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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경직의 청교도적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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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의 청교도적 영성

 

 

1.1.1. 김영한 교수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국개혁신학회 초대회장)

 

 

 

머리말

 

청교도적 신앙이란 복음주의 신앙의 특성적 일면을 일컫는 것이다. 박형룡과 한철하는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신앙의 전통을 개혁주의적이고 청교도적 전통이라고 하였다. 박형룡과 한경직은 거의 같은 시기의 한국교회 지도자로서 프린스턴에 유학하여 장로교 전통을 배우면서 청교도 전통에 관하여 배웠다.

 

한경직은 그의 설교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이 청교도적 복음주의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건전하고 열렬한 청교도들이 가졌던 복음주의 신앙이 아니면 아니됩니다.” 한경직은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청교도적인 청빈과 경건의 삶”이라고 하였다. 1982년에 출판된 저서 [한경직 목사]에 14 명사(名士)가 쓴 “한경직 목사를 말한다”를 읽어 보면, CCC 총재 김준곤은 한경직을 “영원한 청교도”라고 불렀다. “청교도” 개념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순례자의 전통에서 왔다.

 

박형룡은 1976년 가을호 [신학지남]에 기고한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글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신학”이라고 밝히고 있다. 박형룡은 이것을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청교도적 개혁신학“은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신학“이다. ”청교도적 개혁신학“이란 박형룡 자신이 추구하는 신학이며 한국교회가 끝까지 보수해야 할 정통신학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박형룡과 한경직의 차이란 전자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 청교도 신학의 교리를 강조했다면 후자는 청교도적인 삶을 강조했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예장 통합이나 합동 교단의 신앙적 입장은 근본에 있어서 다른 것이 없다. 단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교회 정치적 문제로 나누어진 것이다. 필자는 1960년대 대학교 시절 충무로에 있는 충현교회에 출석했는 데,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저동에 위치한 영락교회 예배에도 자주 참여하였다. 당시 두 교회는 갈라진 두 교단를 대표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두 교회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의 내용은 동일한 복음주의적이고 청교도적 신앙을 중시하는 메시지였다. 단지 영락교회 한경직의 메시지가 시대를 반영하는 보다 지성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메시지였다면, 충현교회 목사 김창인의 메시지는 보다 개인 신앙생활의 충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였다고 기억된다.

 

본 논문은 한경직을 그의 청교도적 영성의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필자는 한경직의 청교도 영성을 주로 그의 설교를 중심으로 하여 열가지의 특징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열가지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성경 중심의 칭의 신앙, 복음주의 신앙, 경건과 명상과 회개의 신앙, 청빈의 영성, 전도와 선교의 신앙, 구제와 나눔의 영성, 헌신과 성결의 신앙, 순례자의 신앙, 열린 보수의 신앙 이다.

 

 

I. 청교도 신앙의 정의

 

영국의 청교도 목회자 에롤 헐스(Erroll Hulse)가 쓴 [청교도들은 누구인가?}(Who Are Puritans?)에서 청교도들을 다음같이 정의한다. 청교도들이란 영국의 개신교 전통에서 나와서 신대륙 미국의 이민자 신앙에 이르기까지 성경말씀에 충실하고, 강해설교를 했으며, 목회적 돌봄, 개인 경건과 생활에 거룩성을 실천하면서 복음에 입각한 철저한 삶을 살았고 복음전도에 힘쓰면서 사는 자들이다.

 

어니스트 케번(Ernest F. Kevan)은 그의 저서 [율법, 황홀한 은혜(The Grace of Law,). 청교도 신앙의 정수]에서 청교도들이란 교회조직 용어로는 제네바 교회조직의 모범을 따라 교회가 개혁되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가르키고, 종교적 용어로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영국국교회 울타리 안팎에 있는 성직자들을 가르킨다. ”청교도주의는 거룩한 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와 삶의 심오한 도덕적 성실이란 특징이 있었다.“

 

