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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박윤선의 개혁주의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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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의 개혁주의적 종말론

이신열 (고신대학교)

 

 

I. 들어가는 말

 

20세기 한국 개혁신학의 거장인 박윤선 (1905-1988)의 종말론에 대한 연구는 다른 주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의 연구되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성경신학자이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을 것이다. 성경신학자로서 그가 집필한 성경 주석의 분량 또한 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많은 어려움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의 신구약주석은 각각 4,255, 7,347 페이지로 도합 11,602 페이지에 달한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작업을 평가하는 대부분의 글들은 그의 성경신학에 대한 분석과 그가 성경신학자로서 한국 교회와 그 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고찰하는데 집중되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그의 종말론은 여전히 우리 신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박윤선의 종말론 이해를 위해서는 그의 주석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선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 66권에 대한 주석을 완성하였던 박윤선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종말론에 대한 연구는 그의 성경주석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소천한 후에 편집 출판된 유고작 <개혁주의 교리학>은 그의 종말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원론적인 의미에서 교의학자는 아니었지만 고려신학교에서 실제로 이를 상당기간 교수하여야 했다. 성경신학자로서 그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교의학에 상당한 학문적 정열과 시간을 투자하였음이 사실이었고 이로 인해 그의 교의학이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로 탄생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 논문은 그의 종말론을 고찰함에 있어서 성경주석을 중심으로 삼지만 교의학적 차원을 놓치지 않고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그의 종말론을 하나의 특정한 주제 (예, 천년왕국)나 특정한 성경주석 (예, 요한계시록)에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박윤선의 교의학적 특징은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와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를 위시한 화란개혁주의 신학자들 뿐 아니라 칼 바르트 (Karl Barth)를 포함한 에밀 부루너 (Emil Brunner), 헨드리쿠스 벌코프 (Hendrikus Berkhof)등의 현대 신학자들을 연구하고 이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성경주석들은 개혁신학의 입장에 충실한 것으로 이러한 그의 교의학적 관심을 본격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고찰을 위해서 본 논문은 박윤선의 유작 <개혁주의 교리학>에서 제시된 주제들을 일반적으로 수용하되 그의 주석에 드러난 강조점을 최대한 반영하고자 한다. 이는 그가 교의학적 관심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래적으로 성경의 원문에 충실한 성경신학자이었음이 분명하게 강조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II. 박윤선 종말론의 구조와 개혁주의적 특징

 

<개혁주의 교리학>에 드러난 박윤선의 종말론은 개혁주의적 전통에 기본적으로 충실한 종말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설정한 종말론의 구조에 잘 드러나 있는데 특히 그는 이를 개인적 종말론 (individual eschatology)과 일반적 종말론 (general eschatology)로 나누는 루이스 벌코프 (Louis Berkhof)의 구조를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벌코프가 개인적 종말론에서 ‘육체적 죽음’, ‘영혼의 불멸’, 그리고 ‘중간 상태’를 차례대로 다루고 있지만 박윤선은 이러한 기본적 구조에 ‘별세한 영혼에 대한 난제 해설’과 ‘하늘과 이 세상’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첨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첫 번째 주제인데 그는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현대 신학자들이 부인하고 있는 성경의 몇 가지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하고자 하였다.

첫째, 별세하여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존재 형태에 관한 것이다. 그는 화란의 신학자인 헨드리쿠스 벌코프가 주장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께로 가지 아니한다는 사고를 배격한다. 그는 벌코프의 이러한 사고가 "시간, 공간의 세계와 영원 사이의 전적 타자 (totaliter aliter) 관계를 주장하는 실존주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박윤선은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현존하며 하나님이 계신 영원한 세계로 돌아간다는 성경의 주장을 옹호한다 (전 12:7; 마 17:3, 10:28; 눅 16:22; 고후 5:8; 계 6:9-10, 20:4). 종말론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죽음 이후에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죽음 이후에 영혼이 일종의 중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둘째, 별세한 영혼은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활동할 수 없다는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박윤선은 사무엘상 28:8-19에 나타난 신접한 여인이 이미 사망한 사무엘의 영혼을 땅에서 불러 올려서 사울에게 나타나도록 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한 결정적 이유는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접신술자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은 당시의 접신술의 진행과정을 그대로 옮겨 진술해 놓았을 뿐이므로 여기에 등장한 노인은 실제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로 가장한 허구의 인물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을 포함한 신학자들은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사무엘이 실제로 나타났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박윤선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바빙크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두 가지 예증들을 통해서 박윤선은 죽은 자의 영혼의 거취 문제에 있어서 현대신학의 잘못된 해석을 배격함과 동시에 죽은 자의 영혼이 세상에 되돌아와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측면에 있어서는 바빙크의 견해를 따르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가 특히 사무엘상 28:8-19의 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차원에서 성경비평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III. 죽음과 사후의 문제

