람 또는 새 피조물로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의도가 실효적으로 성취되었다면, 그는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딛 2:14)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들일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성도들의 선행을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교회론적 표지로 간주하는 박형룡의 주장은 성경적이며 정당한 것이다 (요일 3:10,14 참조).

그렇다면 박형룡이 성도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상을 위한 근거로 된다”고 말한 것은 위에서 제시한 기본적 관찰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근거’라는 생소한 술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구원론에 길들여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진술의 의미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적극적인 논의 자체를 꺼려할 수도 있다. 만일 ‘근거로 된다’는 박형룡의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싶다면, 성도들의 선행과 성화의 삶은 “구원의 본질적 요소”에 속한다고 표현한 핫지 박사의 표현을 원용하면 어떨까? 하나님의 선택, 창조, 구원의 목적은 거룩한 삶과 행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신자의 삶 속에서 실효적으로 성취되었다면 구속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변화된 삶의 회복 과정을 나타낼 수밖에 없고, 또 하나님은 이러한 성화의 과정, 변화된 삶의 회복 과정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을 소유하도록 조치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신자들의 선행(善行)의 의의를 말하는 섹션에서 방금 전에 인용한 로마서 6:23의 구절을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해설하는 자신의 책에서 핫지(A.A. Hodge)는 로마서의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설한다: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선행이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거나, 신자가 전진하는 도중에서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공로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선행은 구원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변화된 성화의 삶,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열매를 맺는 삶은 하나님의 구원 의도와 목적에 내포되어 있는 근본적 요소이다. 구원은 행위와 관계없이 오직 은혜로만 얻지만, 신자가 은혜로 얻은 구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순종이 가능해진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성화의 삶 또는 변화된 삶의 회복 과정은 은혜로 얻은 구원의 실재를 나타내 보이는 증거인 셈이다. 핫지(Hodge) 박사는 이런 의미에서 성도들의 선행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든가 “선행은 구원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한다. 박형룡 박사가 성도들의 선행은 “그들의 구원의 근거로 된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핫지 박사가 말한 이런 의미에서 한 진술로 보여진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만한 신앙” 또는 “은혜로 경험한 구속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밝히실 터인데, 박 박사는 그것들의 실재를 나타내주는 증거는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고 신앙의 상당한 시취물인 어떤 외면적 가견적 행위”(내세론, 338)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선행을 “구원의 본질적 요소”로 파악했던 핫지의 견해와 다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믿음의 열매 또는 칭의 구원의 증거로서 나타나는 성도들의 선행을 미래 구원 또는 영생과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칼빈(J. Calvin) 자신이다. 그는 성도들의 선행을 그들의 소명과 선택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로 간주하면서 핫지나 박형룡 박사의 비슷한 주장을 한다. 칼빈의 다음 진술을 주목하라:

 

자신의 긍휼로 영생을 유업으로 얻도록 작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는 그의 평상적인 섭리 방식을 따라, 즉 선행을 수단으로 (by means of good works)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셨다. 섭리의 순서에서 선행하는 것은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 (롬 8:30), 선행하는 은혜를 뒤따르는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칼빈의 이 진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영생을 신자의 선행과 연결시킨다. 첫째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근거해서 영생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성도들의 선행은 앞서서 주어진 칭의의 은혜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셋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섭리 방식에 따라 ‘선행을 수단으로’(by means of good works) 영생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상기 인용문은 구원을 야기시키는 ‘원인들’(causes)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흥미로운 것은 구원을 가능케 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서 칼빈은 성도들의 선행을 ‘종속적인 원인’(inferior cause)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종속적인 원인’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칼빈이 구원을 야기시키는 여러 중심 원인들 가운데 성도들의 선행을 가장 낮은 서열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動力因)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質料因)은 아들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形相因)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目的因)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네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신의 긍휼로 영생을 유업으로 얻도록 작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는 그의 평상적인 섭리 방식을 따라, 즉 선행을 수단으로(by means of good works)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셨다 (Institutes III, 14.21).