존 오웬(John Owen), 존 번연(John Bunyan),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토마스 맨턴(Thomas Manton),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조나단 웨드워즈(Jonathan Edwards)등이 대표적인 청교도들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 언약의 백성이었다. 언약은 구속사 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언약으로 나타났으며,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며,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체를 가지며 총족된다. 청교도들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전통이 발전시키고, 1563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발전시킨 언약 개념을 진지하게 수용한 자들이었다. 언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 주권적인 은총(sovereign grace)을 믿고 그것에 근거해서 사는 자들이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에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순례자들에 이르기까지 청교도들은 실제로 이 하나님 주권적 은총을 믿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르게 계승하고자 하는 자들이었고, 의인(義認)의 삶을 살면서 청빈과 경건의 삶을 살고,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구제와 봉사의 삶을 실천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종교개혁이 미흡하고 불완전하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평신도의 지위향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칭의의 신앙에서 출발했으며, 고도의 윤리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성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매우 훈련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청교도들은 경건 양태(신학과 삶의 방식)에 따라 교리적 청교도들(Thomas Cartright, John Field, Walter Travers), 복음적 청교도들(Richard Grenham, John Preston, Richard Sibbes, Thomas Goodwin), 신비적 청교도들(Ann Hutchinson) 합리적 청교도들(John Milton, John Biddle)이 있다. 교리적 청교도 유형은 청교도의 주류로서 성경의 권위와 회심의 경험과 거룩한 삶과 순종을 추구하였다. 복음적 청교도 유형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과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다. 신비적 청교도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지속적 경험, 하나님과의 영교를 중요시하고 가시적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합리적 청교도는 인간 이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영교를 주장하였다. 한경직은 교리적 청교도 유형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한경직은 1947년 4월 20일 “청교도의 신앙”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청교도를 넓은 의미에서 해석한다: 청교도 신앙이란 “이렇게 더러운 것을 온전히 버리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 앞의 거룩한 생활을 이루겠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도시대 이후의 모든 경건한 신도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요, 노력이었습니다.” 그는 청교도 신앙의 역사적 내력에 관해 피력한다: “교회 역사상 청교도라 함은 17세기 중엽 영국 제임스 1세로부터 찰스 2세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영국 안에서 당시 로마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영국 국교를 상대로 한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투쟁한 교도들과 또 이들 중에서 핍박을 피하여 미대륙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주(州)에 교회를 세우고 미국을 건설한 교도들의 총칭입니다.”

 

한경직은 1947년 12월 12일 베다니(영락교회 전신) 교회 창립 2주년을 맞이하여 “건국과 기독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초는 “민주주의 사상”이며, 이 사상의 핵심은 “개인 인격의 존중사상, 개인의 자유사상, 만인의 평등 사상”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사상은 서구 기독교에서 온 것이며, 청교도의 전통과 연관된다고 설교하고 있다: “건국도상에 있는 이 시대에 해방 직후 본 교회가 창립된 것은 뜻이 깊은 줄을 압니다. 나라보다 교회가 먼저 서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시내산에서 먼저 교회가 서고 그후에 나라가 가난한 복지에서 섰습니다. 북구에서 내려오는 만족(蠻族)들이 먼저 기독교의 감화를 받은 후에 오늘의 구주 제국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북미에 가서 먼저 교회를 세우더니 그 후에 나라도 세웠습니다.” 한경직은 건국 정신에 기초가 되는 기독교 정신은 북미에 간 청교도 정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경직은 청교도 신앙의 특징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첫째, 신앙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았다. 둘째,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의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극히 엄수하였으니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레 중 하루를 하나님께 드려 이 날을 하나님의 날로 지켜 성전에 나아가 예배를 보고 예배를 본 후에는 전도와 위문에 힘썼으며, 경마나 연극 같은 오락을 금지하였고 또 노동하는 것을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자연히 질박 검소하였고, 근면 정직하였고, 충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타협이 없는 전전하고 깨끗한 생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생활이 그들의 윤리사상의 근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II. 한경직의 청교도적인 삶과 신앙

 

필자는 한경직의 삶과 사상이 청교도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청교도들이 특징으로 가진 앞서 언급한 10가지 특징을 자신의 목회와 삶과 설교를 통하여 실천했기 때문이다.

 

1. 하나님 중심의 신앙

 

한경직은 1954년 4월 20일 “청교도의 신앙”이라는 설교에서 청교도들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고 피력한다: "그들(청교도들)은 어떤 문제를 작정할 때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여서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고 이를 감행하여 인간의 권위에 대항한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염원은 하나님의 뜻이 가정에, 사회에, 국가와 정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경직은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폐허가 되고 비통과 낙심에 빠져 있는 민족에게 1954년 2월 14일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설교에서 소망의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을 역설한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그 성품, 하나님의 그 섭리, 하나님의 그 언약을 믿고 의지할 때에는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처하게 되든지 낙심할 수 없습니다. 왜? 모든 일이 합동해서 유익하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와 같이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는 자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겠다고 하는, 변치 아니하는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경직은 당시 국민소득 40달러의 가난 속에 있는 한국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우리 민족을 이와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키신다는 위로의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올시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이 이와 같은 도탄 가운데 빠져 있는데 이러한 상태로 영원히 그냥 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실 날이 반드시 속히 올 것입니다. 반드시 통일이 됩니다. 반드시 자유의 나라가 됩니다. 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 백성을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이 한경직의 설교는 지금 한국전쟁 후 근 반세기가 지난 후 국민소득 근 2만불(2007년 기준)에 도달하면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앞으로 남북통일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1954년 3월 28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제목의 설교에서 한경직은 8.15해방, 30선 월경, 6.25 사변, 1.4후퇴, 부산 대구 등으로 피난민 생활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에게 독일 나치즘이나 이태리의 파시즘의 예를 들면서 민족주의 보다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 것을 설교한다: “민족은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먼저 민족지상주의를 부르짖은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집니다. ..국가는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집니다. ..이 모든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먼저 구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할 것이 하나있는 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경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개인적 경건만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서 그 의대로 살뿐더러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 하나님 나라를 확보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도하여야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개인생활과 가정생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에서도 실행되기 위해 힘써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적 사명이 있는 줄 압니다.”