 

1) 죽음의 성격

개인적 종말론의 한 요소로서 죽음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인죄론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진다. 루이스 벌코프는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논하면서 인간은 죄의 형벌로서 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 그리고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바빙크는 죄와 죽음 사이의 상관관계를 단순한 인과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누구든지 죄를 짓는 순간에 영적 죽음이 함께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윤선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두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죽음의 성격을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죄에 대한 결과 또는 형벌로서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박윤선은 인간의 죽음이 그의 구조의 자연적 또는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박윤선은 창세기 2:16-17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담과만 맺으신 행위계약으로서 이는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삼아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불순종하였을 때 그에게 회개하면 용서하시겠다는 자비의 말씀을 주시지 않으신 이유도 행위계약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행위계약은 용서와 회개와 관계없으므로 아담에게 내리신 죽음의 벌은 그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죽음은 확실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마자 바로 죽음이 일어났음을 뜻한다 (창 2:16-17). 박윤선은 ‘정녕 죽으리라’라는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서 “육체적 죽음의 씨는 그들이 범죄한 그날 침입한 것”으로 파악하고 육체의 죽음이 연기되었다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또한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임한 죽음의 확실성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가 이 영적 죽음을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둘째 사망’ (the second death)과 관련해서 설명하지는 않지만 양자는 그 내용에 있어서 사실상 동일한 것임이 분명하다. 셋째, 죽음의 실제는 고통과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박윤선은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고통과 공포를 수반한다고 보았다. 자연은 순조롭고 조화로운 것으로 거기에는 고통과 공포가 내포되어 있지 않지만 죽음은 쏘는 것 (고전 15:55)처럼 놀라운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원수처럼 (고전 15:26) 여기게 된다. 이는 인간이 범죄할 때 양심이 당하는 고통으로서 찔림과 같은 고통 (딤전 6:10)에 해당된다.