 

하나님 편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순종이며, 인간 편에서 구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원인은 사람의 믿음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신앙의 과실로 나타나는 성도들의 선행은 영생을 얻도록 하는 ‘수단’(means) 또는 ‘종속적인 원인’(inferior cause)이 된다. 칼빈이 ‘원인’ 또는 ‘수단’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성도들의 선행이 영생을 얻을 만한 공로나 조건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실효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 또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처음 회심 단계에서 칭의의 수단으로서 어떤 선행도 거부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이외에 자신의 선행을 공적 삼아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단 믿음으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온 이후에 신자들이 거룩하고 선한 삶, 즉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은 근본 목적에 속해 있으며 (롬 6:4; 딛 2:14)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근본 의도에 속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자녀를 갖기 위해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처음부터 분명한 윤리적 방향성과 목적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에서 자신의 의도와 목적이 실현되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성도들의 선행과 성화의 삶의 실재를 물으실 것이다. 폭넓은 관점에서 볼 때 칼빈과 핫지의 진술들은 박형룡 박사의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이것은 개혁주의 구원론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선행의 공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며, 신자들의 선행도 그의 구속의 은혜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은혜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의 선행이 미래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된다거나 ‘조건’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삶’은 단지 신자가 이미 경험한 구원의 실효적 열매이며 신자가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서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서철원 교수 역시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나타난 신자들의 선행을 영생을 얻는 문제와 직결시키는 일을 한다. 그의 다음 진술을 주목해 보라:

 

이러한 성령을 힘입어 우리는 몸의 행실들을 죽여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행(善行)을 하도록 도우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된 성령의 변화 사역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생을 수여 받는다 (요일 2:1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를 영원토록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서 교수의 이러한 입장은 크게 칼빈, 핫지, 박형룡으로 이어지는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중심 과 궤를 같이 한다. 십자가 구속의 결과로 나타난 성도들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택, 창조, 구원의 목적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실현된 증거이며 그들의 구원의 본질적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이러한 변화된 삶의 과정을 통해 영생을 얻도록 조치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신약의 이러한 심오한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성도들의 선행을 천국이나 영생의 축복과 연관시키려고 하기만 하면 ‘행위 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려한다. 이것은 성경의 교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으로 자신을 섬기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셨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타락한 자들을 구속하고 그들을 순종의 자녀들로 변화시키셨다. 이것이 구원의 본질적 성격이며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다 참 하나님의 자녀들은 따라서 그의 거룩한 뜻에 순종할 줄 아며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다 (딛 2:14). 서철원의 말을 빌린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작정된 자들이다. 이 거룩을 이루고 지킴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결과로 그들은 “거룩함에 이르고 그 결국은 영생이다 (롬 6:21,22)”. 그러므로 신자가 악한 행습을 습관적으로 계속하는 것은 그가 경험한 “은혜의 상태에 조응하지 못한다”. 그가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신의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닮은 삶의 회복 과정을 나타내야 한다. 천국은 이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구원이란 은총의 ‘선물’ (Gabe)이면서도 (엡 2:8) 두렵고 떨림으로 성취해내야 할 ‘과제’(Aufgabe)이기도 하다 (빌 2:12). 이 두 차원은 때로 ‘직설법’(indicative)와 ‘명령법’(imperative)의 관계로 설명되기도 하다. 한국교회의 대중적 신학 인식 속에서 구원을 은총의 선물로만 일방적으로 간주하다보니 그것이 처음부터 신자들의 책임 있는 순종과 삶을 통해 성취되어야 할 과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구원이란 처음부터 “과제를 떠맡은 선물”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은 과거에 경험한 실재이면서도 마지막 날에 완성되어야할 미래의 실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완성 과정에 있는 실재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이 성취되어 가는 이 과정을 연약한 인간에게만 남겨놓지 않으시고 자신의 성실성에 붙들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 신자 가운데서 구원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날에 그것을 신실하게 완성시킬 것이다 (살전 5:23-24; 살후 3:3; 요 6:37-40).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신자의 견인하는 삶을 수단으로 삼아 그의 삶 속에서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여 그들로 영생을 소유하게 하실 것이다.

