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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박윤선의 신약성서 해석에 대한 재조명 - 성찬해석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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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의 신약성서 해석에 대한 재조명

-‘성찬’ 해석을 중심으로 -

류호성

 

I. 서론

 

개신교에서 실행하고 있는 종교적 제의는 ‘세례’와 ‘성찬’으로, 예수께서 제정하신 것에 근거를 둔다. ‘세례’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마 28:19) 말씀에, ‘성찬’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 눅 22:19)는 말씀에 그 토대를 둔다. 그러나 종교사적인 측면에서 ‘세례’보다는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세례자’라 불리는 요한이 먼저 시행하였고, 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막 1:9-11). 말하자면 ‘세례’는 요한의 고유한 창작품이다. 이것을 기독교가 세례 요한 이후에 바로 차용해서 기독교화 한 것이다. 그러나 오직 ‘성찬’은 예수께서 제정한 고유한 종교적 제의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성찬을 통해서 자신의 다시 오심과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고전 11:26). 그러기에 성찬에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성찬’에 참여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예배의 현실에서 ‘성찬’을 일반 예배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특별한 하나의 종교적 행사라 여긴다. 그래서 성찬을 일 년에 고작 몇 번 실행한다. 이런 결과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박윤선 박사(-이하 박윤선)의 저서에서 찾아보자.

 

박윤선은 한국 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분이다. 그는 40여년을 걸쳐 신구약 주석서를 저술하였으며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는 교회 현장에서 많은 설교를 하였다. 그가 남긴 대단히 많은 신학적 유산은, 그의 개인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가 살아온 한국 교회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에서 ‘성찬’과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동안 한국 교회가 성찬에 대해 어떤 이해와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박윤선의 신약 주석(눅 22:17-20; 요 6:52-59; 고전 11:23-26), 설교집 그리고 그가 쓴 교리서들을 중심으로 ‘성찬’의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 성찬이 자주 실행되지 않은 원인을 찾아볼 것이다.

 

II. 박윤선의 저술에 나타난 ‘성찬’ 이해

 

1. 주석서

A. 공관복음서

 

박윤선은 1953년에 공관복음 주석을 저술하였고, 1964년에 개정판을 출판하였다. 그는『공관복음서 (하)』(1994년, 개정판 23쇄) 제 6 부 “고난편”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심(마 26:17-29; 막 14:12-25; 눅 22:7-23)’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성찬’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고난편”을 “주석함에 있어서 화란(和蘭)의 변증 신학자 스킬더(Schilder) 박사가 저술한,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재판받으시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리스도’라는 세 책[을] 많이 참고하고 또 인용”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인용한 자료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아, 어디에서 어떤 자료를 인용하였는지 독자들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는 ‘각 단락의 개괄적인 설명 - 본문 해석 - 특주’의 구조로 “고난편”을 주석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관복음서 중 누가복음서의 본문(22:17-20)을 근거로 ‘성찬’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가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잡수신 일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속죄 제물로 죽으심이 되는 사실을 보이심이다. 그것은, 구약의 유월절을 신약의 성찬으로 교체시킴인데 그의 임의(任意)대로 변역(變易)하심이 아니고 구약의 율법에 대한 그의 순종으로서의 성취이다.”

 

2.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자기를 기념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자의 일을 하신 사실을 기념하라는 뜻이다.

 

3. 22:17 “잔을 받으사 사례 하시고”에 대한 주석: “예수님께서 잔을 받으시고 사례하신 까닭은, ① 그 잔에 있는 포도즙이 하나님의 선물인 까닭이고, ② 그것이 예언적으로 표시하는 영원한 천국의 복된 연회인 사실을 생각하신 까닭이다.

 

4. 22:18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대한 주석: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여기 ‘임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엘데(e;lqh|)니 완전히 와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천국이 그 계시와 성취와 영광과 축복에 있어서 완전해졌고 충만해진 뜻을 가진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이곳의 헬라어 본문은 e[wj ou- h` basilei,a tou/ qeou/ e;lqh|”이다. 문장의 종류는 가정문이다. 접속사 e[wj”는 부정 과거를 뜻하는 가정법 동사 “엘데(e;lqh|)”와 사용되어 ...까지”를 의미한다. 그가 말한 “완전히 와 있음을 가리킨다”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이미 와 있음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가 현재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더 완전해지고 충만해 질 것이라는 의미인가? 아마도 그는 세 번째 것을 의도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어서 “천국이 그 계시와 성취와 영광과 축복에 있어서 완전해졌고 충만해진 뜻을 가진다고” 덧붙여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천국은 예수의 십자가로 약속의 성취를 이루었으며,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광과 축복이 완전해졌고 충만해졌다.