그는 계속해서 실존주의적 해석에 근거하여 죽음의 성경적 의미를 부정하려는 바르트의 시도를 비판한다. 바르트는 “죽음은 인간의 본연이며, 창조질서에 속하도록 하나님이 규정하신 것인 만큼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끝나도록 되어있고 죽도록 되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이것이 창세기 2:17에 나타난 죽음이 인간의 죄의 결과라는 가르침을 ‘아주 위반하는 말’이라고 비판한다. 계속해서 그는 바르트가 둘째 사망, 즉 영적 죽음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죽음, 즉 육체적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선한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둘째 사망은 이와 대조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한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에 해당한다. 바르트가 죽음을 인간의 본연과 창조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므로 둘째 사망을 죄에 대한 형벌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요한계시록 20:14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운다는 구절을 불신자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 (Gerichtsakt)로 파악한다. 이는 둘째 사망을 영적 죽음과 동일시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이에 수반되는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으로서 파악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박윤선은 이를 비판하면서 둘째 사망은 인간의 몸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유로서 불못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음부는 최후의 심판 전에 멸망의 처소로서 별세한 영혼들이 가는 곳이지만 (눅 16:19이하) 지옥은 이와 달리 영혼과 몸이 함께 들어가는 곳이며 이곳은 불못과 동일한 곳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이란 최후의 심판을 통하여 정죄당한 불신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지게 될 형벌로서 이미 주어진 영적 죽음이 완성되어 그 고통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둘째 사망은 바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불신자들이 겪게 되는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최후의 심판을 통해 죽음이 완성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의식과 더불어 육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놓이게 되는 상태인 영적 죽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2) 사후의 문제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를 뜻한다. 이는 육체적 죽음 후에도 인간에게 삶이 지속됨을 가리킨다. 박윤선은 이 분리의 결과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체는 땅으로 돌아간다 (전 12:7)는 구절이 창세기 2:7과 연관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창세기 1:26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실을 인간의 영혼의 기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리고 2:7에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육체의 기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육체와 영혼은 죽음을 통하여 서로 분리되어 흙으로 지음 받았던 전자는 원래 출처인 땅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 지음을 받았던 영혼은 원래 출처인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창세기 3:19은 인간이 영혼 없이 흙으로만 지음 받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구절인데 박윤선은 이를 성경 기자가 단순히 사실의 한 방면만 표현하고 다른 방면은 표현하지 않은 예들 중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시 6:5; 30:9; 88:12; 115:17; 사 38:18). 이런 구절들은 사후에 사람이 영혼도 없고, 영적 생활도 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즉 사후에 삶이 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서 사후에 사람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후에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완전히 분리되어서 영혼이 몸과 별도로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욥 19:26; 시 17:15; 49:15; 73:24; 전 12:7). 이 구절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됨을 말함과 동시에 영혼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후의 인간 상태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그가 의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지하세계 (구약에 ‘쉬올’, 신약에 ‘하데스’로 표현된)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 지하세계는 죽음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운명을 공유하는 장소로서 이는 상이나 벌을 받는 장소는 아니다. 이곳은 인간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태에서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두려운 곳으로서 모든 정상적인 활동이 정지된 곳이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의욕과 기쁨은 모두 사라지고 슬픔만 남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 가르침은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사후 상태를 ‘쉬올’(sheol)과 ‘하데스’(hades)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루이스 벌코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다. 첫째, 쉬올과 하데스는 항상 장소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며 추상적인 의미에서 죽음의 일반적인 상태를 뜻한다. 이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죽음의 상태 또는 죽음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삼상 2:6; 욥 14:13, 14; 17:13,14; 시 89:48; 호 13:14; 행 2:27, 31). 둘째, 쉬올과 하데스가 문자적 의미에서 장소로 사용되었을 경우, 이는 지옥 또는 무덤을 뜻한다 (시 9:17; 49:14; 55:15; 잠 15:11; 15:24; 눅 16:23). 만약 쉬올이 중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구절들에 등장하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고(warning)와 위협(threatening)으로서의 죽음과 형벌이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쉬올을 결코 주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이 가게 되는 장소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사람이 살아온 생애를 사후에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시지만 이는 그의 생존이 지속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인간이 그 존재 목적에 도달하게 될 것이므로 인간이 사후에 계속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이해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 행위가 종말, 즉 사후를 넘어서는 계속적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무로 전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배제되는 무화(Vernichtigung)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오히려 “그저 한 때 존재하였던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릴 그 때 피조물의 종말 이후에도 그 분 앞에서 그리고 그 분에게 현재로서 존재할 것인데, 어떻게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변증법적 (dialectical) 차원이 드러난다. 인간이 계속 존재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더 이상 사라져 버렸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관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존재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영원히 계실 하나님의 선에 의한 인간의 영원한 보존 (ewige Erhaltung)에 대한 신비로 해석한다.

박윤선은 바르트의 영원한 보존에 관한 교리를 영원화(eternalization)으로 정의하면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것이, 그 죽은 사람의 완필된 생애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여 주신다는 말인지 알기 어렵다. 바르트는 인간이 죽은 뒤에 그 인간의 계속 (continuation)은 없다고 강력히 말하고 있으니, 그의 이른바 '영원화‘라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그 사람 (생애를 완필한 사람)의 천국 생활의 계속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르트에 대한 박윤선의 비판의 결론은 신자가 죽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생활을 계속한다는 교리 (요 17:3)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막연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르트가 변증법적으로 해석한 사후의 삶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계속 여부를 논한 것인데 여기에서 그의 관심은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보존 행위 그 자체에 놓여 있다고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바르트가 인간 존재의 계속이 무화를 배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 근거는 하나님의 보존이지만 그 보존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달성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후로 까지 이어지는 계속이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보존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소기의 목적 달성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논리적 자기당착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이는 바르트 자신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피조물의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창조주의 상황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상황이 성화되고 축복받고 약속으로 가득 차 있음을 뜻한다.” 박윤선은 이를 ‘막연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지만 이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바르트의 결론이 논리적으로 막다른 골목 (dead end)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중간상태

박윤선은 천주교의 연옥 교리를 자세하고 소개하고 이를 성경에 근거하여 비판한다.