필자는 방금 전에 구원이 처음부터 “과제를 떠맡은 선물”로 주어졌으며 “직설법이 명령법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또한 언약신학적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사람은 오직 은혜로 언약 백성이 되고 (신분) 그들의 언약 백성된 신분은 그들의 책임 있는 순종의 삶을 유지된다. 여기서 ‘신분’(status)과 ‘행위’(behaviour)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필연적인 관계를 지닌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면 (신분) 그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행위). 신분은 행위를 통해 자명해지고, 행위는 신분을 나타내 보여준다. 박형룡 박사는 비록 신자의 윤리적 삶의 실재와 당위성을 최근의 신약신학적 술어들을 가지고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술들은 언약신학의 체계에 내재한 ‘은혜성’(gift)과 ‘요구성’(demand) 사이의 균형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박 박사는 성도들의 선행을 산 신앙의 열매이며 구속의 은총을 경험한 결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또한 천국/영생의 길에 서있음을 보여주는 ‘구원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이러한 구원론 신학은 칼빈과 핫지의 신학과 본질적으로 같은 궤를 형성하고 있다고 사료된다.

5. 신의 선택과 신자의 책임, 순환론적 접근이 가능한가

 

앞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자연히 신적 주권(主權)과 신자의 책임(責任)의 관계 문제로 인도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책임의 실재를 확증하는데 걸려 있다. 대중적인 신학 인식 가운데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칼빈주의의 당연한 원리가 너무 기계적이고 사변적인 원리로 오해되는 경향마저 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또는 단독 사역이란 개념들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다 보니 성경 속에 담겨있는 간절한 호소, 권면, 설득, 명령, 강한 경고들의 실재가 빛을 바래기가 일쑤이다. 결국 그것들 배후에 놓여있는 신자들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의미 있게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그들의 책임의 실재를 크게 약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신약이나 바울 서신에 담긴 메시지들은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교훈하고 권면하며 때로 명령도 하고 경고하기도 하는 인격적인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개혁주의 신학의 원칙이며 성경의 교훈에 근거한 메시지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신자의 책임을 마비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삼는 것 역시 성경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다. 성경 저자들, 특히 바울은 신자들이 범죄에 빠질 때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전 6:911; 갈 5:19-21; 엡 5:4-5; 마 7:21; 롬 8: 12-13; 갈 6:8 등)는 등의 강한 경고를 하지만, 그들이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굳게 붙들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로 치켜세우면서 그들의 궁극적 구원에 확신을 불어넣는다 (살전 1:3-4; 롬 8:31-39 등).

바울 사도는 이런 면에서 신적 주권과 신자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이중적인 접근,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 접근’(ontological approach)과 ‘유추론적 접근’(inferential approach)에 따라이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존재론적 접근”이란 시간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책임있는 삶의 실재를 하나님의 영원하고 주권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신의 주권적 행위의 관점에서 신자의 삶의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람이 복음을 믿고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그가 영원 전에 선택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택함을 받은 신자는 자신의 구원을 상실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반드시 살리실 것이다 (요 6:35-46). 이러한 존재론적 접근은 구원이 어떤 규범적 원리 하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박형룡 박사는 자신의 교의신학에서 구원론의 규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이러한 존재론적 접근을 취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추론적 접근’이란 신자의 책임있는 삶의 실재를 통해 그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며 택함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추론하는 접근 방식을 말한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는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유추론적 접근 방식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어떤 나무인가 하는 존재의 문제는 그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이 택함을 받은 참 하나님의 백성인가는 그의 삶의 결과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구원의 규범적 원리를 설명할 때나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해줄 때 존재론적 접근을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참 신자와 거짓 신자,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간하는 일이 범죄에 빠진 역사적 신자들의 현실 속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선행과 순종의 삶을 가지고 그들의 신분과 생활을 역으로 추론할 때도 있다. 말하자면, 성경은 존재로부터 삶과 행위의 당위성으로 나아가는 논리를 피력하기도 하지만, 삶과 행위를 통해 존재와 신분을 추론하는 “실천적 유추”(syllogismus practicus) 또는 “순환론적 접근”(circular approach)을 자주 하기도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과연 이러한 실천적 유추 개념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 논란이 일고 있다:

 

니젤(W. Niesel)과 같은 칼빈 연구 학자들은 칼빈이 ‘실천적인 유추’(syllogismus practicus), 즉 선한 삶을 통해 선택의 사실을 유추하는 이론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벌카우어와 벌코프 같은 다른 많은 학자들은, 비록 우리가 선행을 ‘이차적인 위안’(secundarium admoniculum) 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들‘로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칼빈이 ‘실천적 유추’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의 저술 [기독교강요]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 선행과 선택의 관계를 언급하는 한 구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성도들의) 선행은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칼빈의 윤리 교훈에 관한 한 유명한 저술에서 월레스(R.S. Wallace) 역시 성도들의 성화 생활이 그들의 선택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선택의 목적이 성화 생활에 있기 때문에 성화 생활을 통해 선택의 사실을 추론하는 것이 칼빈 사상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칼빈에 있어서, 우리를 선택하신 전체 목적은 사실 우리의 성화에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자들과 맺은 언약은 거룩함에 이르러야 할 의무를 내포한 것이다. 하나님은 선택과 성화를 함께 묶어 놓았으며,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묶어놓은것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삶의 거룩성을 선택의 은혜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도로 불린다”는 사실은 선택으로부터 기인되며 선택의 목적은 거룩함에 있다. 그러므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방종이나 부주의한 삶을 살 수 있는 어떤 변명거리도 주지 않는다. 칼빈은 심지어 선택자들에게 두려움 속에서 행할 것을 경고할 뿐만 아니라, 만일 은혜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드러날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집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우리가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성화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사실로부터 따라와야 한다.

 

만일 이러한 관찰이 맞다면, 실천적 유추의 개념이 칼빈주의적 사고방식과 모순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선택의 작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열의에 기인하였다는 관념은 이 작정이 선견된 신앙이나 선행 같은 사람 안의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신앙이나 선행이 신적 선택의 조건이 된다는 개념은 성경에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칼빈에게서 발견되고 벌코프나 벌카우어에 의해서 인정되는 실천적 유추의 개념을 박형룡은 자신의 신론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는 않는다. 그는 예정과 선택 그리고 그것과 균형을 이루는 유기 개념들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란 사상에서 필연적으로 추론되어 나오는 개념들로 추론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이 그의 신론적 논의를 압도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구원론과 내세론에서 관찰하였듯이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이 참 신자와 거짓 신자,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짓는 교회론적 표지들로 역추론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박형룡의 교의신학을 주도하는 존재론적 접근 방식 속에 실천적 유추가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자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 논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접근 방식만 취하게 되면 예정과 선택 교리는 자칫 도덕적 해이와 방종을 가져올 수도 있다. 선택 교리가 성경적 교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삶과 유리된 채로 사변적으로만 접근된 선택 교리는 성도들의 도덕적 생활을 고무하기보다는 자칫 그들의 책임을 마비시키는 수면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성경 저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은 항상 신자의 견인생활과 상관된 개념이다. 물론 신자의 순종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다는 개념은 그들에게 분명 낯선 개념이지만, 신자의 책임 있는 삶과 순종 행위들은 신적 선택이 현현된 것으로 추론되기도 한다 (살전 1:3-4 참조). 베드로는 심지어 선행(善行)의 삶으로 견인함으로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증하라고 권면하기조차 한다 (벧후 1:5-11).