 

5. 22:18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다”에 대한 주석: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이때에 두 가지 사실을 내어다 보신 것이 분명하다. 첫째는, 그가 미구에 세상을 떠나실 일이고, 그 둘째는 그가 하늘에 계시다가 재림하시어 신천신지(新天新地)에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실 일이다. 그는 이렇게 그의 죽으심을 앞에 놓고 그것의 건너편을 아실뿐 아니라, 그 건너편의 건너편까지 확실히 바라보신 것이다.”

 

6. 22:19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에 대한 주석: “그 유월절 떡은, 단순한 비유로만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떡의 의미를 참되이 알고 받는 자마다 영적(靈的)으로 예수님의 몸을 받는 일에 참예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이것은 ... 내 몸이라”고 하셨다.”

 

7. 22:19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에 대한 주석: “이것은, 그가 제자들더러 성찬식을 거행하여 그의 속죄적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켜 그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사실을 기억한 것처럼,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찬을 거행하여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구원된 사실을 기억한다. 이 기억 행위는 단순한 형식적 행위가 아니고 신앙적 행위니 만큼, 그 식(式)에 참예하는 신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더욱 밀접히 연합하여 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8.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세 언약”에 대한 주석: “여기 ‘언약’(계약)이란 말은 중대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관계에 있어서 계약으로 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계약을 맺으심에 있어서 사람 편의 대표자(그리스도)를 계약주(契約主)로 정하시고 그를 책임 있는 대상으로 여기신 것이다. 여기 “새 언약”이란 말은, 옛 언약 곧, 행위 계약(인간이 의를 행해야 복된 생명을 얻게 되는 계약이니 아담에 대하여 맺었던 것)과 다르게 은혜의 원리로 이루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신자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와 구원의 관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새 언약’의 대립으로 ‘행위 언약’을 언급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가 ‘행위 언약’을 “인간이 의를 행해야 복된 생명을 얻게 되는 계약이니 아담에 대하여 맺었던 것”으로 설명한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성경신학』“계약론”에서 계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언급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앞의 견해와 유사하다.

 

신학상으로 계약은 두 가지로 분별되는데, 그 하나는 행위를 조건으로 한 계약이요, 또 하나는 은혜로 구원하시리라는 계약이다. 앞의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상대하시고 정하셨던 것인데, 아담이 그대로 행치 못한 고로 벌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 벌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다시 세우신 것이 은혜 계약이고, 그것이 다시 두 종류로 나누인다. ① 이 계약의 약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예약적으로 설정하신 계약.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그의 후손 중에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과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으로 약속 받음)과 시내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그리스도의 피로 그 백성을 대속할 것을 예표하는 것 - 출 24장)이다. 이것이 구약이다. ② 계약의 약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세우신 계약.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찬 때에 말씀하신 것으로 잘 밝혀졌다(눅 22:20).”

 

박윤선은 계약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아담과 맺은 ‘행위 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 계약’이다. 이 은혜 계약은 다시 둘로 구분되어 하나는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과 맺은 ‘구 계약’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맺은 ‘신 계약’이다. 그가 ‘구 계약’을 ‘신 계약’과 동일시하여 ‘은혜의 계약’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마도 구약과 신약을 동일하게 보려는 그의 성경관에서 기인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계약 사상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로 보면, 구약과 신약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신약은 구약의 성취인 것만큼 그 신관(神觀)과 기타 사상이 본질적으로 구약과 같을 것은 물론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앞과 동일한 맥락에서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으로 구원 받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학설이다”라고 부연 설명한다. 그가 구약과 신약의 동등한 가치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서 성찬에서 ‘새 언약’을 말하면서, 이에 대한 대립으로 아담의 ‘행위 계약’을 말한 것은 좀 동떨어진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예수의 성찬은 구약의 유월절 예식의 대체물이라고 이해한다. 성찬이 유월절의 대체물이면, 유월절과 연관된 계약을 예수 자신이 대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탕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한 다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출 19-24장). 이것이 ‘시내산 계약’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에 새로운 계약이 요청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 잘 나타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1-33). 예수께서 성찬식에서 언급한 ‘새 언약’은 바로 예레미야가 언급한 ‘새 언약’일 것이다. 그 ‘새 언약’은 유대 백성이 출애굽해서 맺은 ‘시내산 계약’을 대체할 것이다. 박윤선이 ‘새 언약’의 대립으로 아담의 ‘행위 계약’을 말한 것은 상당히 동떨어진 것 같다. 칼빈도 여기서 ‘새 계약’의 간접적 대립이 통상적으로 말한 구약의 율법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칼빈의 입장에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해설한 하지(Hodge)도 “성만찬은 유대인들의 유월절에서 생겼다“고 말한다.

 

둘째, 그가 ‘행위 언약’의 계약주로 ‘아담’을, ‘은혜 언약’의 계약주로 ‘그리스도’를 대립시킨 것은, 아마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립으로 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확대해석 한 것 같다. 바울은 로마서 5:12-19에서 한 사람, 곧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반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은 죄의 기원과 관련된 것이지, 이것이 계약과 관계해서 말한 것은 아니다.