그는 연옥설을 유출설에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중세에 단테가 이해한 계단식 유출설에 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연옥설은 그 기원이 비기독교적이므로 박윤선은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천주교가 성경적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들을 (사4:4; 미 7:8; 슥 9:11; 말 3:2; 마 5:22; 마 12:32; 고전 3;15; 고전 15:29) 언급하고 그 주장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그 반박의 주된 내용은 연옥이 불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천주교의 연옥설은 불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고통과 연관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박윤선은 불을 주로 상징적인 차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중대한 죄악을 범했던 죄인을 포함하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즉각적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성경적 진리를 올바르게 주장한다 (눅 23:43).

그리고 연옥에 대한 폴 틸리히 (Paul Tillich)의 두 가지 반론을 소개하는데 이는 연옥의 고통이 계속 될 것이라는 상상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성화가 고통만으로 불가능하며 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왜 순교자와 세례를 받고 즉시 죽은 자 외에는 신자라도 모두 연옥에 일단 들어가서 그 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 교리적 이유를 박윤선이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빙크는 연옥설을 비판하면서 이 가르침이 천주교의 은혜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천주교의 은혜는 흔히 초자연적 (bovennatuurlijke)이고 거룩하게 만드는 (heiligmakende) 은혜로 불리는데 이는 인간에게 주입된 은혜 (gratia infusia)이며 물화된 은혜로서 증감이 가능한 은혜에 해당된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이 은혜를 유지할 수도 또 상실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영혼들은 즉각 지옥으로, 율법과 교령을 모두 지켜서 완전함에 도달한 사람들만 즉각 천국으로 향하게 된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범한 사람들은 성찬과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자신이 범한 죄값에 해당되는 형벌은 마땅히 이 땅에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다 해결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일단 연옥에 가서 남은 죄값을 다 치러야만 완전에 도달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천주교의 주장이다. 성화가 인간 자신의 공로에 의해 가능하다는 천주교의 잘못된 사상이 빚어낸 구체적 결과물이 연옥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연옥설은 루이스 벌코프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다음의 4가지 잘못된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 자체로서 인간 구원에 부족하므로 무엇인가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사상, 둘째, 인간이 행하는 선한 일은 그 자체로서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공로로 인정된다는 사상, 셋째, 우리가 선한 일을 함에 있어서 천국에 가고도 남을 정도의 잉여공로를 쌓을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상과 넷째, 교회의 열쇠권이 법률적인 의미에 있어서 절대적이라는 사상이다.

IV. 그리스도의 재림

 

