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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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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6년 12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5 나를 따르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18-22)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이제 새 대통령을 뽑는 대선 경쟁이 짧은 기간 안에 치열하게 전개 될 것으로 보인다. 나를 따르라는 대선 주자들의 외침이 들려올 것이고, 국민들은 누구를 따라야 할지, 또 그 사람은 정말 따를 만한 사람일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 천년 전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자기 인생을 걸고 한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 요구된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8-19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구절만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너무도 쉽게 예수를 따라 나선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된 것일까? 아니면 이들이 단순한 믿음이 있어서 일까? 우리가 사복음서를 살펴보는 유익 중에 하나는 각 사건이 일어나게된 추가적인 내용을 종합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첫 만남인 것 같은 이 장면은 사실 첫 만남이 아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요 1:35-37,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이 때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이었다. 그들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다. 안드레는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 보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에 그 분이 메시아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를 예수께 데려간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고 말씀 하신다. 원래 이름은 시몬인데, 반석이란 뜻의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뒤 갈릴리로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전, 그 사이에 세례요한이 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막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그의 선생이 잡히자 다시 갈릴리로 와서 원래 직업인 어부로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 사이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을 마치시고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오셔서 살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에 놀랐다. 에수님께서 회당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쫒아내자 사람들은 또 놀랐다. 예수의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졌다. 예수님은 회당 근처에 사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신다. 베드로는 소문으로도, 그리고 자신의 장모가 치유받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예수라는 분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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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에서 발견된 예수님 당시 배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배가 두 척 있는 것을 보신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밤새 그물을 내리며 수고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다. ‘내가 이러려고 어부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3절을 보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두 척의 배 중에 왜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랐을까? 예수님 보시기에 베드로에게서 입질이 크게 오지 않았나 싶다. 예수님은 베드로 마음을 읽고 계셨다. 그가 가장 크게 반응할 것이고 그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도 움직일 것을 짐작하셨던 것 같다. 3절.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어떤 내용을 가르치셨을까? 내용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밤새 아무 것도 못잡아 가난하고 결핍해진 심령에 예수님의 입에서 들려지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답고 영광스런 소식은 베드로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어부 앞에서 고기 잡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베드로가 순순히 반응한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눅 5:5) 베드로 안에 믿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6-7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게임은 끝났다. 기적이었다. 어부로 잔뼈가 굵었던 그들은 밤새 헛고생을 했지만 예수님은 호수 아래 고기들의 움직임까지 꿰뚫고 계신 것이었다. 그동안 예수님을 지켜보며 입질만 하던 시몬 베드로가 드디어 예수님이 내리신 그물에 잡히는 순간이 왔다. 8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먼 발치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지켜만 보던 그에게 드디어 회심의 순간이 온 것이다. 되어진 일에 너무도 놀라 자동 반사적으로 일어난 반응이었다. 자신 뿐만이 아니라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고기잡힌 것으로 인해 놀랐다. 그의 동업자인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님은 놀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10절,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어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더 높은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이다. 거기에 있던 동업자들도 들었다. 11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복음에 따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른다. (마4:22)


요즘 세상에 나를 따라오라고 해서 순순히 따라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람에게서 기대할 만한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누군가를 순순히 따라 나서지 않는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무릎꿇는 순간없이 사람들은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주님의 주되심을 발견하고 그 앞에 무릎 꿇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따라 나섰지만 우리는 초기 제자들의 모습에서 부르심과 순종 사이의 간극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종종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막아서려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부르심 자체에는 순종했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생각과 자기 야망를 품은 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 반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야 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은 번역기가 필요하다. 독일신학자 본회퍼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도망간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의 처음 목적이었던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된다.


한 때 한 자리를 차지하기 원했던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AD 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목이 베여 순교한다. 열 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많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안드레는 지금의 터키 에뎃사 지역에 이르렀을 때 붙잡혀 십자가형으로 순교한다. 그는 X자형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여기서 세인트 앤드류 십자가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교회를 지도하다가 네로에 의해 순교한다. 그는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거꾸로 매달려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로마로 강제 소환되어 기름이 끓는 가마에 던져졌는데 기적적으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는 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시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순교하고 한 사람만 죽음을 면한 유배형을 받았다. 자, 자신를 따랐던 거의 모든 제자들이 참수형이나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참담한 결과다. 메시아를 따른 결과가 참혹한 죽음이라니…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그들의 목을 드리웠다. 결국 각자의 십자가를 지기까지 예수를 따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부름은 소위 인생의 대박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형통한, ‘잘되는 나’를 보장해주는 길로의 부르심이 아니다. 그의 부르심은 아무런 헌신없이도 예수님만 믿고 영접하면 우리를 영적 높은 수준까지 이끌어주겠다는 약속도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를 부르셨지, 값싼 은혜에 만족하며 자기야망만 붙들고 사는 주일신자를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 내게 그동안 익숙했던 생활패턴을 버리는 것이다. 버려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와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예수님과 깊이 결속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건 축복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건 그분을 따르기 위함이다. 우리는 각자 모태신앙이건, 은혜를 체험했건,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그를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다. 아직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먼 발치에서 지켜 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우리는 반드시 나의 야망을 내려놔야만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타인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손해 보고, 오해와 핍박을 당하고, 또 죽음까지도 마주하는 순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바울을 말한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서에서 말하는 제자의 삶은 나의 원함에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삶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의 삶이 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 회퍼는 말한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오늘날 많은 신자가 자신의 삶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 아무런 대가지불없이 모든 은혜를 쉽게 제공받는 신앙생활을 원하고 있다. 신자는 많지만 제자가 너무 적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천국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데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제자도는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더 높은 부르심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주목하며 그 분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순간이 오길 기대하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던 베드로처럼 나의 나됨을 새롭게 발견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주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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