 

셋째,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듯이 죽으리라”고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은 ‘계약’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명령’이다. 구약성경에서 계약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 ‘tyrIB.’가 처음 나타난 곳은, 창세기 9:13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고, 그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둔다고 말하였다.

 

9. 박윤선은 누가복음서를 근거로 ‘성찬’을 설명하면서, 그 다음에 “특주 눅 22장 해석”을 덧붙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눅 22:19에 있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이 마태의 기록과 마가의 기록에는 없다. 이것을 이유로 율리케르(J?licher)와 스피타(Spitta)는 말하였으되, ‘마태와 마가는 이 성찬을 영구히 시행해야 할 제도로 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학설이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그들의 침묵뿐이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묵과한 것을 누가의 기록이 밝힌 것이다.”

 

그는 누가복음서 22:19에 있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의 문장에 중요성을 둔 듯하다. 가톨릭의 일곱 개의 제의와 달리, 개신교는 오직 두 개의 제의, 곧 ‘세례와 성찬’ 만을 예수께서 지정하신 것으로 믿고, 현재 이를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 스스로 제정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 고전 11:24-25). 마태와 마가에는 성찬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만, 예수의 제정에 관한 말씀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박윤선은 이를 묵과하지 않고 언급한 누가복음서에 더 중요성을 둔듯하다.

 

10. 또한 그가 ‘성찬’의 본문으로 누가복음을 선호한 다른 이유는, 누가복음서의 보도가 더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자신이 선호하는 신학자 고데(Godet)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 한다. 고데에 따르면 “누가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 그대로 기록하였고,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그 유월절 잔치에 친히 참예하였던 제자들이 반역자 유다에게 대한 예수님의 적발 행위를 너무 인상 깊이 기억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첫 머리에 생각한 것이다.” 박윤선은 고데의 입장에 따라 누가복음서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순서대로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관복음서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달리 보도한다. 이 문제를 박윤선은 신앙의 문제로 해결한다. 그는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신 성경 기자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하셨기 때문에 도무지 그릇됨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현대 성서비평학은 공관복음서가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에도 관심을 두지만, 박윤선은 이의 어느 방법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료 비평이니, Q 자료니, 양식비평이니 하는 것들을 그는 배격한다. 그러나 현대 비평방법을 극단적으로 배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1. 이로써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박윤선의 성찬 이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 식사를 대체 한 것이다. 유월절의 떡은 예수의 몸을,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 둘째, 예수의 죽음은 ‘속죄적’ 의미가 있다. 곧,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찬을 거행하여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구원된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셋째, 예수의 죽음에는 이미 재림이 포함되어있다. 넷째, 예수의 죽음으로 맺어진 ‘새 계약’은 ‘은혜의 원리’를 따른 것으로 ‘영원불변’하다. 이것은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과 대립되는 것이다. 다섯째, 공관복음서 중 누가복음의 성찬 보도가 더 역사적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누가는 예수께서 성찬에 대한 제정의 말씀을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B. 요한복음서

 

박윤선은 1958년에 요한복음을 주석하였고, 1970년에 개정판을 냈다. 그는 ‘성경말씀- 내용분해 - 강해 - 해석 - 설교의 구조’를 사용하여 주석하였다. 요한복음에서 ‘성찬’의 의미가 나타나는 곳은 요한복음서 6:52-59이다. 이 부분의 주요 논쟁점은 이 자료가 원래 요한 저자의 것으로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첨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뜨겁다. 그러나 박윤선은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성경관에 입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그가 주석한 내용을 살펴보자.

 

1. 박윤선은 6:53에 강조점을 두어 설명한다.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창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레 1:5; 히 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는 예수의 ‘살과 피’는 예수의 인간성 전체로 이해하였고, 예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은 문자적 의미가 아닌, 비유적 의미로 예수의 삶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 박윤선은 53절에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의 교리가 헬라의 신비 종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불트만을 비판한다. 박윤선은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성찬식은 유대적 배경에 토대를 둔 것으로, 유월절 잔치를 대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요한복음 사상의 전체 배경에 대해서는 “유대의 계시 문학 사상, 영지주의 사상, 헬라식 유대 문헌의 영향 그리고 플라톤의 사상”과는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대적 배경’에는 ‘유대의 계시 문학 사상’이 포함된다.

 

3. 박윤선은 54절을 해석하면서 ‘먹는다’는 헬라어 단어 trw,gwn’과 evsqi,w’의 차이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trw,gwn) 이때까지 사용된 먹는다는 (evsqi,w)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요한 저자가 단락에서 evsqi,w 대신에 trw,gwn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성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박윤선은 주석을 하면서 단어의 섬세한 차이에도 관심을 두는 상세함도 보여준다.

 

4. 57절을 해석하면서 그는 예수는 ‘중보자’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설명한다.