박윤선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바르트와 틸리히의 견해를 비판하는데 여기에서는 바르트의 견해에 집중하고자 한다. 박윤선은 바르트가 주장하는 자게 (Sage)의 개념에 근거하여 그의 재림관이 전통적 개혁교회의 종말관과 다르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자게와 신화(Mythus)를 구분한다. 자게는 ‘비역사적’ (unhistorische)이며 ‘전역사적’ (praehistorische)인데 여기에서 비역사성과 전역사성이란 자게가 시간에 제한되는 피조물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을 직접 대하고 접하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바르트는 이해한다. 자게는 신적인 영원과의 만남을 기술하는 것이므로 이는 피조물과 연관되는 시간 또는 역사 (Historie)로 표현될 수 없는 개념이다. 바르트는 이런 이유에서 자게를 전 역사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이며 시적인 묘사라고 보았다. 그러나 자게와는 대조적으로 바르트는 신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이를 완전히 거부한다. 신화의 “실제적 대상과 내용은 자연적이고 영적인 우주의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관련되지 아니하는 일반적 사실들과 관계들의 본질적인 원리이다.” 신화의 내용은 자게가 지닌 신적 진리에 대한 실재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궁극적 근거에 있어서 인간과 우주의 현실성과만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는 항상 일원론적이다. 이러한 구분에 근거하여 바르트는 창조기사 이해에 있어서 이를 신화로 받아들이기는 거부하는 한편 이를 자게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창조를 포함한 역사 (Historie)도 자게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창조기사 이해에 있어서 역사가 완전히 부인되거나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창조기사는 많은 자게와 전설과 일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근원에 있어서 역사가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시인하다: “또한 창조기사는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요소를 동반하는 많은 자게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놀라지 않아야 할 사실은 그 사건에 대한 서술의 더 많은 부분이 역사와 역사적 서술이 근본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가 이렇게 창조기사에 있어서 자게에 포함된 역사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과 관련된 영원의 실재를 역사와 연관시키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박윤선은 바르트 종말론에 대한 출발점을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윤선은 바르트의 종말론 진술이 자게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이에 근거하여 바르트가 재림과 관련된 성경적 진술들 (계1:7; 행 1:11; 고전 15:51; 살전 4:17; 벧후 3:10)을 역사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추정한다. 그는 이 추정의 근거로 바르트의 롬 13:11-12의 주석을 예증으로 들고 있다: “신약이 말하는 종말의 시간은 시간 세계의 사건이 아니며 역사적인 땅 위의 사건도 아니고 우주적인 변동도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시간관에 있어서 과거 1900여 년이라는 시간거리라는 것은 원근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어서 아브라함이 종말을 내다보고 기뻐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성경신학자인 박윤선이 이러한 구절들을 언급하면서 바르트가 자게의 개념을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이 구절들에 나타난 사건들이 역사적(historische)이지 않다는 점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먼저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이런 구절들을 실제로 어떻게 이해했는가? 박윤선이 언급하는 것과 같이 전통적 재림관과 다른 견해를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가? 바르트는 재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고전 15:51과 살전 4:13-17의 해석에 있어서 실제로 이러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르트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게 될 실체일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밝힌 후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오심은 시간의 종말과 함께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오심은 시간의 종말과 이미 죽음으로 예정된 자들의 부활과 함께 시간적 존재의 종결 (Abschluss)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르트가 주장하는 종결이 제공하는 것은 죽는다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시간적 존재의 종결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이를 고전 15:51과 살전 4:13-17의 해석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한다. 바르트는 이 두 구절에 나타난 잠자는 상태에 관하여 이를 전통적 해석을 따라 자연적 죽음으로 해석하지 않고 두 번째 죽음과 자연적 죽음에서 해방된 상태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이는 바르트가 인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재림의 해석에 있어서 그 사실적 차원보다는 오히려 이를 시간의 종결과 관련하여 자게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재림이 사실상 그의 ‘제 3차 오심’ (dritte Parusie)에 해당된다는 박윤선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오신 것은 그의 초림으로서 이는 역사 (Historie)에 해당되지만 그의 재림은 역사의 범주를 벗어나는 영원한 것에 속하는 것이며 비역사적이며 전역사적인 사건에 해당된다. 바르트는 이런 차원에서 재림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특히 성령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구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사역은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이를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데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미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고 거기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와서 함께 계심을 뜻한다는 박윤선의 해석은 정당한 해석이다. 이는 역사가 다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며 제 3차 오심은 전혀 새로운 오심으로서 그의 완전한 계시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 번째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이며 즉각적이고 결정적’ (universale, unmittelbare, abschliessende) 자기 계시라고 바르트는 이해하였다.