 

2. 성경 중심의 칭의 신앙

 

1) 성경중심의 삶

 

한경직은 청교도로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63년 12월 8일 “성경은 어떤 책인가?”라는 설교에서 그는 다음같이 성경이 신앙의 표준임을 설교한다: “성경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웃 사람이나 감정에 또는 행동에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언제나 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한경직은 1960년 12월 11일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 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같이 설교한다: “성경을 모르고 예수를 믿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열심이 좋지마는 지식없는 열심은 오히려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첫째, 그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본다. 그는 “성경은 어떤 책인가”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도, 이성도, 어떤 감정도, 신앙의 표준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한 표준입니다.” 둘째, 그는 성경을 사회도덕의 기본으로 본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했습니다. 노예제도는 없어졌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 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의 삶

 

1947년 4월 20일 “청교도의 신앙” 제목의 설교에서 한경직은 청도교의 신학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음으로, 인간이 자력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었읍니다”고 피력한다.

 

1960년 10월 30일 종교개혁주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한경직은 다음같이 설교한다: “구원의 표준을 어디다 두느냐? 우리 신교들은 성경에 가르친 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신앙과 하나님의 은혜에 둡니다.” 그는 여기서 의인(義認, justification)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올바른 신앙노선” 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여기 ‘복음주의 신앙’이란 함은 우리 신교의 중심사상인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 때의 표어인 이신득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오직 성서를 중심한 신앙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그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3. 복음주의 신앙

 

한경직은 “올바른 신앙노선‘ 으로 네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복음주의 신앙, 둘째, 청교도적인 생활, 셋째, 에큐메니칼 정신, 넷째, 올바른 사회봉사와 사회참여이다. 여기서 복음주의 신앙이란 “성경 말씀 그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임을 믿고 오직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음을 확신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요, 그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한경직은 1947년 4월 20일 “청교도의 신앙”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자신의 프린스턴 유학시절을 회상하면서 다음같이 신신학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내가 프린스톤에 있을 때 신신학을 가르치는 모 신학교에서 온 어떤 신학생에게 왜 프린스턴으로 왔느냐고 물었더니 ‘거기 있으니까 목사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게 되므로 아주 없어지기 전에 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 되려고 신학교에 간 학생에게 목사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곧 신신학의 영향입니다.”

 

주선애는 한경직의 신앙이 중도파 복음주의인 것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러한 중도파 신앙노선은 우리 장로회신학대학이 지향하는 바이며 오늘도 복음적이면서 열린 시각으로 민족과 세계 선교에 힘쓰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한경직은 따라서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했다. 한경직은 비록 김재준과 송창근 등이 프린스턴신학교 동창이자 한목사의 절친한 친구였고 개인적 친분을 유지했으나 신학적으로는 결별했다. 주선애는 다음같이 증언해주고 있다: “한 목사님은 자유신학과 끝내 결별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잠시 조선신학교에서 교수하신 일은 있으나, 당시 일제의 설교금지로 신의주 제이교회에서까지 퇴임을 당하고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던 그에게 김재준 목사로부터의 초청이 있었습니다만, 그의 교수초청은 한사코 수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목사는 김재준 목사와 가까운 사이면서도 이때부터 신신학과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950년대 초 김재준 목사와 교회탈퇴와 더불어 한경직은 그를 공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이만열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는 1950년대에 세 번에 걸친 큰 분열이 일어났을 때, 한 목사는 거기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가까운 친구 김재준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매우 곤란한 입장에 있었지만.”

 

아시아 복음화를 위하여 한철하와 같이 1973년에 세운 교육기관이 바로 아시아연합신학대(ACTS)이다. 초대 이사장으로 한경직은 그의 절친한 친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도움을 받았다. 빌리 그래함은 당시 아직도 ACTS가 교사(校舍)도 교수진도 없을 때 도서기금 10만불을 모금해 주었다. 한경직의 신학노선은 예장 통합 교단의 로선처럼, “신학은 보수로, 교회연합은 에큐메니칼”이었다.

 

그의 복음주의는 신(新)신학적 복음주의가 아니며, 사회복음주의가 아니다. 그의 복음주의는 성경중심, 그리스도중심, 십자가중심으로 구제와 사회봉사를 실천하며,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폭넓은 복음주의요 균형잡힌 복음주의였다.