 

5. 요한복음서에서 박윤선이 주장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찬의 의미에는 속죄의 의미가 들어 있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은 비유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성찬식은 헬라의 신비주의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 예식인 유월절 식사의 대체이다. 이것은 앞선 공관복음의 설명 내용과 동일하다. 셋째, 요한 기자가 ‘먹는다’는 의미로 헬라어 evsqi,w’를 사용하지 않고 trw,gwn’를 것은 성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성찬에는 중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C. 고린도전서

 

박윤선은 1962년에 고린도전?후서를 주석하였다. 그는 여기서 ‘강해 - 해석 - 설교’의 구조를 사용하였다. 고린도전서에서 성찬에 대한 언급은 11:23-26에 나타난다.

 

1. 11:23의 “주께 받은 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그가 주님의 성찬과 교훈을 간접적으로 다른 사도들을 경유하여서 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직접 주에게서 받은 것을 의미한다(Hodge). 이것은 물론 그가 계시에 의하여 성찬에 대한 주의 교훈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 행 18:9, 22:18, 23:11, 27:23-25; 갈 1:12, 2:2; 고후 12:7을 보면, 바울은 계시에 의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은 적이 많다.”

 

그는 핫지(Hodge)의 견해를 따르면서, 문자적 의미 그대로 환상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성찬에 대한 자료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 받은 것”이 핫지의 견해대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받은 전승의 배후에는 다메섹에서 나타났던 주님이 계시다는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 24-26절에서 그는 성찬의 의미에 대한 여러 학설을 소개한다.

첫째는 달만(Dalman)의 견해이다. 그는 “‘내 몸’이란 말이 본래 아람 말이었다면, 그것이 ‘나 자신’이란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성찬 거행에 따라서 자신이 임석(臨席)하실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성찬의 속죄적 의미를 약화하는 해석이라고 말하였다.

 

둘째는 “성찬이 유월절만 관계한 것이고, 예수님은 유월절 양만 비유하였다”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예수님은 그 만찬 석상에서 양을 지적하여 말씀하신 일이 없다. 성찬은 유월절에 관계된 것이지만 동시에 구약의 모든 희생 속죄(예컨대 특히 시내산에서 드린 속죄제)를 자기의 속죄로 성취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의미에서 이 성찬은 구원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잡수실 때에(이렇게 성찬 예식을 세우실 때에) 자기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그 예식으로 실행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을 박윤선은 그릇된 학설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사죄, 축복, 평안, 희락, 구원을 이제부터 그의 백성에게 주신다는 것뿐이고,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모형적 실행이 아니다. 즉 성찬은 죽으심의 실행이 아니라 죽으신 결과로 그의 백성이 받을 축복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떡을 떼심은, 그의 몸이 상처를 입는 광경을 표시함이 아니고 그 상하신 몸의 영적 혜택을 그 백성에게 나누어 주심이다.”

 

3. 박윤선은 화체설과 공재설의 이론을 배격하고, 성찬의 참된 해석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성찬의 효과에 대해서 언급한다.

 

“상징(象徵)과 물질(物質)과의 연결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요소로 화한다는 화체설(化體設)이나 공재설(共在設)은 그릇된 학설이다. ‘이것은 내 몸이라’는 말씀은 비유뿐이다. 그것은 마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어투와 같은 표현이다. 성찬에 대한 참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찬은 주님 자신이 죽으시는 광경을 보여 주는 것이라기보다 그 속죄의 죽음의 결과를 나누어 주는 일이다. (2) 성찬의 효과는 그 사용되는 물질의 사정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곧 물질이 변하여 살이 되거나, 혹은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리스도와 관계되는 데서 성찬의 효과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의 효과는 오직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말씀에 달려있다. 약속하신 이도 그리스도요 축복하실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3) 성찬이 주는 효과는 다만 복음을 듣는 것만큼의 효과를 가진다. 그것의 권위는, 산상보훈이나 기타 복음전도의 권위와 같은 것이다.”

 

4.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울은 직접 예수의 계시로 성찬에 대한 말씀을 받았다. 둘째, 성찬식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들 중에 속죄적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 예수를 유월절 양에만 연관 시키는 것, 성찬을 십자가 죽음의 모형적 실행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들이다. 셋째, 성찬은 유월절과 관련성이 있지만, 동시에 구약의 모든 희생 속죄, 특히 시내산에서 드린 속죄제를 성취하신 것으로 구원사적 의미가 있다. 넷째, 화체설이나 공재설은 문제가 있는 학설이다. 다섯째, 성찬의 효과는 오직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말씀에 달려있으며, 그 효과는 복음을 듣는 것과 동일하다.