V. 천년왕국

 

천년왕국에 관한 박윤선의 입장이 그의 시대에는 개혁주의 전통 밖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은 일종의 역사적 전천년설 (historical premillennialism)로 파악되는데 이는 그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는 부인하지만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선교사들이 가르쳤던 전천년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가 전천년설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고 주장함에 있어서 후천년설 (postmillennialism)과 무천년설(amillennialism)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후천년설에 대한 비판

박윤선의 후천년설에 대한 비판은 주로 로레인 뵈트너 (Lorraine Boettner)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뵈트너는 <천년왕국 (The Millennium)>에서 후천년설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를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소개하고 비판하였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은 수효에 포함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성경적 증거로서 계 19:11-21을 들면서 여기에 나타난 백마 탄자의 승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신자들을 군사로 삼아 복음으로 온 세계를 점령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자의 수가 멸망받게 된 자의 수보다 더 많은 황금의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계 10:11-21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대한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그 나라를 장차 재림을 통하여 멸망시키게 될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함으로서 뵈트너의 후천년설을 반박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뵈트너는 이 세상이 국제적 협력, 과학의 발달을 통한 물질문명의 진보를 이룩하고 있는데 이는 후천년설에서 주장하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증거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뵈트너는 계 20:4-6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것’이란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박윤선은 5절에 나타난 ‘첫째 부활’이란 표현을 뵈트너가 중생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부활이란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박윤선의 후천년설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음이 사실이다. 루이스 벌코프가 지적했듯이 후천년설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배교와 사탄의 저항 문제를 경시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지적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의 후천년설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은 그 자체로서 영광스러운 것이라서 대환난 (The Great Tribulation)이 발생하고 사탄이 저항하여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게 될 것이라는 결말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후천년설을 지지하는 뵈트너도 이를 경시하는 경향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진화론의 등장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후천년설에 나타난 천년왕국이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를 벌코프가 잘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다.

 

2) 무천년설에 대한 비판

박윤선은 무천년설을 비판하면서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펼친다. 먼저 언급되어야 할 인물은 바빙크이다. 박윤선은 바빙크가 계 20:1-10이 전천년설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성경 본문임을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박윤선은 바빙크가 중복설 (recapitulation theory)에 근거하여 전천년설을 부인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중복설이란 요한계시록의 전반부에서 이미 언급된 축복들이 천년왕국이란 표현을 통해 반복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승리를 통해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는 이론에 해당된다. 이는 어거스틴 (Augustine)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는데 워필드 (B. B. Warfield)는 요한계시록의 전체를 일곱 단원으로 나누고 이는 모두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중복설의 핵심은 20장에 나타난 천년왕국이 재림 후에 일어나게 될 사건이 아니라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중복설은 전천년설을 부인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윤선은 바빙크의 계 20:4-6에 관한 해석이 별세한 성도들의 천국생활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박윤선은 여기에서 바빙크가 어떻게 천년왕국이 성도들의 천국생활을 지칭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바빙크는 계시록 20장이 전천년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4-6절까지에 나타난 성도의 상태가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안식에 들어간 상태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빙크는 3가지 이유를 들어서 20장이 전천년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 본문이 유대인의 회심,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건, 예배의 회복, 그리고 땅의 회복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든다. 둘째, 핍박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 자들이 다스리게 될 곳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언급되었음을 든다. 셋째, 이 본문에서 요한이 천년왕국에 선행하여 발생하는 육체의 첫 번째 부활이나 그 후에 발생하는 두 번째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바빙크는 살전 4:13-18을 언급하면서 사도 바울도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을 부인한다고 주장한다.