4. 경건과 명상과 회개의 신앙

 

한경직은 1924년 숭실대 3학년 재학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블레어(邦緯良, W. N. Blair) 선교사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에 머물게 되었다. 한경직은 해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산책하면서 명상에 잠긴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라. 이 민족을 위하여 일하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1992년 독일 베를린 사우스 필 하우스에서 있었던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텔플턴상(Templeton Prize for Progress in Religion)을 수상하면서 한경직은 학생시절 받았던 소명(Calling)에 관하여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평소와 같이 해변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너무도 갑자기 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저는 주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 왔을 때 저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엎드려서 더 많은 기도를 드리고, 오랜시간 동안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는 일제하 신의주 제2교회 목회시절 신사참배에 굴종하지 않는 죄로 1942년 교회 사임(辭任)을 강요받아 목회권을 빼앗긴 후에 보린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면서 보다 깊은 기도의 시간에 들어가게 된다. 한경직은 해방되기 까지 4년동안 “명상과 기도로 보다 큰 청사진을 그리는 퇴수의 기간“을 가졌다. 그는 고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되 분뇨(糞尿)지게를 지고 청빈, 땀 흘림, 이웃 섬김, 기도와 찬송의 나날을 보내었다”

 

한경직은 회개의 영성을 강조하였다. 삶 자체가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노력을 너머서 회개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회개와 새로운 날”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란 우리의 소유욕과 권력욕에 맞춘 삶을 그리스도를 향하여 맞추는 방향 조정을 하는 것이라 피력한다.

 

5. 청빈의 영성

 

한경직은 청빈의 삶을 강조하였다. 1960년 12월 4일 “하나님 뜻에 맞는 교회” 제목의 설교에서 한경직은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총결산해야함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것을 잠간 맡아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관리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 있든지 내 뜻대로 쓰면 아니 됩니다. 좋은 청지기는 언제든지 주인의 뜻대로 그 물건을 처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받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쓰야 되고 이 다음에 하나님께 가서 총결산할 때 심판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한경직은 한국이 겪은 한국전쟁의 상흔(傷痕) 속에서 반공주의자로서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은 기독교 청빈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946년 베다니 교회(영락교회 전신)에서 행한 “기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같이 공산주의를 계시록의 붉은 용이라 지칭했다: “공산주의야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을 벨 자가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계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가 누구입니까? ” 한경직은 월남 이후 남한 사회의 최대의 죄악인 거짓말, 도둑질, 테러는 공산주의라는 반도덕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기독교의 청빈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을 성실하게 실천했다면 공산주의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946년 3월 18일 “상부상조의 정신”이라는 제목의 설교 말미를 다음같이 맺는다: “이 시대에서 어떻든 피차에 도와서 살아간다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즐거워 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하고 슬픈 자와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상이 강제적인 어떤 사상보다 낫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십시다.”

 

한경직은 청빈을 실천하였다: 그는 평생 자신의 사례비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살았다. 그에게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가지 모든 것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서 돌아왔다. 그는 어떤 선물 받기를 거절했다. 부득히 받은 결혼주례 선물 등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수많은 강연회 설교 때 결코 강연료 등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적인 면에서 사람들은 한경직을 “돈을 모르고 산 목사“라고 말한다.

 

영락교회 원로장로이며 초창기부터 교회를 봉사한 연세대 명예교수인 오기형은 그의 청빈한 삶을 다음같이 증거한다; “제가 목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겨울에 입으셨던 두루마기를 17년 동안 입으신 것까지는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모임이 있어서 식사하실 때의 메뉴는 식생활에서의 검소하시고 청렴하심의 모범사례입니다. 지금 영락교회의 점심식사시간의 메뉴는 그 모범사례를 따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목사님께서 계시던 사택은 그 자리에 기념관을 신축하면서 철거해서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남한산성에 사시는 17평자리 주택은 지금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주의 생활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몸소 수범하시는 것의 사례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즉 ‘청교도적인 정신에서 근엄하고 청순한 생활을 하기로 한다’라는 신앙지도원리를 말씀과 생활과 기도로 모범을 보이시는 것의 사례입니다.”

 

그의 청빈한 삶은 그가 영락교회를 은퇴하신 후 교회 안에 있는 그의 기념관이 너무 호화롭다고 하시며 거처를 아예 남한산성으로 옮기신 데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셨다. “나이 많아지면 그저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돕는 거지요. 나이 많아지면 더 많아지는 게 서너가지가 있는데, 명예욕과 고집(옹고집), 그리고 욕심” 이라고 하였다. 그는 통장 안 갖기, 집 안 갖기, 한 여자만 섬기기를 약속하고 지켰다.