 

2. 설교집

 

박윤선은 세 권의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그 중『주님을 따르자』에서 ‘성찬’과 관련하여 두 편의 설교 본문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앞서 ‘성찬’과 관련된 주석서에서 본문을 해설하고 나서, 이어서 그 본문과 관련된 설교 내용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가 출판한 교리서에도 설교 본문을 제시하였다. 여기서는 이 모든 것을 ‘설교’의 범주에 포함해 살펴볼 것이다.

 

A. 설교집: 『주님을 따르라』

 

성찬에 대하여(요 6:53-55)

 

1. 세례와 성찬은 예수가 명하신 예식이다. 세례는 예수의 피로 죄를 씻는 표니 죄를 원통히 여기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다. 성찬은 예수의 살과 피의 효과를 받는다는 표시이니 영생의 생명력을 원하는 자가 받는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2. 첫째는 예수의 죽으심의 효과를 먹는 것 같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음식을 먹는 자는 안심하고 그것을 먹는다. 그와 같이 우리는 예수의 속죄 구원을 안심하고 믿어야 된다. 음식을 먹는 자가 현미경으로 검사하고 먹는 것이 아니라 거저 안심하고 먹는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사죄 받는 줄 믿고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

 

3. 둘째는 예수의 죽으심의 효과를 통하여 그와 연합함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에 그것을 우리 속에 깊이 섭취하여 그것을 우리 몸과 연합하려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와 깊이 연합하여 하나 되려는 뜨거운 욕구가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신자와 연합하시기 위하여 그의 살을 찢으셨고 피를 흘리셨다. 이 연합을 위하여 그는 죽으셨다. 이것은 과거사이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일면 그 과거사를 기념(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우리로서 갑자기 이상한 일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를 보시며 조만간 그의 능력으로 그와 우리와의 연합을 더욱 견고케 하신다. 성찬에 있어서 예수의 살과 피는 실제로 떡과 포도주로 대표되었으니, 거기에 예수의 살과 피의 공로가 현림해 있다.

 

4. 박윤선은 음식을 먹는 자가 안심하고 먹듯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예수의 속죄의 의미를 안심하게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음식의 섭취를 통해 영양분을 얻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데에 힘써 더욱 믿음을 살찌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자(마 26:26-28)

 

1.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립된 종교이다. 구약시대에 무수히 흘려진 제물(양)의 피는 모두 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가져온 효과는 어떠한 것인가?

 

2. 첫째, 그리스도의 피는 사죄의 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주셨으니 이제 나는 그를 믿을 때에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 그의 피의 공효(功效)는 무한하시다. 그의 피는, 그의 능력보다 더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그의 능력보다 더 유력하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피를 가장 중요하게 믿을 줄 모르는 신앙은 아직 어린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피 대신에 그의 능력이나 지혜나 덕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직 신앙이 아니다. 예수의 피 대신에 성령을 믿는다고 하는 것도 참 신앙이 아니다. 소위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피를 믿는 자들만이 죄 사함을 받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

 

3. 둘째, 그리스도의 피는 언약의 피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언약은 아담 때부터 하셨는데 이미 이루셨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사실을 보고 우리는 사중신앙(四重信仰)을 가지게 된다. 첫째는, 그 언약이 기록된 성경을 믿으며, 둘째는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며, 셋째는 그 언약의 성취로 나타난 사건을 믿으며, 넷째는 그 사건이 약속하는 장래의 축복을 믿게 된다.

 

4. 결론적으로 박윤선은 그리스도의 피를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피로, 이것을 믿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피는 언약의 피로, 이 언약을 통해 우리는 4중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 4중의 신앙은, 언약이 기록된 성경과, 언약을 주신 하나님, 언약의 성취로 나타난 사건, 끝으로 그 사건이 약속하는 장래의 축복이다.

 

B. 『신약 주석: 요한복음 (상)』

 

③ 예수님의 살을 먹음과 그의 피를 마심의 의의(5:52-59)

 

1. 예수는 자기의 대속적 희생을 앞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말씀으로 길게 설교하셨다. 그리고 그는, 영생하도록 있는 그 양식은 그의 살과 피라는 뜻으로 결론을 맺으신다(53-58). 그러면 그의 살을 먹음과 그의 피를 마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첫째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살을 찢고 피를 흘려주신 그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냉정한 이지적 승인이 아니고, 예수의 사랑을 느끼며 깨닫는 행위이다. 이 사랑은 영적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랑을 영적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먼 거리의 장벽을 극복하고 달나라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이 제조되었는데, 하나님의 능력과 영으로 안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3. 둘째, 먹고 마시듯이 마음에 깊이 믿음을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를 그의 심령 속에 깊이 믿어야 된다. 믿음은 우리의 입에 바를 것도 아니고, 우리의 얼굴에 붙일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부적 신앙이 중요하다. 로마서 10:10에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하였는데, 여기 ‘마음’은 심장을 의미한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가장 깊이 믿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이야말로 생명 있는 믿음이다.