박윤선은 바빙크의 전천년설에 대한 이러한 반론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박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의 견해를 설명한다. 그는 먼저 카이퍼가 분명히 무천년주의자로서 전천년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카이퍼의 계시록 19장과 20장 해석에 있어서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해설한다. 계 19:11-21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일반적으로 무천년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계없이 복음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카이퍼는 11절에 등장하는 ‘백마 탄 자’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인 것으로 파악한다. 또한 20절에 나타난 짐승에 대한 처분은 재림하신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를 처벌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살후 2:8). 여기에 언급된 짐승은 마귀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세상 말기의 정권을 가리키는데 (계 13:2) 이는 다니엘서 7장에 언급된 네 짐승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카이퍼는 또한 계 20:1-6에 등장하는 천년의 기간이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본문이 장구한 세월동안 계속 될 지상 왕국을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박윤선은 카이퍼가 무천년자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그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재림과 심판 사이에 어떤 중간시대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 복음서와 기타 신약의 종말관 장절에서는, 부활과 심판과 이 세상 멸망과 새로운 세계 등을 한몫 연출시키는 최후적 귀결로서의 재림을 말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일체를 이루나니, 양자 간에 하나의 장구한 시대가 개입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이 기간이 잠간 동안의 과도기이며 인간의 역사적 계수법으로 측정될 수 없는 하나님의 직접 행동 기간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런 카이퍼의 전천년설에 대한 강조에 더 무게를 두면서 그의 이러한 입장이 박윤선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카이퍼가 “천년이란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의 지극한 완전성을 표현하는 것 뿐이다.” 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상 그의 무천년설 입장을 대변하는 표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카이퍼의 이러한 결정적 주장은 박윤선의 전천년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부정하는 차원이라고 보아야 더욱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박윤선이 카이퍼가 어떻게 무천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를 부인하는 전천년주의적 견해를 수용하고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윤선은 워필드의 전천년주의적 입장을 반박함에 있어서도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워필드는 계 20:2-3의 해석에 있어서 사탄은 이미 천국에 있는 성도를 해할 수 없도록 결박되었으며 또한 동시에 잠깐 동안 세상에 놓여서 행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두 사건은 선후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게 될 일인데 그 이유는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사탄이 간섭할 수 없고, 단지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으나 그것은 잠깐 동안 놓인 것과 같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하여 박윤선은 ‘부자연스러운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더 이상 워필드의 주장을 설명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과 관련하여 워필드가 주장하는 전천년설에 대한 반박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먼저 천년왕국은 사실상 중간상태 (the intermediate state)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반복설에 기반을 두고 워필드는 계시록의 사건들이 사실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미 발생하였던 사건에 대한 상징적 해석으로서 그 사실들을 확장 (expansion)하고 그에 대한 완성 (completeness)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반복설이 단순한 반복의 의미만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일곱 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시기를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진적 평행법’ (progressive parallelism)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요한은 계시록의 사건들을 기록함에 에 있어서 다양한 사건들의 세부 사항과 연대기적 기술에 있어서 이들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밝히고 있지만 결코 이러한 세부적이며 연대기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이 사건들이 영적, 도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의 원래 목적은 그리스도가 베푸신 구원 사역을 확증하고 이를 널리 알려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워필드는 요한 계시록의 해석 원리중의 하나로 ‘윤리적 목적’ (ethical purpose)의 원리를 언급한다. 이러한 해석의 원리에 근거하여 그의 전천년설에 대한 비판은 천년왕국의 ‘천년’이라는 기간이 상징적이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니게 될 ‘위대함’ (greatness) 그리고 이와 관련된 '철저함‘ (thoroughness), 그리고 '완성' (completeness)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이란 단순히 천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왕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왕국이 누리게 될 놀랍고 영광스러운 실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워필드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천년동안 다스리게 된다는 개념이 의도하는 바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 안전, 그리고 축복을 가리키는데 이는 일상적 언어 표현을 초월하는 기쁨, 안전 그리고 축복의 완전함을 뜻한다.”

박윤선은 이러한 워필드의 무천년설에 대하여 계 19:11-21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으로, 그리고 계 20:1-6은 그의 왕국에 해당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박윤선이 워필드의 전천년설에 대한 비판과 무천년설에 대한 지지에 드러난 깊이를 간과하고 그의 견해에 대하여 공정한 입장을 취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박윤선이 이렇게 공정하지 않은 평가를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서영일은 계 20장에 언급된 사탄의 결박과 관련된 워필드의 다음 문장을 언급하면서 그 이유를 추정한다: “시간과 연대기적 연속으로 표현된 것은 그 자체가 상징이지 상징되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서영일은 박윤선이 워필드의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단순히 그의 무천년설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서영일은 왜 자신의 이러한 추정이 박윤선의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함에 있어서 마땅한 이유이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정작 밝히지 않는다.