 

영락고교 교장인 장로 김접섭도 다음같이 그의 청빈에 관하여 증언한다: “한 목사는 평생 저금통장이나 가옥, 재산을 갖지 않고 살았다. ..외국여행에서 쓰다 남은 돈은 교회에 반납하였고 교회에서 드리는 사례금도 필요한 만큼만 쓰셨다. 은퇴 후에는 따로 마련한 사택에 입주하기를 사절하고 남한산성의 허름한 국민주택의 좁은 방에 기거하면서 초라한 거실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영락신학교 교장 김신옥이 남한산성에 안주하신 한경직 목사에게 회고록을 쓰시도록 권유했던 적이 있었다. 한 목사는 “나를 자랑하는 결과를 가져올까봐, 나를 일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까봐 쓰지 않겠노라,” “다른 이들이 너무 잘 써주고 있지 않나”고 웃으시던 모습을 그녀는 회상하고 있다.

 

김신옥은 다음 에피소드를 전한다. 미국에서 한경직이 유학할 때 별명이 “아이! 추워”였다고 한다. 아마 유학생활 중 추위와 싸우며, 무의식적으로 잠꼬대하는 소리를 듣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래서 영락여자 신학교 학생들도 추운 방에서 생활하니 전교생 모두 다 그런 별명이 불을까봐 새 기숙사 건립에 이사장으로 혼신을 쏟으셨다고 한다.,

 

6. 전도와 선교의 신앙

 

이광순은 한경직의 선교관은 개인구원에서 민족 복음화및 세계선교를 아우르는 외연(外延)과 그에 따른 전도와 교육, 봉사를 아우르는 통전적 선교관이었다고 한다. 한경직은 1946년 이후에는 개인영혼구원에 관하여, 1950년대의 설교에는 이것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는 1945년 12월에 월남한 실향민 27명을 모아 설립된 영락교회 창립 1주년 기념설교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교회를 통해서 개인의 구원과 중생이 있다. 구원받고 중생한 개인을 통해서 사회적인 구원과 변혁을 이루는 것이다.”

 

1960년대 설교에서도 여전히 강조되었지만 비중은 점차 민족 구원을 위한 민족 복음화에 더 주어졌다. 1961년 이후의 설교에서 여전히 개인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가 중요한 것으로 설교되었고, 1965년부터는 민족 구원과 민족 복음화가 강조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는 북한선교에 대한 설교들이 나왔으며, 북한동포가 민족구원과 민족 복음화 대상에 포함됨으로써, 민족 복음화의 외연이 한층 넓어졌다. 1960년대 후반의 설교에서는 인류구원과 세계선교가 강조되었고, 1970년의 설교에서는 세계복음화가 민족 복음화와 더불어 선교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임걸은 “한경직의 설교론”에서 다음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경직의 설교는 실존적이며, 구원론적이다. 실존적이란 설교를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며, 구원론적이란 청중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임걸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한경직이 반드시 설교시 새신자를 언급하고 그들을 위한 말씀을 준비하는 설교를 필자는 ‘선교적 설교’라고 규정짓고 싶고, 이 한경직의 ‘설교적 설교’가 바로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다고 확신한다.”

 

한경직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복음전도였고 진보적인 산업전도나 선교와는 달랐다. 그는 이것과 거리를 두었다. 한경직은 산업전도에 관하여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공장 노동자들 곧 하나님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복음전파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야할 선교가 방향이 변하여 좀 불만이 있으면 동맹도 하고 파업을 하라고 선동하는 극단적인 노동운동이 되고 말았어요. .. 그래서 실업계에서는 산업전도하면 질색이야요. 동맹파업이나 일으킨다고. 이렇게 되어 당국으로부터 영락교회는 오해를 받게 되었고, 자연 우리 산업전도는 제동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한경직은 1952년 부산에서 피얼스(Peirce) 목사와 연합하여 전쟁 중 전도대집회를 열었고, 서울에서는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초청하여 전도집회를 열었다. 1956년 서울운동장에서 다시 빌리 그래함을 초청하여 8만명의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리고 1973년에는 한경직은 빌리 그래함을 다시 초청하여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대집회를 열고 마지막날에는 115만명이 참석하는 성공적인 집회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은 한경직을 자신의 전도집회에 초청하여 홍콩, 대만, 미국의 달라스 등지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한경직은 1974년에 열린 엑스플로74 대전도집회, 1980년에 80 세계복음화 대회에 빌 브라이트(Bill Bright), 김준곤 목사와 함께 주강사로 설교하였다.

 

한경직은 사회봉사(보린원, 모자원, 양로원, 선명회, 북한돕기 운동)나 정치활동(해방직후 북한에서 사회민주당운동, 반공활동, 유신체제에 대한 협력 등)까지도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하였다. 이러한 전도와 선교의 삶에서 그의 청교도적인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일변도의 선교는 군사정권의 야수성과 유신(維新)시책에 대한 침묵 내지 묵인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군사정권 시절 사회정의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한 천주교가 오히려 민중을 위하여 힘써온 종교라는 인식을 젊은이들 가운데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정치적 영합의 태도는 1970-80년대 교회성장을 가져왔으나 1990년대에 이르러는 개신교 신자가 줄어들고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역현상을 초래하였다. 의식있는 지성인들의 눈에는 개신교는 사회정의에 대한 의식이 없고 피안적인 구원과 종교적인 자기만족만 추구하는 종교로 비치게 된 것이다. 보수적이고 전도열정을 지닌 개신교가 사회윤리와 도덕에는 둔감한 교회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스스로 반성해 볼 여지가 있다.