필자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신자의 삶의 관계를 조망하는 두 접근들, 즉 ‘존재론적 접근’과 ‘유추론적 접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두 접근들을 설명할 수도 있다. 신약의 교훈, 특별히 바울의 메시지를 보면 선택 교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 다른 전망을 가지고 신자의 삶의 상황을 이해한다. 첫째는 “추론적이고 회상적인 전망”이다. 선택자의 신분은 책임을 다하는 신자들의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추론되고 또 그것들과 관련하여 회상되어진다 (cf. 살전 1:3-4; 롬 8:28-34). 말하자면 신자의 선한 생활과 책임 있는 행위는 영원한 신적 선택의 결과로 신앙적 관점에서 회상적으로 이해된다. 바울이 이러한 추론적이고 회상적인 전망을 취한 것은 신자의 책임 있는 생활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특이한 사실은 신의 선택 사실은 항상 역사적인 신자의 책임 있는 견인생활을 내포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선언적이고 해석적인 전망”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 사실은 역사적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삶을 ‘해석해 주고’ 그것들을 의미 있고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예정론적인 언어들이 환란과 핍박 속에서 복음에 굳게 서있는 역사적 기독교들을 확신시켜 주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해석적 과정이 신자의 책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폐지시키거나 무효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궁극적 확신은 순전히 논리적 관점에서 추론된 절대적 확신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위의 두 전망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후자는 전자에 근거한다. 믿음, 선행, 견인생활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해서 바울은 신자의 선택 사실을 추론하기도 하고, 역으로 영원의 사실에 비추어 신자들의 삶을 해석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시켜 주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절대적인 논리적 확실성과 실제의 실천적 확신” 사이에 거리가 존재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무튼 실천적인 관점에서 박형룡은 그러한 거리를 선행의 의미와 기능을 논하는 내세론 부분에서 인정하는 것이 분명하다:

 

심판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을 받은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만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여 보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한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투시하기 불능한 즉 판결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고 신앙의 상당한 시취물(試取物)인 어떤 외면적 가견적 행위(外面的 加見的 行爲)에 의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내세론, 338).

 

비슷한 주장이 “칭의와 최종 심판의 관계”를 말하는 구원론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그 때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으므로 거짓 교회에서 참 교회를, 유형 교회에서 무형 교회를, 가라지에서 알곡을 정확히 구별하여 판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마 13:24-30) (구원론, 299).

 