워필드는 앞서 언급된 반복설, 그리고 연속적 환상, 상징주의와 윤리적 목적이란 4가지 원리를 자신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원리로 설정하고 이에 초점을 맞추어 천년왕국이란 개념을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박윤선은 어떤 해석의 원리 또는 관점을 가지고 이 천년왕국을 해석하고 있는가? 그는 카이퍼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카이퍼는 천년 시대를 과도기적인 부속 시대로 본 셈이고, 천년기 전설에서는 천년을 비교적 장구한 기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의 차이점은 그 기간의 장단 문제에 있는 것뿐이다. 천년 시대가 부속적인 시대이니 만큼 계시록 이외의 성경 다른 부분의 말세훈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것뿐이다. 예언이란 것은 종종 요약적으로 표현되면서 부속적인 것을 생략하는 일이 많다.” 천년왕국의 기간은 부속적이므로 그 중요성에 있어서 큰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박윤선이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천년왕국의 문제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적 입장을 부인하면서 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는가? 서영일은 이 문제에 관하여 박윤선이 자신의 스승들이었던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전천년설을 지지하였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그의 유교적 충성심을 해답으로 제시하였다. 워필드가 내세운 무천년설적 천년왕국에 대한 상징적 해설은 천년시대를 연대기적으로만 접근하는 박윤선이 왜 워필드의 견해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박윤선은 계시록에 나타난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게 될 실제적 사건이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워필드는 이 사건들은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는 사건들로서 단지 이미 주어진 구원의 사건들을 강조하고 보완하고 완성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워필드는 이를 통해서 상징주의적 견해에 도달하였지만 박윤선은 오히려 천년왕국이라는 개념이 예언에 내포된 압축성 때문에 계시록을 제외한 다른 성경에서는 기술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박윤선은 다른 성경에서는 생략된 진리인 ‘부속적인 것’이 계시록 20장에 비로소 표현되었다고 보았고 여기에 중요성을 부여한 셈이다. 워필드는 시간을 통해 표현된 기간이 완성이라는 전혀 다른 범주의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시간과 다른 범주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박윤선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닌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은 그로 하여금 시간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 여정은 그의 종말론에 나타난 비관적 세계관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박윤선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요한 계시록이 지닌 상징주의에 기반을 둔 무천년설과 거리를 유지한 채 전천년선을 평생 동안 견지하였던 이유는 그가 추구하였던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지평이 비시간적이며 비현실적으로 정의되도록 이끌었고 이에 대한 상쇄작용으로서 천년왕국에 대한 비전이 제시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박윤선의 신학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던 20세기 대한민국은 진리가 통치하지 않는 사회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드러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그의 종말론적 전천년설에 의해 해갈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VI.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박윤선의 종말론을 그가 어떻게 20세기의 다양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수용였고 또한 비판하였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종말론 주제들 가운데 하나의 특정한 주제에 치우치지 않고 대부분의 주제를 - ‘최후의 심판’이라는 주제를 제외하고 - 다루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종말론은 천년왕국설에 근거한 전천년설을 제외하고는 개혁주의 신학자들, 특히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이들의 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의존적임을 발견하게 된다.

바르트와 헨드리쿠스 벌코프, 틸리히를 위시한 현대 신학자들의 반성경적, 반개혁주의적 경향을 철저하게 반박하는 견해를 지니고 있음이 아울러 발견된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에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자인 코르넬리우스 반틸 (Cornelinus Van Til)의 바르트 비판서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의 비판은 바르트가 지닌 죽음과 부활에 대한 비성경적 견해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 비판을 통하여 박윤선은 개혁주의적 죽음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변호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전천년설에 해당되는데 이는 전통적 개혁주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윤선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 유학 시절에 이 문제를 놓고 상당히 많은 고민에 빠졌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바빙크, 카이퍼, 워필드를 포함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들을 읽었고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였음이 드러난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들의 견해들을 비평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박윤선의 시각이 다소 부분적이었으며 그 결과 이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전천년설이 성경적인 견해라는 단정적 주장에 의해 자신의 의견을 결정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것은 그의 종말론에서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이런 아쉬운 점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말론은 개혁주의 신학에 전반적으로 충실한 신학이며 특히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여 현대신학자들의 종말론적 주장들을 성경적으로 비판함으로서 한국 개혁신학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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