 

7. 구제와 나눔의 영성

 

한경직은 성화(聖化)의 도상에 있는 기독교인이 구체적으로 해야할 일로 전도와 교육과 더불어 당시 한국교회가 소홀히 했던 구제와 나눔을 강조했다.

 

한경직은 일제하 처음으로 목회한 신의주 제2교회에서도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로 목회권을 박탈당했다. 1938년 어느날 한경직은 기차길 옆 좁은 골목 안에 초라한 오막살이에 폐병환자 아버지, 그리고 엄마는 어린 동생을 업고 가출한 채 여덞살 짜리 한쪽 발만 가진 장애소녀 복순이를 발견하였다. 그는 물었다. ”복순아, 우리가 쌀하고 나무를 대주면 네가 밥을 지어 아버지를 도와 드릴 수 있냐?“ 교회는 복순이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보린원이 출발하였다. 그는 보린원(保隣院) 원장으로 고아를 돌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한경직은 서울로 피난와서 1945년 12월 서울 중구 저동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천리교 경성(京城)분소를 접수하여 베다니교회를 시작하였다. 한경직은 베다니교회에서 수십개의 천막을 치고 밀려오는 피난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1947년 후암동에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버리고 간 가마꾸라 보육원을 접수하여 영락교회는 보린원, 모자원. 경로원 운영 등의 구제와 나눔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에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이 많아 사회적으로 절대적으로 빈곤의 시기에 구제와 나눔의 일을 교회가 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인 목사 로버트 윌라드 피얼스(Robert Willard Pierce, 1914-1978)와 함께 한경직은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미국 손을 놓고 눈물만 흘리고 낙담해 있는 교역자들 4백명을 모아 첫 위로집회를 하였다. 한경직은 북한 출신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사업으로 전쟁 후 처음으로 “다비다 모자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경직은 피얼스와 옥호열(Harold Voekel) 선교사와 협력하여 세계 선명회(World vision)를 한국에 도입하여 한국선교회를 통해서 구제사업을 국제화 시켰다. 당시 그는 피얼스 목사를 연민의 정을 지닌 사람“(the man of broken heart)이라고 했는데 한경직 그 자신에게도 적절한 말일 것이다.

 

1969년 6월 19일 서울 후암동에 있는 영락보린원 새 건물 기공식에서 한경직은 다음같이 설교하였다: “하나님 앞에 참된 경건한 사람은 고아와 과부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생활을 하고 과와 과부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50년 역사를 가진 우리 보린원은 작년까지 813명을 배출했습니다. 그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각기 자기 기능을 발휘하여 유능한 인재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능공을 비롯해 의학박사도 있고, 교사,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 국내에서는 불론 멀리 미국 구라파에까지 진출하여 사회에 봉사하고 있는 그들은 현재 어린 시절에 못다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한경직은 구제와 나눔을 복음전도의 양면으로 보았다. 1964년 4월 19일 “예수와 굶주린 대중” 제목의 설교에서 전도가 굶주린 자들에게 영적 생명의 양식을 주는 일이라면, 나눔과 봉사는 육신적 양식에 주린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피력한다: ”우리 한국에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거리에 굶주려서 쓰러진 동포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한 동포가 된 우리로서 더욱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의 지위에 있는 한국의 교회가 이 광경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간다고 하면 이것은 인도를 무시하는 것이고, 이웃됨을 무시하는 것이고, 정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한경직은 마태복음 25장 “내 형제 중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일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이고 주님을 대접하는 일”로 보았다.

 

그의 나눔 신앙은 굶주리고 있는 북한동포를 위한 1994년부터 쌀 나누기 운동으로 나타났다. 1994년부터 북한 돕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1996년부터는 고향인 평원에 국수공장을 세워 매일 1만명에게, 1997년부터는 개천, 안주, 선천, 원산, 신창까지 여러 곳에 6만명 어린이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고 있다.

 

그리고 나눔 신앙은 세습반대로 나타났다. 영락교회에는 미국에서 미국인 상대로 목회하는 그의 아들 목사, 한기원을 후임으로 데려오자는 운동이 있었다. 이에 한경직은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영락교회에 올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구제와 나눔의 영성에서 우리는 청교도정신에 충실한 그의 영성을 발견한다.