박형룡의 논리는 여기서 존재론적 접근이 아니라 실천적 유추 또는 순환론적 접근에 가깝다. 신앙은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밀한 신앙의 내면 세계를 꿰뚫고 들어가 그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나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구원 얻을 만한 참된 신앙을 가졌는지, 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의 참 백성인지를 규정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신앙의 상당한 시취물” 또는 “어떤 외면적 가견적 행위”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박 박사가 여기서 강조하는 실천적 유추의 접근 방식이 최근의 전통신학을 압도하는 존재론적 접근 방식으로 인해 점차 설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은 물론 필요하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규범과 원리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며 하나님 백성이 되는가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범적이고 논리적 투명성이 여기서 확보될 수 있다. 믿게 되면 구원 얻는 새 피조물 된 것을 확신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선택된 사람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구원을 얻었으니 선한 삶과 행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 내에서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택자가 되었으면 다 됐다는 안일한 논리가 팽배하고 있다. 심지어 택함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간다는 그릇된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다. 박형룡 박사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 “누구든지 지상 교회에서 악을 섬기기를 계속하는 자는 그 나라에 사승(嗣承)하지 못할 것이라”(구원론, 330)고 경고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칼빈이 말한대로, 선택의 목적은 성화에 있기 때문에 악을 습관적으로 자행한다는 것은 그가 참 선택자가 아닐 수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범죄하는 역사적인 신자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성경 저자들은 유추론적 접근 방식을 자주 원용한다. 그들은 신자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범죄를 지속할 때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리라”고 하든가 또는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롬 8:13)는 경고들을 발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범죄하는 신자들의 귓전을 때리는 수많은 경고들이 존재한다. 이런 경고들은 택함을 받은 자라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거룩한 삶으로 나타내라는 뜻을 갖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 저자들은 선택자는 범죄를 계속해도 결코 안전할 것이라고 교훈하는 일이 없다. 도리어 하나님의 선택의 사실은 신자들의 거룩한 삶의 실재, 예를 들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통해 자명해질 뿐이다 (살전 1:3-4). 더욱이, 선택의 사실은 도리어 환란과 핍박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신자들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성경 저자들이 호소하는 권면 방식과 존재론적 접근 방식과 분석 논리에 익숙해져 있는 서구 교의신학자들의 접근 방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박형룡 박사의 진술에는 후자의 접근 방식이 그의 교의신학적 논의들을 주도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의 메시지에 충실하려는 성실성 때문에 전자의 접근 방식을 취하는 때도 많다. 단적인 예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논하는 자리에서 성도들의 선행을 참 신자의 거짓 신자,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교회론적 표지들로 간주하는 실천적 유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한다. 박형룡 박사는 이 점에서 성경의 다양한 권면 방식들과 메시지들에 대해 신학적 균형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신자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단독 사역”만을 치켜세우다가 신자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폐쇠적인 논리가 성경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바른 패러다임이 아니라면 그것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경적 패러다임은 어떤 것인가? 필자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결론을 삼고자 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게재된 존재론적인 거리는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통한 접근만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책임있는 믿음의 삶만이 시간-영원의 간격이 다리놓아질 수 있는 유일한 입지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의 주권과 그의 임의적인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맹목적인 신앙주의의 옹호를 뜻하지 않는다. 필자가 ‘믿음의 접근’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알려져 있지 않은 많은 하나님의 측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적 주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론적으로 반드시 신자의 책임의 실재를 의문시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브로드(G.I. Mavrodes)가 소위 ‘인식론적인 딜렘마’(epistemic dilemma)라고 부른 이론적 진퇴양난에 직면하지 않는다. 믿음의 접근은 신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실재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모순에 빠진 것처럼 가정하고 개인적인 고뇌 속에서 그 긴장과 씨름하도록 우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선택의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 살 때만 자명하며, 믿음으로 산후에 그것은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그 전망으로부터 신자는 자신의 모든 삶과 존재를 은총의 선물로 이해해야 하고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합법적으로 끌어 낼 수 있다.

 

 

III. 결론적 관찰과 미래의 과제

 

박형룡은 구원과 윤리의 상관성을 이해할 때 박윤선보다 더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신칭의 구원론의 원리를 성경해석의 중심 원리로 삼아 삶과 행위를 강조하는 신약의 구절들을 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박윤선보다 성도의 선행과 윤리를 구원론 체계 속에서 밝히려 하였고 언약신학 체계 속에 내재한 ‘은혜성’(gift)과 ‘요구성’(demand) 간의 균형성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경험되는 칭의론을 확고하게 붙들면서도, 칼빈과 마찬가지로 칭의 구원이 신자들의 선행을 산출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강하게 붙든다 (기독교강요 中, 338- 345,357-59). 그는 심지어 다른 개혁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나타난 신자들의 선행을 영생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박형룡은 신자들의 윤리 또는 성화 생활이 그들의 구원의 본질적 요소이며 복음 메시지의 핵심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데 기여하였다. 십자가의 구속은 행위와 관계없이 오직 은혜로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거룩에 이르는 열매를 나타내며 선한 일에 힘쓰는 존재들로 변화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변화된 삶을 나타내는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다. 이 점에서 십자가 구속은 윤리적 삶을 지향한다.