 

4. 박윤선은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영적인 사건이며, 또한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C. 『성경주석: 고린도전서』

 

④ 성찬의 의의(意義)(고전 11:23-34)

 

1. 사도가 전해 준 성찬이므로 우리는 이를 행하여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사도를 통하여 주셨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2. 첫째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먹는 듯이 믿는다 함은, 신앙을 어떤 추상적인 이상으로 가지지 않고 실제적으로 ‘나’에게 소용되는 식음의 행위같이 믿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2) 주님의 속죄를 음식 먹듯이 믿는다 함은, 그 속죄 신앙이 어디까지든지 우리 영혼의 깊은 데로 향하여 뿌리를 박아야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내향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먹는 듯이 믿음은, 그것을 먹을 때에 심령의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 공효로 믿으면 영적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는다.

 

3. 둘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먹고 마시듯이 믿을 수 있는 원인(原因)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구원 운동의 기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셨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 언약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참된 일과 도덕의 근본은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선 특별히 그의 백성에게 옛 언약, 곧, 구약을 주셨고 또한 구약의 성취로 새 언약을 주셨다. 구약은 신약으로 존속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우리는 예수의 속죄의 죽음을 받아서 죄 사함 받는 효용을 누린다. 하나님은 진리의 최고봉인데, 우리가 그에게서 세워진 언약을 의지할 수 없다면, 무엇을 의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언약을 못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할 자이다.

 

4. 박윤선은 ‘성찬의 떡을 먹는’ 실제 행위에 초점을 두어 성찬의 의미를 설교하였다. 그는 성찬의 식음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추상적이 아닌 실제적이 되며, 영혼의 깊은 데로 향하는 내향성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영적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는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의 죽음은 구원 운동의 기본이며, 이를 통해 맺은 ‘새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옛 언약, 곧 구약 언약의 성취라고 말한다.

 

D.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정치?예배 모범』

 

⑤ 성찬의 의미(고전 11:23-27)

 

1. 24절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한 말씀은 예수가 우리 신자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뜻이다. 25절의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란 말씀이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방법으로 세우신 제도를 가리킨다. 사죄의 이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니, 그만큼 참된 것은 다시없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다(히 9:22).

 

2. 예수는 우리로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성찬의 의미에 대하여 본문에서 세 가지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성찬 거행은 예수의 명령이다. 둘째, 성찬은 예수의 사랑을 기념하는 행위이다. 셋째,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행사이다.

 

3. 여기서 박윤선은 마태복음 26:28을 인용하면서 성찬식에 ‘죄 사함’이 있음을 말한다. 그가 인용한 마태복음 26:28에서 ‘죄 사함’이라는 어구는 마태의 특수 구절이다. 그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성찬에 죄 사함의 권능이 있음을 설교 하였다.

 

3. 교리서

 

A.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주석 : 정치?예배 모범』

 

박윤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주석 : 정치?예배 모범』(서울: 영음사, 1983)은 장로교단 뿐만 아니라 타교단에도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그는 제 9장에서 “성찬예식에 대하여”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한국 교회의 헌법에 관한 책이기에, 이곳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 개신교의 ‘성찬 이해’에 관해 현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개신교의 예배에서 성찬식이 자주 거행되지 못했던 그 원인을 우리는 그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찬 거행의 회수와 주의사항. 성찬 예식이 일 년 동안에 몇 차례 거행되어야 하는지 이에 대하여 일정한 규례는 없다. 다만 이 일이 신중하게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만은 교회가 언제나 명심해야 된다. 부주의와 망령된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성찬식이 자주 실시될 경우,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신자들이 그것을 심상히 여길 우려가 있다. 성찬식은 언제나 많은 준비 기도가 있은 후에 경건되이 실행되어야 하므로 너무 자주 실행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들이 성찬의 진리를 잘 알아야 되며, 또한 교회에 욕을 돌리는 자들은(회개치 않는 한) 근신하고 참여하지 않아야 된다(고전 11:27-32).

 

성찬에 참여할 준비. 세례교인은 마땅히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마음 준비를 해야 된다. 그것은 성찬의 의미를 재확인함과 자신을 살펴 주님 앞에 회개하며 준비함이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고전 11:29). 이처럼 중요한 일을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예식을 소홀히 하면 그것은 망령된 죄를 범함이다. 거룩한 것을 소홀히 대함은, ‘장자의 기업’, 곧 하나님의 것이 되는 영적 자격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에서의 심리와 다를 바 없다.”