 

8. 헌신과 성결의 신앙

 

주선애는 한경직의 가정과 교육배경을 말하면서 그의 헌신된 신앙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의 아버지는 위대한 기독교 교육학자이면서 애국자인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이 계시는 오산학교로 아들을 보내기로 하고 학비를 장만하느라 하나밖에 없는 소를 팔았다고 합니다(마펫 강연). 그래서 한 목사님은 그 훌륭한 선생님들을 통하여 그의 검소한 생활과, 나라를 사랑하되 독립을 위해서 폭력을 쓰지 말 것, 나라 발전을 위해 서양의 과학을 배울 것, 또 하나는 철저한 기독교인이 될 것 등 이러한 것들이 그 예민한 사춘기 시절부터 그의 인격 속에 침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경직은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참된 헌신의 생활”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그는 다음같이 설교한다: “예배는 무엇인가? 우리 생활 전체를 하나님께 받쳐서 우리 생활이 성결되고 깨끗이 되고 사적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 자체가 곧 예배입니다. .. 우리 믿는 사람이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예배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성결의 삶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는 “예수를 바라보자”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결의 방법을 피력한다: “봄 동산의 풀이 어떻게 자라랍니까?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랍니다. 어떻게 꽃이 아름답게 핍니까? 햇빛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아름다워 집니다. 어떻게 과실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햋빛을 보는 가운데서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심령이 장성합니다. 우리 심령에 꽃이 핍니다. 우리 심령에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한경직은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전체를 혼자는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 모든 신조나 신학이나 교파의 전통보다도 그리스도가 더 크다는 사실 앞에서 일치를 이루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온유, 인내 그리고 관용과 겸허를 강조하였다.

 

김정섭은 한경직의 겸손한 삶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한목사의 겸손은 겸손하겠다 라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몸에 베어 있는 자기를 비운 상태에서의 겸손이다. 꾸미는 겸손이 아니라 인격에서 자연스레 흘러 나오는 겸손이다. 한 목사는 그의 생전에 동상을 세우거나 자기에 대한 전기 등이 출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977년 12권으로 완간된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에 소개된 611편의 설교를 분석한 이대성의 연구에 의하면 한경직의 설교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어는 “신앙”과 “성결한 생활”이다. 이 두 주제어는 각기 전체 설교의 27%를 차지한다, 이신득의 신앙으로 믿음의 결단과 함께 삶의 거룩한 변화를 추구해온 것이 한경직의 목회요 설교의 영성이었음을 확인해준다.

 

원로 개혁신학자 한철하는 한경직의 온전함의 성품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마지막으로 ‘완전함(perfection)은 목사님을 접한 모든 분이 받은 감화라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이 완전함을 그의 생활로 우리에게 보이신 분입니다. 목사님께서 한번은 ’한 박사! 일이 전체가 아닙니다!“라고 한마디 하여주신 것은 ‘일’에만 열심하는 저에게 바른 신앙을 알려주시려는 한마디었다고 생각됩니다.”

 

9. 순례자의 신앙

 

한경직은 진정한 기독자의 삶은 순례자의 삶인 것을 강조한다. 1947년 4월 20일 “순례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신자들은 나그네이며,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나그네의 삶이며,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는 순례자란 천국을 향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목적없이 헤매는 유랑자나 방랑자와는 다르다고 한다. 한경직은 순례자의 삶을 살았던 자들로서 청교도들의 예를 들고 있다: “17세기에 있어서 영국교회가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자유를 구속하는 영국 국교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던 청교도들은 핍박을 피하여 먼저 화란으로 향하였고, 후에 1620년 104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북미주의 플리마우스(Plymouth)에 도착하여 순례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며..“ 한경직은 이러한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의 후예들은 오늘날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을 역설한다;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도 받은 바 고통이 심했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날 큰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순례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우리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있으며, 아름다운 내 본향이 있습니다.“

 

1962년 1월 21일 “순례자의 행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한경직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우리 하나 하나는 영적 순례자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반드시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죄악으로 충만한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하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힘을 얻어서 과연 이 순례의 길을 떠나셨습니까? 과연, 언제든지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 시온의 대로를 날마다 걸어갑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옛날의 순례자들과 같이 축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 시온을 향하는 길은 평탄한 길만은 아닙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습니다... 천성을 향하는 영적 순례자의 행로에는 때때로 눈물골짜기가 있읍니다 그러나 어떠한 골짜기를 지나갈 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시온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자들에게는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생명의 샘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순례자의 신앙은 바로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이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영국 국교의 신앙적 혼합이나 타협에 영합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 나라의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천상을 향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 영국이 당시 너무나도 청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신대륙으로 순례자의 삶을 떠난 것이다.