불행하게도 대중화된 전통 신학은 박형룡 신학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균형성을 깨트려버리고 한 쪽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성도들의 선행을 구원론 체계 속에서 파악하거나 심지어 성경의 교훈을 따라 윤리적 삶을 구원의 본질적 요소로 이해하고자 했던 박형룡 박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윤리가 구원론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떨어져 나오다 보니 기독교 교리 속에 정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곧장 상업주의적 윤리로 퇴락하게 된다. 선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축복론에 국한시키든가 아니면 상급론 차원에서만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 윤리가 신자의 정체성과 구원 목적에 관련된 근본 요청이라는 사실을 소홀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신자가 축복을 많이 받고 더 큰 상급을 받기 위해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며 성경에는 삶의 자극제로 이러한 동기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자의 삶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이런 동기들에만 제한시키는 것은 선한 삶과 성화의 삶이 신자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본질적 요소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창조하시며 구원하시는 근본 목적과 의도에 속하기 때문에 신자의 근본 정체성에 걸린 문제라는 측면을 못 보게 만들 수 있다.

이 점에서 박형룡 박사의 진술들은 균형의 양 쪽 진술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신학 작업 속에서 그 균형성을 어떻게 정립시킬 수 있는가가 미래의 과제로 맡겨져 있다. 말하자면 성경신학과 교의신학에서 해석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사용되는 ‘언약적 전망’ (covenantal perspective)과 ‘선택적 전망’(election perspective)이 어떻게 상호보완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가를 분명히 해설하는 것이 중요한 미래의 과제가 될 것이다. 성경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선택 전망에서 너무 과도하게 신학을 체계화시키면 하나님의 행위(action)과 인간의 반응(response) 사이의 인격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성경적 메시지의 중요한 측면을 약화시키기 쉽다. 하지만 언약적 전망만을 일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역사는 인간들의 위태로운 책임에 달려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사역을 약화시키기가 쉽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이들 두 전망을 동시에 붙들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언약적 전망에서 보면 신자가 은혜로 언약 관계에 들어서고 책임있는 순종으로 그 언약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물론 때로 인간의 약함 때문에 범죄하게 되면 언약적 체계 속에서 용서의 길은 열려져 있다. 하지만 만일 그가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여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는 언약 밖으로 쫓겨나게 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누리는 언약적 축복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교의신학적 저술들 속에서 이런 언약 신학적 해석방식이 잘 원용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도리어 전통 교의신학 저술들을 주도하는 신학 원리는 예정과 선택 교리가 아닌가 한다. 이들 두 전망을 잘 조화시키는 인물이 바울이다.

바울서신들을 보면, 언약 패러다임이 그의 권면 이곳저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cf. 롬 6: 15-23).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선택 개념은 언약 체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술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언약 전망과 선택 전망을 이원적으로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선택하시고 그들과 주도적으로 언약을 맺으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처럼 그의 명령과 율례와 법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분명한 윤리적 방향성을 갖고 있다 (신 7:1-11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로 언약 백성이 되었으면서도 결국 순종치 않음으로써 언약은 파기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 반역과 불순종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은 폐기되었는가? 이것이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이 고민하는 구원사적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순종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은 폐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울은 선택론을 가지고 참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육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라고 해서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들로 인해 택하심을 받았지만 (민족적 선택, 롬 11:28),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고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만 (좁은 의미의 선택, 롬 11:4-7)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여기서 선택의 사실은 불신앙에 빠진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 준엄한 역사 현실 가운데서 현현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권적 선택 교리를 옹호한다고 해서 성경 저자들은 신자들의 책임의 실재를 결코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은 결국 육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예외 없이 다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에게 주어져 왔으며 그들은 책임 있는 순종의 삶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구원사적 원리는 신구약 전체에 걸쳐 변함이 없이 적용되어져 왔다. 교회에 들어온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다 참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아니다. 택함을 받은 참 하나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의 고백(orthodoxy)과 참된 사랑의 실천(orthopraxy)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이다 (요일 3:10,14,23). 순종을 했다고 선택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믿음의 고백과 사랑의 실천은 선택의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논리는 존재론적 접근만이 아니라 실천적 유추의 접근을 자주 사용한다. 바울의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나타나는 언약신학적 전망과 선택신학적 전망을 성서신학 뿐만 아니라 교의신학의 논의들 속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정립해갈 수 있는가가 우리에게 짊어지워진 미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드러낼 때만이 성경의 풍요하고 생동감 넘치는 메시지들이 풍성하게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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