 

1. 박윤선은 성찬식이 교회에서 자주 실행되는 것이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그 자들이, 그것을 소홀히 여겨 성찬의 참된 의미를 파괴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마음의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주석 : 정치?예배 모범』의 책을 쓰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많이 참조하였고, 또한 그 내용을 한국 현실에 충실히 적용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떡과 포도즙 분배의 영적 권위’를 설명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원본에는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제도와 명령과 모본을 따라서 실시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역 예배 모범에는 이 문구가 빠졌으니 유감이다. 이 문구는 성찬의 권위를 말해주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성찬을 자주 실시하는 것을 금하는 것과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배 일주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다”는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충고들은 사실상 한국적 문화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박윤선이 성찬을 한국 현실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2. 기독교가 전래될 19세기 말 전후 당시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교 문화에서 제일 중요시 덕목은 ‘효’(孝)이고, 효의 실천 덕목 중 하나가 조상에 대한 제사였다. 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속담에 “제삿날 맏며느리 앓아눕는다”는 말이 있다. 비록 이것이 “가장 중요한 때에 일을 주관하여 처리하여야 할 주요한 사람이 탈이 나서 눕게 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지만, 제사를 준비하는 자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비록 기독교가 조상의 제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였지만, 조상 제의와 거기에 포함된 생활 습관들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박윤선이 성찬 참가자들에게 일주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은, 조상의 제의를 지내는 한국인들의 심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찬식을 자주 실행하지 못하도록 권고한 것은 다섯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째는 신학적인 면이다.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제사의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유교문화에서 죽은 자를 기리는 기일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1년에 한 차례 뿐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현실에서도 수난절 기간에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다. 기독교가 제사를 척결하려고 노력하는 마당에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였다면, 기독교 반대론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론자들의 눈에는 성찬이 제사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셋째는 윤리적인 측면이다. 기독교가 금주금연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당시 기독교가 펼치고 있는 사회 운동에 역효과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넷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포도주를 구하는 것이 힘들었기에 성찬식을 자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이 성찬을 (중요하게 여겼든 아니면 소홀히 여겼든) 자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박윤선은 성찬식을 일반 예배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일반 예배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면 성찬식을 자주 실행하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이점은 그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사상과 달리하는 또 다른 측면이다. 물론『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 성찬식을 일 년에 몇 번 실행하여야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없다. 그러나 그곳에는 ‘성찬식’을 자주 시행할 것을 권고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세례+성찬)을 적절히 집행하고 합당하게 받는 것 등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상적인 예배에 속하는 것들이다(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 고 말한다. 여기서 일상적인 예배에 속하는 성례전은 세례가 아닌 성찬일 것이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독교 신자들은 평생에 단 한 번만의 세례를 받기에, 일상적인 예배에서 세례를 자주 시행할 수는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례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성찬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은 자주 있는 것이 합당함으로 주의 성찬은 자주 시행하도록 되어 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적으로 기념하며 증거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또한 언약의 영속성에 대해서 우리의 믿음이 확증되는 일도 자주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의 성찬은 유월절 양의 경우와 같이 자주 반복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은 자주 실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언약 백성임을 자주 확증할 수 있고, 이것은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4. 국 교계 자타가 공인하듯 박윤선은 칼빈주의 사상을 지닌 자이다. 이것은 그의 저술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신구약 주석서를 ‘칼빈주의 원리’에 기준하여 주석하였다고 머리말에 밝히고 있고, 한국 교회의 신학사상이 칼빈주의 토대 위에 있지 않아 문제가 있음을 말하였다. “우리 한국 초창기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우리는 많은 복음적 성쇠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성경 해석을 칼빈주의적으로 밝히 드러내는데 빈약(貧弱)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칼빈주의적 요소도 지니고 있었으나 오히려 복음주의적 경향으로 많이 흘렀고 적지 않은 약점들도 전승되어 내려왔다.” 그는 칼빈 사상 위에 한국 교회를 세우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찬식’의 시행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과 동떨어진 생각을 갖고 있다. 칼빈은 성찬 예식에 폐단이 있다고 일 년에 한 차례씩 성찬을 시행하도록 하는 관례는, 마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오히려 그는 성찬을 “매우 자주 - 최소한 일주일에 한 차례” 실행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그는 이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찬은 일 년에 한 번 시행하도록 제정된 것이 아니고, 지금 통례가 그런 것처럼 형식적으로 시행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오히려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시행하도록 그렇게 제정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주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을 유지하고 강건케 하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그의 선하심을 선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며, 마지막으로, 성찬을 통하여 신자들 상호 간의 사랑을 증진시키고, 신자들 가운데서 이러한 사랑을 증거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 속에서 그 연합의 끈인 사랑을 분별하도록 하신 것이다. 주님의 몸의 상징에 참여할 때마다, 사랑의 증표를 주고받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모든 사랑의 의무에 우리 자신을 얽어맴으로써,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우리 형제를 해롭게 하는 일을 행하거나, 형제를 도울 필요가 있고 또한 그런 일을 행할 능력이 있는 데도 그런 일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처럼 성찬식이 자주 시행되도록 제정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을 강건케 하며 신자들 상호 간의 사랑을 증진시킨다고 말한다. 이런 칼빈의 성찬식 이해는 성찬식을 개인의 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또한 성찬식이 오용될 것을 염려하여, 되도록 적게 성찬식을 실행하라는 박윤선 권고와는 반대 방향에 서 있다.