 

한경직은 본인 스스로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피하여 남한으로 내려와 베다니 전도교회를 세우는 등 순례자의 삶을 살았고, 남한에서 천성을 향하는 순례자의 신앙으로 근검절약, 청빈의 삶을 살았다. 한경직은 “순례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다음같이 맺고 있다: “‘자금 이후로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旅路)에 피곤한 영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례자가 된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장망성을 떠나 순례자의 길에 오르게 하여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한경직은 1962년 1월 21일 행한 “순례자의 행로”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도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 시온성이라는 순례자의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신자들이 "축복의 순례자"가 되어야 할 것을 역설한다: “이렇게 눈물 골짜기를 통하여 새 힘을 얻고 얻어서 계속하여 나아가면 마지막에는 시온에 이르게 됩니다. ..아! 축복의 순례자는 마침내 평생에 사모하던 목적지인 시온성에 이를 것입니다...영광의 빛나는 시온에 이르러서 주님의 얼굴을 친히 뵈올 때까지 우리는 순례자의 길을 멈추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축복의 순례자가 되십시다.”

10. 열린 보수의 신앙

 

순레자의 삶은 천국을 향하여 매일 전진하는 기독도(基督徒)와 같은 목적있는 삶이기 때문에 주어진 교리와 교조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얽매일 뿐이다. 이러한 순례자의 삶은 한경직으로 하여금 당시 좌경적 요소가 있었던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제를 나누는 열린 보수의 신앙을 가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중도적 복음주의신앙으로 특징지워진다.

 

장로회신학교 교수 주선애는 한경직의 열린 보수에 관하여 다음같이 중도파 신앙이라고 특징지우고 있다: “그는 전통대로 연합정신을 살려 나가는 것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올바른 신앙노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에큐메니칼한 ‘열린 보수’를 지향하면서 그 이념을 실재로 연합운동에 적용하여 한국교회사상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필자 개인도 이때 극히 혼란스러워 하던 때였습니다. 박형룡 박사님의 추천으로 신학교에 돌아와서 가르치도록 약속하고 미국 유학하도록 선교부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1958년에 귀국하였는데, 보수파 신앙을 간직하고자 하는 본인은 북장로교 선교부와 박형룡 박사님 중에서 어느 편을 따라야 할지 어느 한편도 배반할 수 없는 갈등 가운데서 한 목사님의 신앙을 따라 열린 보수로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종성도 한경직을 “근본주의자 아니라 에큐메니칼주의자”로, 또한 보수주의자이나 “막힌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특징지우고 있다.

 

이만열은 한경직의 열린 보수주의가 온건한 복음주의노선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한 목사님이 젊은 시절 민족과 사회를 강하게 의식하는 일종의 진보적 사상에서 출발하여 한국교회와의 접맥을 통하여 보수로 옮겨오면서, 한국교회의 ‘닫힌 보수주의’와의 관계에서는 ’열린 보수‘를 분명히 함으로 온건한 중도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맺음말

 

원로 개혁신학자 이종성은 이러한 한경직의 청교도적인 영성에 대하여 다음같이 포괄적으로 언급한다: “모든 목회자들에게 인격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큰 스승으로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겸손함, 인자함, 건설적 사고방식, 협조심, 평화주의, 애국심, 세계적 시야를 가진 설교자, 이웃 사랑, 근검절약 등은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풍성이다.”

 

한경직에게 청교도 신앙은 하나의 사상체계요 동시에 삶의 원리였다. 첫째, 그것은 사도적이고 종교개혁 전통을 통하여 계승된 바른 기독교 신앙사상이다. 이것은 신(新)신학 사조(modernism)에 대항하는 사상이다. 이 신(新)신학사조란 자연주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합리주의, 인본주의다. 그리고 극우사조로서 극단한 문자주의, 극단한 감정에 흘러 광신과 미신에 빠지는 신앙 등이다. 이것들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무력화 하고 있다. 청교도사상은 이러한 신신학과 극우 사상에 대하여 기독교의 바른 신앙사상을 지킨다.

 

둘째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삶의 태도이다. 오늘날 세속주의는 “술도 먹고 담배도 태우고, 극장에도 가고 이혼도 하고 주일날에 오락도 하고, 자유연애도 하는 등 오락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고 예수도 믿어 구원얻으려고 한다. 청교도적 신앙태도는 이러한 세속영합적 신앙에 대항하게 한다.

 

한경직의 청교도 영성은 그 사상과 신앙적 태도에 있어서 오늘날 기독교신자들이 가져야할 바른 신앙 사상과 삶의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신앙, 복음주의적 신앙, 성경중심의 의인신앙, 청빈의 삶, 경건, 명상과 기도의 삶, 전도와 선교의 신앙, 구제와 나눔의 신앙, 헌신과 성결의 삶, 열린 보수의 신앙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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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ald C. Brauer, "Types of Puritan Piety," Church History, vol. 56, No.1 (March 1987).

 

김선도, 김수진, 『아름다운 빈 손 한경직』, 홍성사, 2000.

김점섭, “한경직 목사와 영락 ” in: 한경직 목사의 신앙적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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