 

5. 박윤선이 ‘헌법 주석’에서 말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찬은 경건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일주일 전부터 기도로 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면 믿음이 굳세지 못한 자들이 성찬의 의미를 훼손할 우려가 있기에, 너무 자주 실행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셋째, 성찬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은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것과 같은 태도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B. 『개혁주의 교리학』

 

1. 박윤선은 위 책 “제 6편 교회론, 제 5장 ‘은혜의 방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범주에서 ‘세례’와 ‘성찬’을 언급하였다. 그는 은혜의 방편으로 성찬을 이해한다. “성찬에 관한 예수의 말씀들에 대한 해석들”에서는 성찬 이해의 이론들인, 1)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 2) 예수의 인성이 그 신성과 연합되었으나 신성의 무소부재 속성에 따라 인성도 편재(偏在)하게 된다는 원리를 주장하는 ‘공재설’, 3)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로서 다만 그의 신성이 그 행상에 임하시는 것뿐이고, 그의 몸이 실제로 거기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기념설’, 마지막으로 4) 성찬을 시행할 때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능력적으로 임재 하는데, 이는 마치 태양이 하늘에 있으면서도 그의 빛과 열이 땅에 임함과 같다는 ‘신비설’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성찬 거행의 의의”에서는 칼빈주의의 입장에 따라 “성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가 영적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

 

2. 그는 성찬의 여러 이론들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화체설과 공재설을 배격한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III. 평가 및 결론

 

1) 평가

1. 박윤선은 공관복음서의 ‘성찬’ 부분을 주석하면서 화란의 신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칼빈주의 입장에 주석서를 썼지만, 정작 성찬 실행의 문제에서는 칼빈과 다른 견해를 취한다. 칼빈은 성찬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실행하라고 하였으나, 박윤선은 자주 실행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이 한국 교회에서 ‘성찬’을 자주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신학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2. ‘성찬’은 헬라의 신비주의적 영향이 아닌, 구약 유월절을 대체한 ‘새 언약’이라고 박윤선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새 언약’을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곧 ‘시내산 언약’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아담과 맺은 옛 언약 곧, ‘행위 계약’을 대체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죄의 기원에 대해서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말한 것을, 박윤선이 확대 해석한 것이다.

 

3. ‘성찬’은 상징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여기에는 속죄적, 구속적, 그리고 중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① 죄로 더불어 싸우는 데 힘을 얻고, ② 환란 중에 든든히 서게 되고, ③ 책임 이행에 새 힘을 얻고, ④ 사랑과 열심을 가지게 되며, ⑤ 신앙과 거룩한 결심이 증가 되고, ⑥ 양심과 평안과 영생의 소망으로 안위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성찬의 효과를 주로 개인의 신앙적인 측면에 파악하였다. 그러나 성찬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기독교 공동체를 서로 결속시키는 아주 좋은 예식이다. 또한 성찬은 구체적 봉사의 차원과 생태학적 차원 등 다차원적인 의미가 있다.

 

4. 박윤선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누가복음의 말씀에 강조점을 두어, 누가의 보도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순서대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각 복음서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성경 기자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하셨기 때문에 도무지 그릇됨이 없었다”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의 복음서가 예수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전기가 아닌, 신앙의 문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문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현대의 비평 방법론을 극단적으로 거부할 필요는 없다.

 

5. 박윤선은 ‘성찬’을 주제로 설교할 때에는 ‘먹고 마시는 구체적 행위’에 의미를 두며, 신앙을 추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강조는 성찬의 신학적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2) 결론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내?외적으로 많은 시련 속에 처해 있다. 외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2007년 선교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였던 청년들이 피랍되고 2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국민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반기독교 정서가 더욱 확산되었다. 여기에 2008년 SBS 방송국은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더욱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외적 위기는 내적 위기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내적 위기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부조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금권과 명예로 얽히고설킨 비리들이 교회의 강대상을 점령하였다. 여기에 공동체적 의식보다는 내 교회, 내 교단만이라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이런 교회의 내적 위기는 한국 교회가 물질적 축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하는 성찬을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성찬은 박윤선의 말처럼 ‘행동 형태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는 다차원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다시 오심을 기억한다. 또한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서로가 주님의 자녀라는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킨다. 이러기에 성찬은 우리를 한층 더 격조 높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좋은 안내자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성찬을 옥합에 숨겨 놓아, 1년에 몇 차례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옥합을 깨뜨릴 때가 되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부음으로 칭찬받은 여인처럼, 성찬을 둘러쌓고 있는 옥합을 깨뜨리자. 그래서 예수의 ‘몸과 피’로 제정한 성찬을 더 자주 실행하여, 그 깊고 깊은 의미를 만끽하자.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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